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①]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 홍은전

[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 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나의 쓸모 _ 이규식①

2023-04-12     홍은전

《 나의 쓸모 》

①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신입’을 교육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복사기 사용법이다. 노들장애인야학 신입교사가 되었을 때 가뜩이나 기계치인 나는 선배 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많았다. 용건이 끝나면 선배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 복사기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들었어요?”

나는 이미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니까 이 복사기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야학 교사들이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1999년 서른 살의 야학 학생 이규식이 혜화역에서 휠체어용 리프트에 올라타려던 순간 리프트가 추락했고 규식은 스쿠터와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규식은 큰 부상을 입었고 야학 사람들은 지하철공사에 찾아가 항의했다. 공사 측은 ‘규식이 운전을 잘못해서 벌어진 사고’라며 그의 장애를 탓했다. 권리도 없고 법도 없고 ‘당연히’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년이 흐른 2000년 법원은 규식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규식은 보상금 500만 원을 받았고 혜화역엔 엘리베이터가 설치됐어요. 그때 규식이 보상금을 야학에 후원해서 그 돈으로 이 복사기를 구입한 거예요.”

야학 사람들은 그 복사기가 마치 혜화역 엘리베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늠름하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복사기는 그들에게 어떤 자부심의 징표였다.

2022년 2월 24일,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홍은전 작가와 노들야학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그 일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일의 전조였다. 이듬해인 2001년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했다. 노들야학은 대책위를 꾸리고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며 서울역 철로 점거를 감행해 지하철 1호선을 30분간 멈춰 세웠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수십 년간 갇혀 있던 중증장애인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이 된 규식은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야학 수업엔 잘 나오지 않았지만 거리의 투쟁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 성실했던 그는 귀신같은 능력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가장 먼저 길을 만들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첫 승리를 자축하며 구입했던 야학 복사기가 낡아서 잦은 고장을 일으킬 무렵인 2005년 드디어 장애인 이동권을 ‘권리’로 명시하고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다. 2006년 규식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으로 활동 공간을 옮겨 탈시설 운동을 시작했고 2011년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해 10년 동안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다 2021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되었다.

2021년 12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가 한 해도 어김없이 돈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이 법을 지키지 않자, 장애계가 ‘버스 대·폐차 시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같은 조항을 넣어 법의 강제력을 높여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요구하기 위해 규식은 매일 아침 여덟 시 혜화역에서 선전전을 진행했고 출근시간 만원 지하철을 연착시키는 강도 높은 직접행동을 벌였다. 성난 시민들이 무시무시한 비난을 퍼부었지만 더 많은 시민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히 기사를 검색했다가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가 고작 28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 법은 극적으로 개정되었다.

2022년 1월 24일 혜화역 선전전 36일 차 아침의 모습. 당시 목뼈에 금이 간 이규식 대표가 깁스하고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2022년 1월 규식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간 곳도 혜화역 승강장이었다. 지하철 선전전은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등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계속되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선전전이 끝난 후 우리는 대학로에 있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실로 이동하기 위해 혜화역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왔다. 혜화역 2번 출구 앞, 서울시가 인권을 증진해온 역사적 현장을 기억하기 위해 바닥에 설치한 작은 동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 6. 28.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다.”

규식의 전동휠체어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동판을 무심하게 지나쳐 쌩-하고 먼저 나아갔다. 나는 문득 규식과 함께 이번 생을 살아간다는 게 아주 신나는 일 같다고 생각하면서 늠름한 그를 따라 총총 걸어갔다.

혜화역 2번 출구 앞 바닥에 설치된 동판.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 6. 28.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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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1969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연탄가스를 마셔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적이 있대요.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농사도 짓고 국수 면도 팔았는데 잘되지 않았대요. 자식들 교육 시키려고 여덟 살 때 서울로 이사 왔어요. 광나루 근처에서 밭을 얻고 밭 옆에 굴을 파서 집을 짓고 살았어요. 아버지는 밭에 나가 농사짓고 엄마는 시장에 나가 농사지은 것들을 팔고 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나는 방 안에서 먹고 자는 일만 했어요. 그런 나를 엄마가 항상 마음 아파하셨어요. 엄마가 내가 먹을 점심을 차려놓고 시장에 가면 나 혼자 점심을 먹었어요. 동생이 네 명이었는데 다들 나한테 잘했어요. 학교 마치고 돌아온 애들한테 밭에 가서 딸기 좀 따오라고 하면 걱실걱실 잘 따다 줬죠.

열 살 때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삼육재활원에 다녔어요. 엄마가 나를 업고 버스에 타면 누가 자리를 양보해주면 좋을 텐데 아무도 비켜주지 않아서 두 시간 내내 서서 가느라 엄마 허리가 다 망가졌어요. 열여섯 살엔 상일동에 있는 주몽재활원에 살았던 적이 있어요.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에는 물리치료를 받았는데 한 달에 30만 원이었어요. 빚을 내서 간 건데 돈이 없어서 석 달밖에 못 다녔어요. 계속 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거기서 경증장애가 있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걔가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업고 일주일에 한 번 광장교회에 데려갔어요. 나중엔 교회 중등부 학생들이 나를 업어줘서 일주일에 두 번 교회에 나가게 됐죠. 정기적으로 외출을 하게 된 건 처음이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삼육재활원에 있을 당시, 자원봉사자가 와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공 이규식

스무 살에 목사님이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작은자의집’이라는 장애인 공동체를 소개시켜줘서 들어가게 됐어요. 엄마와 목사님과 함께 옷 몇 벌, 성경책 한 권을 싼 작은 보따리를 들고 교회 봉고차에 올라 처음으로 집을 떠났죠.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주 외진 산속에 있는 작은 조립식 건물 앞이었어요. 대단한 기대는 아니어도 그래도 거기 가면 햇빛이라도 보지 않을까 했는데 그 조그마한 기대도 무너져 내렸죠. 거기 가서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목사님이 제안했을 때 목사님은 물론 좋은 뜻이었겠지만 아마도 그건 내가 아니라 가족들 좋으라고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나 때문에 힘든 가족들의 부담을 덜게 하려고요. 엄마와 목사님이 떠나고 나 혼자 남겨졌을 때 이런 외진 곳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온몸으로 다가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내가 엉엉 우니까 휠체어를 탄 남자분이 다가와서 어깨를 토닥여주었어요. 한참을 울다 배가 고파 밥을 먹고서 잠이 들었어요.

다음 날 새벽종을 치는 소리에 잠을 깼어요. 집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날 깨우지 않았는데 여기선 새벽에 일어나 다 같이 예배를 드려야 했어요. 첫날엔 방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공동체엔 방이 네 개 있었어요. 아침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나 같은 뇌병변장애인은 없고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어요. 방으로 돌아왔어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는 방이었죠. 이 텅 빈 시간을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방 사람이 다가와 집이 어디냐고 물었어요. 내 또래였던 그는 경증의 발달장애인이었어요. 그 친구가 내 대답을 천천히 들어주었어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어요. 한참을 그 친구와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오래 누군가와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처음 몇 달 동안은 거의 매일 울었어요. 가족들을 보지 못하는 게 제일 슬펐죠. 그곳 생활은 단순하고 지루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드리고 아침을 먹은 뒤 방에 있거나 집 앞에 나가 시간을 보냈어요. 점심을 먹고 오후엔 성경 공부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남은 시간엔 방에서 지냈어요. 저녁을 먹은 뒤 집 앞에 앉아 하늘을 보다가 아홉 시가 되면 방에 돌아와 잤어요. 다른 방 사람들을 만나는 건 예배 시간과 식사 시간뿐이었어요. 예배드릴 때 옆자리에 자주 앉았던 발달장애인 친구와 좀 친해졌어요. 걔가 나를 근처의 개울로 데리고 나가 그늘진 곳에 앉혀두고 자기는 개구리를 잡으러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어요. 그걸 지켜보는 것 정도가 생활의 낙이었죠. 2주 정도 지났을 때 목사님이 나에게 임무를 줬어요. 새벽 5시 30분에 거실에 있는 종을 쳐서 사람들을 깨우는 일이었죠. 무언가 책임을 져서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좋았어요. 제일 먼저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찍 잠을 잤어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작은자의집에서 이규식. 사진 제공 이규식

일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교회에 가는 날이었거든요. 그날은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피아노 반주를 하던 목사님의 딸 혜선이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어요. 혜선이는 배려심이 많고 친절해서 항상 먼저 말을 걸어왔어요. 나는 가족 외의 사람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어오는 말에만 겨우 대답할 뿐 그 이상의 말을 건네는 법을 몰랐어요. 누군가와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죠. 언어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불쌍하게 쳐다볼 것 같았어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내 처지가 슬퍼져서 마음이 더 울적해졌어요.

석 달 무렵까지는 공동체 생활이 그저 싫었어요. 내가 우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서서히 줄었어요. 그때 시영이라는 친구가 꾸준히 저에게 다가왔어요. 시영이의 엄마도 장애가 있었어요. 시영이는 교회가 끝나면 나를 공동체까지 밀어주었는데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 시영이에게 먼저 말을 건넸어요.

““너… 노, 노, 노래 잘, 잘하더라… 부, 부러워. 가, 가수, 해도 되겠어.”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나에겐 커다란 도전이었어요. 내가 천천히 말했더니 시영이는 차분히 들어주었어요.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그 후부턴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고 시영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줬어요. 시영이는 종교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자기가 노래 부른 것을 녹음해서 건네주기도 하고 직접 나에게 불러주기도 했어요. 시영이는 내가 처음 사귄 비장애인 친구였어요. 시영이와의 우정은 무료하고 우울했던 공동체 생활을 타개하는 활력소가 됐어요. 1년 뒤 시영이는 군대에 갔지만 크게 슬프진 않았어요. 그땐 이미 교회 청년들과도 작은자의집 식구들과도 많이 친해져 있었죠.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작은자의집에서 이규식. 사진 제공 이규식

- 커진 보따리를 안고

공동체에 들어와 세 번째 겨울을 맞은 어느 날이었어요.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낯선 사람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와 앞으로 같이 생활할 식구라고 소개했어요. 오른손이 없었고 오른쪽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다 덮고 있는 여자였어요. 영실이라는 친구였고 나보다 두 살 어렸어요. 나는 교회 청년부 비장애인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공동체의 장애인 식구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소개를 듣는 둥 마는 둥 했어요. 며칠 뒤 영실이가 먼저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복음성가 테이프와 카세트를 빌려달라고 했어요. 가까이서 보니까 앳된 얼굴이 예뻐 보였어요. 말을 건네려 했지만 내성적인 사람인지 아무 말 없이 성급하게 나가버렸어요. 그 후 영실이를 볼 때마다 말을 걸었고 영실이는 못 들은 채 자기 방으로 도망치듯 가버렸어요. 나는 공동체의 다른 장애인들보다 비장애인들과 더 많이 친했고 그사이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해 있었어요. 약간의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나에게 그건 일종의 놀이 같은 거였어요. 한 달쯤 지나니까 시큰둥하던 영실이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영실이가 말하길, 자기네 집에 큰불이 나서 화상을 입었는데 얼굴엔 흉터가 생겼고 오른손은 절단했다고 했어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영실이를 좋아하게 됐어요. 사랑에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에 마음을 고백한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영실이가 말을 건네면 이야기를 나누고 안 그런 날이면 친구에게 부탁해 집 앞에 나가 영실이가 가끔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죠. 덕분에 공동체 생활이 전혀 무료하지도 갑갑하지도 않았어요.

매서운 겨울을 지나 봄이 왔고 또 여름이 되었어요. 어느 날 아침 식사 시간에 영실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영실이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점심 식사 때도, 저녁 식사 때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저녁 예배가 끝나갈 즈음 목사님이 영실이가 인천의 다른 공동체로 떠났다고 말했어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 기별도 없이 떠나다니 서운함과 상실감이 아주 컸어요. 그날 이후 나는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졌어요.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고 겉돌기 시작했어요. 영실이가 떠나고 반년이 지났을 때 나도 그곳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2022년 2월 24일,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홍은전 작가와 노들야학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동생들이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는 것뿐 모든 게 3년 전과 똑같았어요. 가족들은 아침이면 직장과 학교로 흩어지고 나만 혼자 집에 남겨져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관상용 거북이를 보았죠. 재미있게 지내보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우울했어요.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공동체 식구들과 친하게 지냈던 교회 친구들, 스쳐 갔던 3년간의 인연들과 영실이가 생각났어요. 반년을 집에서 보낸 뒤 다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작은자의집에서 같이 지내던 전도사님이 경기도 광주에 새로 지은 예수사랑공동체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로 했어요. 두 번째 공동체 생활을 앞두고는 한 달 동안 이것저것 준비했어요. 제일 먼저 준비한 건 카세트와 녹음테이프였어요. 엄마가 새 카세트를 사줬는데 가격이 15만 원도 넘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엔 60분짜리 테이프밖에 없었는데 동생이 어디서 구했는지 120분짜리 테이프 열 개를 선물해줬어요.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면서 좋은 노래가 나오면 녹음 버튼을 눌렀어요. 내 손으로 먹이를 주면서 키웠던 거북이 두 마리도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마지막으로 편지뭉치들도 챙겼죠. 작은자의집에 살았을 때 교회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이었는데 영실이가 인천에서 보낸 편지도 있었어요. 전보다는 좀 더 커진 보따리와 함께 예수사랑공동체로 출발했어요. 1993년 여름이었어요.

그곳은 작은자의집보다 더 외진 시골이었어요. 내가 지낼 방에 짐을 풀고 혼자 남겨지자 또 서러움이 복받쳐 한참을 펑펑 울었어요. 잠도 오지 않아 밤을 꼬박 새우곤 새벽 기도에 참석했어요. 자폐가 있는 사람 한 명, 뇌병변장애가 있는 사람 한 명, 이렇게 둘 뿐이었어요. 새로 생긴 곳이라 사람이 적었는데 다행히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어요. 생활은 이전 공동체와 동일했어요. 5시 30분에 일어나서 예배를 드리고 아침 먹고 시간을 보내다 점심 먹고 오후 예배드리고 저녁 먹고 자는 거였죠. 나는 여기서도 새벽에 종을 쳤고 금세 공동체 생활에 적응했어요. 공동체 식구는 빠르게 늘어서 어느새 열 명이 되었어요. 노인, 알코올 의존증인 사람, 그리고 나 같은 뇌병변장애인도 한 명 더 들어왔어요.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있는 예수사랑공동체에서 이규식. 사진 제공 이규식

그전에는 내 삶이 뭔가 부당하다는 인식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가서 살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무서운 일이 일어났어요. 마지막에 들어온 뇌병변장애인이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어요. 예배 시간에도 빠지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였어요. 들어온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목사님에게 쌍욕을 하면서 싸우더니 그날 밤 휠체어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사라졌어요. 밤에 몰래 기어나간 거였죠. 멀리 가지 못하고 근처 도랑에서 발견됐어요. 아직 추운 겨울이라 얼어 죽은 것 같았어요. 그날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의 시체를 봤어요. 아, 우리 같은 장애인은 시설에서 나가면 저렇게 죽는 거구나, 나는 그냥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우울함에 허우적거릴 때 근처의 학교에서 여고생들이 봉사를 하러 왔어요. 학생들은 우리를 동네 저수지로 데려갔어요. 저수지가 꽁꽁 얼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이미 계획을 하고 왔는지 스케이트화를 준비해 와서는 추운 줄도 모르고 스케이트를 탔어요. 나도 휠체어에 앉아 신나게 얼음 위를 즐겼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놀이’라는 걸 해본 날이었어요.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째서 나는 지금껏 이런 즐거움을 몰랐을까, 어째서 나는 시간을 오직 견디기 위해서만 노력했던 것일까, 생각했죠. 여고생들은 스케이트를 즐기러 자주 찾아왔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또 함께 즐기면서 우울함을 견뎠어요. 이곳을 나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과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엎치락뒤치락했어요.

사람들이 꽁꽁 언 저수지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휠체어를 탄 이규식이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스케이트를 타던 한 사람이 이규식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다. 이규식 옆에 있는 사람은 눈을 뭉치고 있다. 눈으로 덮인 세상이 하얗다. 일러스트 훗한나 

* 이 글은 비마이너가 기획한 책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글 홍은전,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