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없는 세상 꿈꾸며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창립’
출범 1년 만에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창립대회 2시간 넘게 탈시설 당사자 발언과 연대 이어져 축하공연에 웃고 울고 “서울시 유엔협약 지켜라”
시설에서 살다 나온 장애인들의 웃음과 울음이 이어졌다.
“30년 전 시설에서 살 땐 자기 싫어도 자야 하고, 외출을 하려 해도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시설에서 나오니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모든 것이 나의 권리였습니다.” “혼자 살면서 음식점이 어디 있는지 은행이 어디 있는지 직접 찾아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주말에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자유롭게 지냅니다. 시설 들어가면 평생 못 나와요.”
장애인들이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로 답했다. 서울시의 ‘탈시설 때리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탈시설장애인 당사자들이 서울시청 앞에 모여 탈시설을 외쳤다. 시청 앞 거리에는 ‘탈시설 과정에 당사자 참여를 보장하라’, ‘유엔 탈시설 가이드라인 준수하라’, ‘자유로운 삶 지역사회로’ 등이 적힌 깃발이 나부꼈다. 대구에서 올라온 홍정수 씨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하는 김진욱 씨도, 노들장애인야학에 다니는 장애경 씨도, 저마다 떨리는 목소리로 탈시설에 힘을 보탰다.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을 일주일 앞둔 13일 오후 2시, 서울시청 동편 도로에서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창립대회가 열렸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지난해 4월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출범식을 가진 지 1년 만이다. 이날 창립대회에는 장애인 200여 명이 모였고, 탈시설을 지지하는 국회의원과 해외 활동가·연구자가 축하 영상을 보내왔다.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장애인들의 마음은 이날 생생한 당사자 증언과 공연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글로벌 탈시설연대 소속인 이네스 불릭 유럽자립생활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한국에서 시설을 폐쇄하고 모든 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분의 활동을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함께하겠다”며 연대를 표했다.
탈시설 권위자인 제임스 콘로이 미국 성과분석센터장은 “(미국에서) 53년간 탈시설 추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같은 비용으로 지역사회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면서 “장애인을 대규모 시설로 보내는 관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달라. 시대에 뒤떨어진 시설 수용 관행을 끝내자”고 밝혔다.
- ‘탈시설은 모두의 문제’ 장애·시민사회계 연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준비위원장 두 명은 연단에 올라 창립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나라 탈시설 정책의 초석을 마련한 ‘마로니에 8인’ 중 한 명인 김진수 공동준비위원장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커졌다. “저는 시설에서 20년을 살다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시설 생존자’입니다. 시설은 인권침해의 공간입니다. 모든 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박경인 공동준비위원장은 “떨린다”라고 말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지역사회에서 살려면 많은 게 필요합니다. 내 집, 내 일자리, 활동지원서비스가 있어야 합니다. 시설 안에 사는 장애인 여러분, 우리 모두 나와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을 같이 알아갑시다.”
두 사람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를 연신 외쳤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위원장은 미리 적어 온 발언문을 온 세상에 알리겠다는 듯이 크게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도 늦잠 자고,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제 또래 발달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살려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빨리 모든 시설이 없어져서 발달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습니다.”
시민사회계의 연대 발언도 이어졌다. 무대에 오른 발언자들은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시설 문제를 지적했다. 몽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수많은 이주노동자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사업장에 발이 묶인 채 살아가고, 청소년 성소수자는 부모와 교사에 의해 전환치료 대상이 되어 시설에 갇힌 채 살아간다”고 말했다. 림보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활동가는 “외국인보호소 역시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구금시설”이라며 “창살 없는 감옥, 하늘이 열린 감옥에서 벗어나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탈시설장애인들과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무대에 모여 탈시설을 목 놓아 외친 이유는, 그만큼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거주시설은 2021년 기준 1,535개로, 총 2만 8,565명의 장애인이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 노숙인시설 입소자 중 절반이 장애인에 해당하며, 정신장애인의 정신병원 장기 입원은 OECD 국가 중 상위권을 차지한다. 어린 시절 영유아 시설에 보내진 장애인이 성인이 되어 장애인거주시설로 옮겨지고 노인이 되어 요양시설로 보내지는 사회, 장애계는 이러한 사회를 ‘시설사회’라고 부른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시설에 격리 수용된 장애인은 개인 소지품을 가지거나 외부와 연락하는 등 기본적인 자유를 제약당한다. 대부분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퇴소할 수 없고, 수십 수백 명을 집단 수용하는 시설의 특성상 일상적으로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한다. 폭행과 학대 등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저항하거나 외부에 알리기 어렵다. 지난해와 올해 정부 탈시설 시범사업 대상자는 400명에 그친다. 거주시설 장애인의 1.4% 수준이다.
15년 전인 2008년, 우리나라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다.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협약에 따라 정부는 장애인의 탈시설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지난해 9월 협약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탈시설가이드라인을 보면, 정부는 모든 형태의 시설 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하고, 시설 투자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최근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서 ‘탈시설’ 용어를 삭제하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설도 하나의 선택지’라는 기조로 해외 장애인거주시설을 둘러본 바 있다. 모두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위반 소지가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립된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 이행을 정부에 강하게 촉구할 예정이다. 시설에서 당한 억압과 폭력을 증언하는 장애인 당사자의 삶이 곧 탈시설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탈시설가이드라인 제작에 참여한 김미연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은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만들어진 협약과 가이드라인은 탈시설을 분명한 목표로 정하고 있다”며 “오늘 모인 여러분의 목소리가 전 세계 장애인의 삶을 바꾸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라고 축하했다.
- 탈시설연대 유엔협약에 힘 싣는다, 다음달 창립총회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여성공감, 서울피플퍼스트 등 장애인단체는 축하공연으로 창립대회의 열기를 더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이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시설 밖으로 세상 속으로’라는 소절을 따라부르거나, 연단 앞으로 나와 깃발을 흔들고 몸을 움직였다.
이어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소속 회원들은 유엔탈시설가이드라인을 낭독했다. 모든 시설 수용을 폐지하고, 장애인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고, 장애인 탈시설 지원계획을 수립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룹홈(공동생활가정)과 같은 소규모 시설이 탈시설 대상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회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소리 높여 외치는 한편 꾹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는 다음 달 3일 창립총회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한편, 서울시는 탈시설 관련 사업 예산에 대해 7월 말까지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 이행에 대해서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