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장애인이 되었고, 시민이 되었고, 내가 되었다

2023년 3월 16일 303일 차 혜화역 선전전

2023-03-16     복건우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16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 피켓을 든 선전전 참여자들이 모여 있다. 사진 복건우

혜화역 오이도역 방면 승강장 5-3, 5-4.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수다를 떤다. 지하철 보안관은 3~4명씩 조를 나눠 마을 어귀 팽나무처럼 승강장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다. 때마침 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이 앰프와 마이크를 실은 짐수레를 끌고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에게 피켓을 나눠주고, 카메라 삼각대를 펼치고, 마이크 앰프 소리를 조절하는 손이 분주하다. 김필순이 앞서간 자리를 강희석 나야장애인권교육센터 활동가가 뒤따라간다. 오전 8시 정각, 출근길 선전전이 시작된다.

“(박경석) 대표님 오늘 안 된대.” 한 참여자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출입문 앞으로 나와 선다.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 어떤 대화를 하면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특별하게 활동보조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중구센터 활동지원팀 코디(네이터) 나와주세요.”

8시 10분, 이차현 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코디네이터가 이규식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로 이차현이 이규식의 말을 요약해서 정리한 뒤 되묻는 식이다. “연령대요? 활동지원사는 60대가 많고, 장애인은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죠. 활동지원사 단가요? 너무 낮아요. 나이 드신 분들이야 일선에서 퇴직하시고 많이들 하시는데, 젊은 분들은 이 돈으로 기본적인 생활이 안 되니까 안 하시죠. 연령대가 다르면 공감대도 다르고 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단가를 많이 올려서 젊은 분들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16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303일 차 출근길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복건우

8시 15분, 전동차 출입문과 스크린도어가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한산한 승강장과 달리 전동차 안은 거의 꽉 차 있어 사람 한 명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최정희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가 미리 준비해 온 발언문을 낭독한다.

“지난 3월 3일 서울시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대상으로 지도점검을 한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1년에 1번씩 하던 게 이번에는 3년치를 한꺼번에 본다고 합니다. 기말고사 다 봐놓고 3년치 중간고사, 기말고사, 내일 있을 시험까지 다시 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이게 ‘행정 갑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25개 기관 중 전장연 쪽 18개 기관만 점검한대요. 그런데도 이걸 당연한 관리 감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게 많은 자료를 수시로 요구할 거라면, 인건비부터 지원해서 전담 인력을 2명 이상 배치하십시오. 서울시는 최중증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세상을 바꾸고, 권리를 생산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제도화를 추진하십시오.”

8시 25분, 강희석이 주디스 휴먼의 책 《나는, 휴먼》을 낭독한다. 주디스 휴먼은 1970년대부터 미국 장애인 운동을 이끌어 온 장애운동가이자, 장애인의 권리를 법과 제도로 실현하려 했던 장애권리행정가다. “나는 장애인이 되었고, 시민이 되었고, 결국 내가 되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강희석이 책 두어 꼭지를 낭독한다.

16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강희석 나야장애인권교육센터 활동가(오른쪽)가 주디스 휴먼의 책 ‘나는, 휴먼’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 복건우

“우리는 비슷한 목표를 공유했고, 비슷한 투쟁을 경험했으며,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며 미래의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대로 되기를 꿈꾸며 서로를 지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때 우리가 배우기 시작한 모든 것을 오늘날에는 장애 문화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 천천히 경청하고, 서로의 참모습을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연결하고,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찾기, 배우기.”

8시 35분, 김필순이 오는 27일 발간되는 이규식의 신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홍보한다. “책 나오면 모두 사 보실 거죠? 이규식의 세상 밖으로… 아니에요? ‘세상 속으로’라고 하네요. 장애인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역사적인 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주디스 휴먼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우리의 투쟁과 30년 전 미국의 투쟁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대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치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의 유전적, 재정적 짐으로 여겼다.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의 권위 있는 의사가 ‘우리가 당신의 딸을 데려가 키우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부모님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어떤 아이들은 먼 곳을 보내지고, 어떤 아이들은 다른 나라에 뺏겨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 모든 것은 체계적인 비인간화와 살인을 부추기는 캠페인의 일부였다. 나의 부모님은 딸이 장애인이든 아니든 함께 살기로 했다.”

16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김수경 씨(왼쪽)가 피켓을 목에 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복건우

8시 44분, 차례차례 돌아가던 마이크가 김수경의 손에 쥐어진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일을 잠시 쉬고 있다. “오늘은 전장연 투쟁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최근 서울시가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들을 전수조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도대체 뭘 조사하겠다는 건지 동료들한테 물어보니까, 예산 감축을 위해 활동지원시간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습니다. 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장애인의 생존권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장애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죽음으로 일구어낸 활동지원서비스라는 ‘권리’를 우리는 절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시민으로 있지만, 당분간 이 못된 정치를 똑똑히 쳐다보면서 투쟁에 연대하겠습니다.”

8시 55분, 이규식이 승강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삼각대와 카메라 렌즈 너머를 응시한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이규식 옆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는다. “내일 아침 선전전은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청량리 방면 승강장에서 기자회견으로 대체한다”는 입장 발표를 한다. 서울시의 ‘표적 수사’를 비판하는 장애인들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권리 조사’를 외친다. 이 말이 가져올 변화의 씨앗을 함께 심는다.

16일 오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선전전 참여자들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피켓을 줄지어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복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