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③] 기어서 노들섬까지 / 홍은전
[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 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나의 쓸모 _ 이규식③
《 나의 쓸모 》
①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② 싸우는 법을 배우다
③ 기어서 노들섬까지
- 시설 비리에 맞선 열띤 투쟁
2004년 정립회관에 비리 문제가 터졌어요. 정년퇴임을 앞둔 관장이 정년을 연장하기 위해 변칙적으로 정관을 개정했고 수영장을 짓는 과정에서 공사금을 착복하는 비리도 저질렀어요. 문제 제기하는 직원들을 정직 처분해서 직원들로 구성된 노조가 저항에 나섰어요. 복지시설이 사유화되는 문제라고 여겨서 이동권연대와 정립회관에서 동료상담을 배웠던 중증장애인들이 함께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고 관장 퇴진을 요구하며 직원 사무실을 점거했어요. 금세 끝날 줄 알았는데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더니 무려 231일이나 지속됐어요. 중증장애인들과 사회복지사들이 함께 먹고 자면서 싸움을 계속했어요. 남자들은 사무실에서, 여자들은 주간보호실에서 자고, 화장실 세면대로는 부족해서 싱크대에서도 씻고 대걸레 빠는 통에서도 씻고 물 나오는 곳이라면 다 붙어서 씻었어요.
아침에 복지관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에 맞춰 피케팅을 했는데 복지관 편에 선 직원들이 우리 중증장애인들을 비웃고 조롱했어요. 아무 생각이 없는 중증장애인들이 비장애인 노조의 사주를 받아 꼭두각시처럼 행동한다면서 막말을 했죠. 정립회관은 한국소아마비협회라는 장애인당사자 조직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해외의 자립생활운동을 선도적으로 들여와 우리에게 가르쳐줬던 곳이었어요.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이 차별적인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설파하던 사람들이 막상 자기들이 위협받으니까 우리더러 그저 비장애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일 뿐이라며 무시하고 공격하는 게 치가 떨렸어요.
이 사안을 두고 장애계는 둘로 갈라져 대립했어요. 관장 편에 선 장애인단체들은 정립회관을 운영하는 한국소아마비협회가 장애인 당사자 조직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고 비장애인인 노조가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장애인을 앞세우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웠어요. 사실 나는 시설비리 문제에 관심이 없었어요. 예상보다 농성이 너무 길어지는 데다 장애인들끼리 싸우는 것도 싫고 또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노조 위원장에게 그만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규식이 형이 있어야 힘이 된다면서 계속 같이 싸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계속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한구석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날의 폭력 사태를 겪기 전까지는요.
어느 날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우리가 점거하고 있던 사무실로 쳐들어왔어요. 정립회관에서 테니스, 양궁 같은 체육 동호회 활동을 하는 경증 지체장애인들이었죠. 우리가 문을 잠그고 버티니까 ‘빠루’(못을 박고 빼는 데 쓰는 커다란 연장)와 골프채로 유리창을 깨고 문을 부수고 들어왔어요.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있던 긴 호스를 끌고 와 우리에게 물을 쏘아댔고 어떤 사람은 소화기를 뿌렸어요. 그걸 막으려는 한 여성 노조원의 머리채를 그 장애인 아저씨들이 잡아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그분은 다쳐서 수술까지 했어요. 또 하루는 새벽에 딱 봐도 깡패 같은, 군화를 신고 얼굴에는 위장크림을 바른 비장애인 남자들이 농성장을 침탈했어요. 그들은 빠르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더니 로비에 사람들의 무릎을 꿇렸어요. 여자들이 우니까 한 공간에 몰아넣고 남자들만 남겨놓은 뒤 쇠파이프로 구타를 했어요. 그 사람들이 빠지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OOO단체 소속 장애인들이 들어왔어요. 그 장애인들은 노조에 이용당하는 장애인을 구출하겠다면서 쇠파이프로 노조원을 때리고 물건을 창밖으로 내던졌어요. 이 싸움은 이전에 내가 해본 싸움과 급이 달랐어요. 복지관 측에서 보낸 장애인들은 막 웃통을 벗으면서 지저분하게 싸워요. 우리는 장애인이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같은 걸 위해 싸우는데 그 사람들은 그저 관장이 시키는 대로 싸우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야 그날 쳐들어왔던 비장애인들이 정말로 용역 깡패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전날 복지관 측에서 깡패들을 고용해 술 사주고 모텔에서 재워준 뒤 우리가 있던 정립회관 2층 사무실까지 친절하게 길 안내도 했더라고요. 이 모든 걸 지휘한 게 관장이었어요. 너무나 화가 나서 사측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던 체육관 건물로 쫓아갔어요. 안에서 문을 잠가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쳤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무로 된 저 문을 부수면 잡혀갈까? 머리를 다치지는 않을까? 부서진 나무가 눈을 찌르거나 목에 꽂히면 어떡하지?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딱 그랬죠. 깡패를 동원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증장애인을 짓밟는 복지관이라니,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나는 뒤로 후진했다가 전속력으로 돌진해 문을 들이받았어요. 문이 뚫려서 반파되었고 그 안엔 관장과 그 앞잡이들이 서 있었어요. 내 얼굴에서 피가 흘렀는데 너무 화가 나서 닦을 정신도 없었어요. 그놈들을 향해 돌진하려고 했는데 동지들이 막아서 더 나아가지 못했죠.
결국 농성 8개월여 만에 광진구청의 중재로 관장이 물러났어요.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어요. 물러났던 관장은 얼마 안 가서 한국소아마비협회 이사장으로 돌아왔어요. 복지관 관장은 정부가 월급을 주는 자리라 쫓아낼 수 있지만 한국소아마비협회는 민간법인이라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구조였어요. 그가 이사장으로 돌아오는 날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너희는 당사자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로 망가진 전동휠체어 구해 와 화형식을 했어요. 진짜 징글징글하게 싸웠는데 그 결과는 허탈했어요. 시설 비리 문제라는 게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인지 그때 알았어요.
- 기어서 노들섬까지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의 결실은 엉뚱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농성이 길어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비장애인과 중증장애인들의 합숙도 길어졌어요. 장애인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밥 먹을 때 손이 모자라면 중증장애인이 더 중증의 장애인에게 음식을 먹여주기도 했어요. 우리끼리 “장애 극복했네” 하면서 키득키득 웃었어요. 농성단에 비장애인 남성이 딱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남병준이었어요. 두 사람이 열 명도 넘는 남성 장애인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내리고 씻기고 화장실 가는 일을 지원하느라 허리가 많이 상했죠. 남병준이 없었다면 그 싸움을 그렇게 오래 하지 못했을 거예요. 남병준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내내 농성장에서 우리와 동고동락했어요.
농성을 마무리할 즈음 경남 함안에서 혼자 살던 근육장애인이 보일러가 터진 집에서 얼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때 남병준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그러면서 일본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구해 와 직접 번역을 했어요. 장애인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그걸 함께 읽었어요. 일본의 장애인들이 국회 계단을 기어서 올라가는 투쟁을 했고 그 결과 활동지원서비스 법률이 통과됐다는 걸 보면서 “와! 우리도 이런 거 하면 어떨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공동투쟁단’이 결성됐어요.
2006년 3월 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우리한텐 돈 없다던 서울시가 한강의 노들섬에 7천억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발표했어요. 너무 분노한 나머지 39명의 중증장애인이 삭발을 했는데, 그래도 반응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장렬히 싸우다 죽자고 기획했던 게 한강대교를 기어서 노들섬까지 가는 투쟁이었어요. 당일 한강대교로 진입하는 도로를 기습적으로 점거했어요. 자동차들이 멈춰서자 우리는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왔고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어요. 5분이면 다 끌려갈 거라고 예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10분도 안 돼서 경찰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죠.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경찰이 우릴 잡아가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어요. 왜 안 잡아가지? 언제 잡아가지?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는데도 연행을 안 해요. 중증장애인이 기어간다는 게 아주 힘든 일이에요. 열다섯 살까지 집에서 기면서 살았지만 그 후엔 기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20여 년 만에 처음 기니까 정말 힘들어 죽겠더라고요. 4월의 오후는 꽤 뜨거워서 아스팔트가 녹아서 끈적거렸어요. 손과 무릎, 온몸에 아스팔트가 묻었어요. 보호대를 찼는데도 무릎과 손이 다 까져서 계속 피가 났죠. 경찰들을 보며 속으로 ‘다른 날은 잘도 잡아가더니 오늘 같은 날 왜 이래? 힘들어 죽겠어, 이제 그만 잡아가~’ 하는데도 끝내 안 잡아가서 우리는 정말로 노들섬에 도착해버렸어요. 2시부터 기기 시작해서 도착하니 6시 반이었어요. 한강대교 절반을 가는데 한나절이 걸렸어요.
그날 경찰이 우릴 왜 안 잡아갔는지 나중에 알았어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정부가 영국의 유명한 장애여성 구족화가인 앨리슨 래퍼를 초청했는데 그분 숙소가 우리 농성장이 내려다보이는 플라자호텔이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앞에서는 해외의 장애인을 데려와 희망을 설파하면서 뒤에선 자기네 나라 장애인 잡아가면 쪽팔리잖아요. 앨리슨 래퍼 덕분에 우린 하루 종일 기어가느라 아주 힘들었고 나는 일주일 동안 앓았어요. 그리고 며칠 뒤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어요. 서울시가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겠다고 발표한 거예요. 43일 농성한 것치고는 아주 큰 성과였죠.
그렇게 싸우면 활동지원서비스가 정말 제도화될까 기대하진 않았거든요. 솔직히 지금과 같은 시대가 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잘하면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을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보다는 사는 게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듬해 2007년 활동지원서비스는 전국적으로 시행됐고 첫해에 나는 한 달에 380시간 서비스를 받았어요. 매일 열두 시간 동안 내 옆에 활동지원사가 있게 됐단 뜻이에요. 어마어마한 변화였죠. 자립생활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전엔 억지로 살았던 거예요. 아침엔 아버지가 와서 화장실 가는 거 도와주고 밤엔 아차산역 역무원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밥도 제때 못 먹어서 항상 배를 곯다가 집에 가기 전에 허겁지겁 먹고 들어가던 삶을 살았는데 이젠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되었죠. 이젠 정말로 혼자서도 잘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발바닥행동이라는 전환점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으로 3년 정도 활동했을 때 고비가 찾아왔어요. 이동권연대는 허구한 날 농성을 했어요. 낮에는 경찰과 싸우고 밤에는 농성장을 지키느라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생활이었죠. 집이라고 해봤자 판잣집이고 집에 가봤자 활동지원해 줄 사람도 없으니 차라리 농성장에서 자는 게 더 편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료들이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건 기분이 나빴어요. 자기들은 따뜻하고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외부 회의도 나가고 강의도 하는데 나만 만날 비바람 몰아치는 농성장이었죠. ‘규식이는 싸우는 놈이니까 싸울 거리만 주면 된다,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활동가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던 건 아닐 거예요. 끊임없는 농성에 모두들 지치고 피곤하고 서로에게 불만이 쌓였겠죠. 회의를 하면 논의를 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들이 화가 나 있었어요. 내 말은 안 듣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죠. 나도 활동가이고 싶었어요. 사람들과 재밌게 놀고 어울리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한테는 잘 다가오지도 않고 말도 건네지 않았어요. 어느 날 교류하던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나를 보면서 장난처럼 “저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옆에 가지 마” 하는데 그게 꼭 저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니까 옆에 가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다 그만두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더라고요. 나는 싸우기만 하는 사람인가. 3년 동안 죽어라 싸웠더니 돌아온 게 이런 건가, 짜증이 났어요.
그즈음 우리 사무실에 못 보던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박옥순이었어요. 옥순은 40대 여성이었는데 같이 담배 피우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거긴 뭐 하는 단체냐고 물었더니 탈시설운동을 하려고 만들었대요. 나도 시설 생활을 10년이나 해봤으니 누구보다 그 운동의 필요성을 잘 알았죠. 그런 운동을 하는 단체도 있구나, 반갑고 고마웠어요. 옥순은 내 말을 잘 들어줬어요. 이동권연대 활동이 너무 빡세서 힘들다고 하니까 왜 힘든지 다정하게 물어봐 주고 공감해줬어요. 내 동지들은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옥순은 나를 지지해주고 술도 사줘서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대구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에 연대하러 한 달 동안 대구에 원정 투쟁을 갔을 때 매일 밤 피시방에 가서 옥순한테 메일을 썼어요. 옥순한테 잘 보여서 같이 활동하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용기를 내 발바닥행동에서 활동하면 안 되냐고 물었어요. 옥순이 탈시설운동을 하는 데에 당사자인 규식이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면서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되려면 단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활동가들이 나를 알아야 한다면서 일대일로 만나야 한대요. 한 명씩 따로 만났어요. 온통 다 여자들이었어요. 그런데…… 다 예뻤어요. 진짜 예뻤어요. 그러니까 얼굴이 예뻤다는 게 아니라…… 다들 너무 친절하고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웃음). 이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꿈에 부풀어 있던 그 시간 발바닥행동은 발칵 뒤집어졌대요(웃음). 거긴 모두 비장애 여성이었는데 나는 활동지원이 필요한 남성 장애인이니까 아무래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겠죠. 하지만 옥순이 열심히 설득해줘서 나는 마침내 발바닥행동에 들어가게 됐어요.
이곳의 분위기는 이동권연대와 완전 딴판이었어요. 서로를 도와주고 지지해줘요. 비장애 여성 다섯 명에 나만 장애인인데 마치 조직의 중심이 나인 것처럼 내가 한마디를 하면 다 귀를 기울였어요. 때론 지적도 받았어요. 내 말투가 강압적이고 지시적이라고 했어요. 이동권연대에서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말이나 행동이 여기선 하나하나 문제가 되었어요. 지적을 받는 순간엔 기분이 상했지만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됐어요. 걔네들 덕분에 많이 컸어요. 이동권연대에서는 주로 투쟁하는 역할만 했는데 발바닥행동에서는 외부 회의도 보냈어요. 투쟁현장에서 마주치며 지냈어도 곁에 다가오진 않았던 인권활동가들이 발바닥행동 활동가로 회의하러 왔다고 하니까 아는 척을 했어요. 그럼 나도 그 사람에게 어떤 활동을 하는지 물었죠. 청소년, 난민, 양심적 병역거부, 홈리스, 성소수자 등 다양한 인권단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들과 웃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면 안 되는구나, 여자한테 함부로 대시하면 안 되는구나, 그럼 혼나는구나, 친하다고 야, 야, 하면 안 되는구나, 어깨나 손 만지면 안 되는구나, 그런 것도 배웠죠(웃음). 이동권연대에서 싸우는 걸 배웠다면 발바닥행동에선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웠어요.
발바닥행동은 장애인거주시설의 인권침해와 비리에 맞서는 싸움을 계속했어요. 실은 이동권연대에서 농성하는 게 너무 빡세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는데, 발바닥행동에 들어가서 처음 했던 일도 농성이었어요. 2006년 S 재단의 비리를 해결하라고 종로구청 앞에서 143일 동안 농성을 했어요. S 재단은 병원과 요양시설을 13개나 운영하는 대형법인이었는데 보조금 횡령, 거주인 학대, 강제 노역, 폭력과 사망 사건, 족벌 세습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죠. 이번엔 구청 공무원들과 싸워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빡셀 줄 몰랐어요. 구청 측에서 천막 하나도 못 치게 해서 한여름의 뙤약볕과 장맛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죠. 그마저도 꼴 보기가 싫었는지 어느 날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 공무원 200여 명이 쳐들어와서 농성장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어요.
경찰들은 최소한의 안전 수칙이라도 지키는데 공무원들은 그런 것도 없더라고요. 저항하는 장애인들을 내동댕이치고 우리의 귀중한 농성 물품을 발로 차고 던져버렸어요. 그걸 말리는 과정에서 내가 휠체어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누군가 내 목을 짓밟고 지나갔어요. 비리를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자기들이 못한 걸 우리가 다 파악해서 알려주는데 진짜 적반하장이었죠. 공무원들은 자기들이 먼저 우리 농성장 때려 부수고는 그거 말리다 싸움이 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더라고요. 나도 목을 다쳤는데 기물 파손했다면서 3천만 원을 청구했어요. 너무 얄밉고 억울하죠.
시설 비리 척결을 외치는 싸움은 계속되었어요. 2008년에는 석암재단이라는 대형 법인에서 또 비리가 터졌어요. 1년 내내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서울시청, 양천구청 앞에서 농성하고 집회를 했죠. 그 싸움으로 성장하고 결집한 석암재단 시설 거주인들이 2009년엔 아예 짐을 싸서 시설을 뛰쳐나와 농성을 하면서 본격적인 탈시설운동이 펼쳐졌어요. 발바닥행동에서도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여기서 나는 소모품처럼 쓰이지 않고 존중받으며 활동한다고 느꼈어요. 해외의 중증장애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발달장애인들의 탈시설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등을 배우러 일본·영국·미국으로 연수도 갔고 간 김에 그랜드 캐니언,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도 관광했어요. 발바닥행동에 들어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세상을 배우는 게 좋았어요. 새롭게 보고 들은 것들에 자신감을 얻어 더욱 뜨겁게 싸울 수 있었어요.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발바닥행동에 들어간 거라고 말할 거예요. 이동권연대가 나의 기반을 닦아줬다면 발바닥행동은 나를 위로 확 끌어 올려줬어요.
*이 글은 비마이너가 기획한 책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글 홍은전,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