[승강장일기] 오전 8시, 혜화역 승강장에 뜬 보름달

2023년 2월 9일 279일 차 혜화역 선전전

2023-02-09     양유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교통약자법 기자회견을 겸한 선전전 현장 모습. 다들 이동권 보장 관련 피켓을 목에 걸고 있다. 사진 양유진

일기를 쓰는 사람이 장소에 늦게 도착하니, 혜화역 선전전의 가장 첫 모습은 경찰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검정과 형광 노랑의 색깔만이 가득한 그곳은, 인간의 외침을 막아선 듯한 방음벽의 모습이다.

매일 하던 선전전은 벽에 붙어있는 현수막 문구처럼 기자회견으로 형식을 바꿔 진행한다. 다급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승강장 벽면 현수막엔 이렇게 적혀있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촉구 기자회견”

앰프 앞 휴대전화가 앰프에서 나는 소리를 녹음하고 있다. 앰프 옆에는 분홍색 토끼 인형이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15분, 휴대전화는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한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이재민 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 사무국장은 기자회견 참가자 앞에서 만담 같은 발언을 이어간다.

반대편에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제각기 커다랗고 굵은 글씨로 쓰인 피켓을 들거나 목에 걸고 있다. 피켓에는 “장애인이동권 예산 즉각 확보하라, 이제는 태워주십시오”라는 문구가 붉게 강조돼 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발언 중이다. 사진 양유진

피켓 뒤편에서 휴대전화들이 종종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박경석은 “지금까지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고) 무정차 하면서 가버렸거든요. ‘이제 무정차하지 말고 이제는 태워주십시오!’ 이렇게 우리 국장님께서 힘차게 외쳐볼까요?”라고 제안하고, 이재민은 그 말에 호응하며 구호를 외친다. “끝에만 같이 두 번 따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애인도 무정차하지 말고 이제는 태워 달라!” 기자회견 참가자가 외친다. “태워 달라!”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지역 간 이동이 가능해야 하고, 고속·시외버스 타고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승강장을 채운다. 이 순간만 외쳤던 게 아니라 계속 이야기하고, 법 개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경석은 화가 “팍팍팍팍”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박경석이 말한다.

“어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질의한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김 의원이 한 총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역대 정권에서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까 총리가 ‘열심히 노력했다’ 이렇게 또 이야기하더라고요 열심히 노력했다고 그러니까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박경석은 그 어떤 정부도 “안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모두 필요성을 공감했지만 결국 법과 예산 때문에 되지 않은 것이라고 힘줘 강조한다. 정말 화가 나 보인다.

피켓에 달, 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한 “손가락이 아닌 전장연과 함께 달을 보아요. 구독 좋아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이와 관련된 얘길 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29분, 갑자기 달과 손 그림이 그려진 피켓이 등장한다. 박경석은 달 보기 운동을 같이 하자며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정부가 비용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면 결국 종족(장애유형) 간 내전 상태와 지역 간 차별은 심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멀리서 유금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왜 웃으세요?”, “KBS도 왔는데 종족이라고 이야기해서요.”, “종족 싸움이죠. (장애)유형별 싸움.” 박경석과 유금문의 웃음에 관한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8시 36분, 기자회견 참가자와의 질의응답도 이어간다. 쌍방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자회견이다. 매일 승강장에 나오는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동료가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해 경기도 하남시에서 양평군으로 가려고 시도하다 결국 실패한 경우를 들며, 개정안이 통과되면 하남시에서도 양평까지 2주 전에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거냐 묻는다.

이재민 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 사무국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양유진

이재민은 광역 이동의 가능성과 예약을 2주 전에 해야 하는지 두 가지 문제로 정리하며, 이번 법 개정안에 광역 이동 문제가 모두 포함돼 있다고 답한다. 박경석은 수동휠체어라 양평군에 갈 때 일반 택시에 억지로 휠체어 싣고 갔더니 13만 원이 나와서 가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형숙은 다시 묻는다. 지역 간 이동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요구해왔고, 비용 때문에 못 한다고 하지 않았냐며, 올해 7월부터는 비용이 많이 들어도 된다는 것인지 물었다. 박경석은 국고지원의 중요성을 말하며, 오늘(9일) 논의해서 개정안 통과시키라는 게 기자회견의 핵심임을 말한다.

안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가 발언 중이다. 그의 손에는 “대한민국은 기획재정부의 나라이냐! 기획재정부는 특별교통수단 운영비 책임 지방정부 뼈꼴빼먹지 말라!”라고 적힌 피켓이 있다. 사진 양유진

시민 패널로 소개된 안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미리 준비해온 발언문을 보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장애인 동료 활동가, 그러니까 휠체어를 탄 동료 활동가와 함께 행사를 준비했을 때의 일입니다. 동료 활동가가 모이는 시간에 맞춰서 오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점심을 같이 먹는데, 이 동료 활동가는 다음 일정을 위해 한 시간 전에 미리 특별교통수단인 장콜을 부르고서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장콜이 오고 이분은 급하게 나가셨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급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때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겪지 못했던 이동의 긴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약속 시간이 늦어 미안해하지 않도록 법과 예산이 보장될 수 있게 국가권력에 맞서는 전장연 투쟁에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선전전을 하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 앞을 걸을 수 있는 시민 두 명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양유진

박경석은 기자회견 참가자를 둘러보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자신에게 달이 무엇인지” 묻는다. 사람들은 눈을 피하지만 앞으로 나와 하나씩 이야기한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던 조아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탈시설지원법과 예산이라고, 유금문은 장애인평생교육 법과 예산이라고 힘 있게 외친다.

정다운 전장연 활동가는 옅은 웃음을 내비치며 머리를 긁적인다. “제가 뭐 이렇게 단어를 사전을 많이 찾아보거든요”라고 하며 사자성어를 헷갈려 한다. “견월지망이라고, ‘지망’ 맞나? 견월망지인가? 갑자기 기억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견월망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달이 ‘본질’을 의미하고, 자신에게 달은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본질이라고 말한다. 실은 ‘견지망월(見指忘月)’이다. ‘본질인 달은 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뜻이다.

조재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가 발언 중이다. 사진 양유진

박경석은 조재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를 부르며 마이크가 두 개고, 피켓도 두 개가 있어 혼란스럽다고 한다. 혼란을 뚫고 나온 조재범은 “(저에게 달은)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돼서 모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똑같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라고 발언한 후 빠르게 돌아간다. 박경석은 교과서를 읽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조재범의 발언을 다시 힘줘 언급한다.

다음 사람 추천을 받는데 누군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지만, 그 사람이 이재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박경석은 다음 발언자를 찾아본다. 손에 피켓을 든 두 사람이 앰프가 있는 곳으로 등장한다. 무엇을 타고 왔냐는 질문에 두 명 모두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한다. 한 사람은 개인 활동 작가라고 소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옥바라지선교센터에서 활동한다고 소개한다.

사이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가 발언 중이다. 사진 양유진

사이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는 달을 진짜 달이라고 생각했다며 “모두에게 비추는 (달)빛 하나도 볼 수 없는 감옥이 여깁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 이 감옥의 삶을 살 때 더 이상 감옥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달을 볼 때 그때 감옥은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한다.

노예주 작가는 “미대를 졸업하고 최초로 배리어프리 기획 전시를 했는데, 50여 명이 준비한 졸업 작품 중에 휠체어 이용자 볼 수 있는 작품이 2개 정도밖에 없었다”며 배리어프리 전시를 하는 학교의 접근성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선전전 참가자 모두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양유진

달을 이야기하니 갑자기 혜화역 승강장에 보름달이 뜬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견지망월인지, 견월망지인지 계속 헷갈릴 것 같다. 그렇지만 이곳의 모두가 달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는 피곤해 보이고, 어떤 누군가는 덜 피곤해 보인다. 앞에서 계속 말하는 박경석도 피곤하지 않아서 계속 말하는 것 같진 않은 것 같다. 검정과 형광 노랑의 경찰과 조끼를 입고 안전봉을 들고 있는 지하철 보안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달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선 피곤함과 함께 생기와 반짝거림이 동시에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