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희망의 근거와 푯대들 / 이종건

마이너의 서재 『가난한 도시생활자들의 서울 산책』, 김윤영, 후마니타스

2023-02-10     비마이너
책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김윤영 지음, 후마니타스, 1만 6000원) 표지. 사진 후마니타스

무언가를 지키겠다며 도시 한편에서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은, 눈에 자꾸만 뭘 담아두며 산다. 요즘 되뇌는 노랫말이 있다. 김일두 씨가 부른 ‘가난한 사람들’의 일부다.

“주장할 사람, 거기 누구 없소? 나는 이제 그만 할라요.”

그토록 많은 집회를 하고, 그토록 많은 활자를 쓰고, 그토록 많은 발언을 하고, 또 그토록 많은 죽음, 실패를 거치면서도 이토록 더디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 주장하기에도 지친다. 그냥 가만, 가만. 내가 멈추면 또 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길을 가지 않을까 하며 멍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뭘 담아 두며 산다. 그렇게 살아야지 하다가도 어떤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 일렁인다. 그 이야기 혼자 담고 있을 수 없어 보따리마냥 풀어내고, 그 이야기에 눈 반짝이는 어떤 이를 보며 다시 내 마음 어딘가 불꽃이 인다. 그러니 활동가들은 자꾸 뭘 담으며 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풍경 속에서, 세상천지 모두가 그 풍경을 사라져야 할 것처럼 여기는 게으르고 납작한 관성 속에서 “꼭 그래야만 하겠느냐고” 화두를 던지기 위해 담아두고 산다. 다 쓰러져 가는 동네에도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두세 평짜리 방에 몸 뉘는 이가 할 말이 있다고, 통계와 숫자의 세계 속에 지워지는 이름들 놓칠까 무서워 작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때만 맞으면 언제든 그 이야기를 풀어놓을 준비를 하고 산다.

김윤영이 그렇다. 10년 넘는 반빈곤운동 활동가 경력 내내 무언가를 담고 살았다. 도시의 관리자들이 거추장스러워하는 이야기들, 그래서 지워버리려 부단히 애쓰는 그 장면들을 단 하나도 지울 수 없다며 기억하고, 주장하고, 조직하고 그렇게 써 내려갔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과도 같은 경의선숲길 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용산 남일당 망루를 만나고, 30년 전 아현동 포차거리의 이모들과 바로 몇 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마포 아현 철거민 박준경 열사의 곁을 거닐기도 한다. 기억 저편에 있을 상계동 철거 투쟁은 오늘날 쫓겨나는 이들의 현실과 맞닿아 당장 일어난 일인 것처럼 소환되어 저릿하다. 그렇게 김윤영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광장의 큰 물결, 그 물결 한편에서 끊임없이 골목 이야기를 하던 반빈곤운동 활동가들의 곁에 서게 된다.

그만 주장하고 싶다던 마음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옥바라지선교센터는 쫓겨남의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다. 모든 현장의 첫 순간, 늘 빈곤사회연대에 연대 발언을 부탁했고 그중 대부분을 김윤영 활동가가 맡았다. 그이가 책 『가난한 도시생활자들의 서울 산책』에서 말하고 있듯, 우리는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자신의 주장을 의심하고, 평가하고, 객관화하려 노력하다 조금 쪼그라들기도 한다. 자기검열이다. 개발과 쫓겨남이 워낙 일상인 도시에서, 그 모든 살벌한 풍경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천만의 거대한 일상 속,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천막을 치고 피켓을 들고 있노라면 내 주장이 온당한가를 거듭 되묻게 된다. 쫓겨남도 일상이라며 받아들이라는 그 무언의 압박에 위축되곤 한다.

2021년 8월 17일, 복지 사각지대에서 죽어간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을 추모하는 합동 사회장이 열렸다. 사회를 보고 있는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그의 뒤로 ‘여기 존엄한 삶이 무너졌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라고 적힌 문구가 보인다. 사진 하민지

그럴 때 김윤영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꾼마냥 보따리를 풀어낸다. 지금 앉아있는 몇 명의 사람들, 띠를 두르고 조끼를 입고 투쟁가를 틀어놓은 우리의 작은 모임이 어떤 역사에 잇대어 있는지, 그 길에서 누가 싸웠고 어떻게 이겼으며, 결국 우리가 어떤 도시를,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지 설득력 있는 특유의 톤으로 풀어낸다. 그 얘기를 다 듣고 나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힘들 때 나는 언제라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망한 운동의 꽁무니만 쫓아온 내게도 드디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할 용기가 생겼다.” (204쪽)

저자는 1,842일 동안 지속되었던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의 기억을 ‘희망의 근거’라 부른다.

“쫓겨난 이들은 이제 용산이라는 푯대를 바라보며 자신의 길을 그린다. 붉은 머리띠와 검은 조끼를 입는 것도, 가방조차 함부로 내려놓지 않던 바닥에 엉덩이를 척척 붙이고 앉는 것도, 등 뒤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는 것도 계속 살기 위해서다. 이렇게 나를 구하는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을 가리켜 ‘연대’라고 한다.” (79쪽)

오늘날에도 쫓겨나는 철거민들은 으레 ‘용산’을 이야기한다. 그때 그 참사를 보며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도 반복되는 비슷한 현실 속에서 그날의 기억이 소환된다. 뉴스를 통해 봤던 그 장면이 내 삶의 터전을 덮칠 때, 이제 우리는 본능적으로 ‘용산’을 떠올린다. 그렇게 떠올린 용산은 거대한 폭력 앞에 무기력해지는 인간 개인이 아닌, 연대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고, 그 기억에서 길어 올린 용기 한 무더기다. 저자는 그걸 두고 용산을 푯대 삼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희망의 근거와 푯대들, 도시운동의 현장 거의 대부분 영역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며 기록하고 기억한 활동가의 경험은 그렇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근거가 되고, 푯대가 된다.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조금 덤덤했다. 해가 갈수록 그렇다. 쪼들리고 지치는 마음이 연대의 기운을 앞지르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곤 한다. 읽는 내내 김윤영 작가가 앞에 앉아 그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산책하듯 가볍게 떠나자고 했으면서 막상 다 걷고 나면 처음 철거 현장에 나섰던 그 마음마냥 느껍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한판 크게 벌여 집회를 하고 신나게 행진하며 서울 곳곳을 돌아다닌 것처럼 당당하고 후련하다.

그렇게 다시 싸울 힘을 얻는다. 독자들은 작가의 동지가 되고 싶어질 테다. 나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싸워야지 마음먹는다. 지워질 만한 존재들은 없다. 이 도시의 모든 폭력을 꼭꼭 씹어 소화하고, 몸뚱이 깊은 곳에 아로새겨 기억하자. 작가의 희망의 근거가 그러했듯, 오늘날 싸우는 이들의 푯대가 그러하듯 이 길의 끝에서 만날 평등한 도시를 꿈꾸며.

필자 소개

이종건. 기독교 도시운동 단체 옥바라지선교센터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집을 빼앗기고 생계의 터전인 가게를 잃었으면서도, 천막 농성장을 찾는 연대인들에게 “밥은 먹었어요?”라고 묻는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