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서울시 탈시설 전수조사’서 시설 재입소 유도 정황 포착
서울시, 탈시설 찬반 전문위원에 조사표 초안 발송 조사표 들여다보니 유엔협약 전면 위반 개인정보 수집해 대부분 공공기관에 제공 “시설 환경 개선되면 재입소 의향 있느냐” 묻기도
서울시가 추진 중인 ‘거주시설 퇴소장애인 자립실태 조사(아래 탈시설 전수조사)’에서 탈시설 장애인에게 장애인거주시설 재입소를 유도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서울시는 탈시설 반대 측 2명과 찬성 측 2명의 전문위원을 선정해 실무협의체를 구성하고 탈시설 전수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조사표 초안을 양측 위원들에게 보내면서 ‘25일까지 서면으로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조사표 초안을 들여다보니, ‘탈시설 장애인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라는 서울시 주장이 무색할 만큼 특정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이 있었다. 1인실 사용 등 시설이 환경이 개선되면 재입소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고, 재입소를 원할 경우 무슨 이유 때문인지를 물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은 물론 서울시가 지난해 제정한 탈시설조례마저 무용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아래 탈시설연대)는 26일 오전 8시, 서울시 중구 1호선 시청역(종각역 방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협약 및 탈시설가이드라인 위반 항목을 삭제하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묻는 내용으로 보완하라”고 요구했다.
- 개인정보 수집해 5년간 보관, 대부분 공공기관에 제공
탈시설 전수조사 항목은 응답자와 조사자의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록한 후 개인정보 수집 동의부터 시작한다. 조사표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가족관계, 소득·재산·근로능력·취업상태에 관한 정보, 건강정보, 재정상황, 사회보장급여 수혜 이력에 관한 정보 등 사실상 한 사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광범위한 수집도 문제지만 정보 보유 기간이 길고, 수집한 정보를 대부분의 공공기관에 제공한다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보유 기간은 5년으로 명시돼 있는데, 여러 연구에서 통상 6개월에서 3년까지 보유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긴 편이다.
또한 수집한 정보는 보건복지부, 서울시장, 서울시 내 각 자치구청장은 물론 사회보장급여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공공기관, 자립실태조사 수행업체에도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서울시는 ‘행정정보 공동이용에 관한 동의’도 요구하고 있는데, 탈시설 장애인이 이에 동의하면 다수의 행정기관이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 탈시설 장애인의 개인정보를 5년간 언제든 열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탈시설가이드라인을 정면으로 위반한 처사다. 탈시설가이드라인 128항에는 “데이터를 수집할 때 당사국은 개인정보의 사생활 권리를 완전히 존중하면서 데이터 보호법과 같은 기존의 법적 보호장치를 적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에선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 이른바 ‘데이터 3법’으로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있다.
전장연·탈시설연대는 서울시가 데이터 3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우선 개인정보의 분명한 수집 목적을 밝히고, 근거 법령을 합리적으로 제시해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만 수집해야 하는데 조사표 초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또한 개인에 관한 사실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탈시설 장애인 조사’라는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진 않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조사표 초안에 이같은 내용에 대한 설명은 없고 무조건 탈시설 장애인의 동의를 요구하기만 한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는 “서울시는 탈시설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사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조사표를 보면 목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탈시설 장애인의 온갖 정보를 가지고 행정이 마음대로 (탈시설 정책을) 주무르기 위한 것은 아닌가?”라며 “이같은 개인정보 수집은 탈시설 정책의 발전을 위해 선의로 조사에 참여하는 탈시설 장애인에게 사기 치는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 “시설 재입소를 원하는 이유요? 일절 없습니다.”
시설에 40여 년을 갇혀 있다 탈시설한 이수미 탈시설연대 회원은 서울시의 조사표 초안을 보고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 씨는 “시설에 들어갈 때 ‘여기서 죽어야만 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다시는 시설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시설에 재입소할 건지 의향을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답하겠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을 향해) 여기 있는 비장애인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 중에는 감옥 같은 그곳(시설)에 들어가 살고 싶은 사람 있나?”라고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 씨는 조사표 중 10번 항목, “시설에 재입소를 원할 경우 이유는 무엇인가요? (중복선택 가능)”의 오지선다를 일일이 나열하며 서울시에 답변하기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울시에 하나씩 답하겠습니다. 1번, ‘지역에 살아보니 시설보다 더 불편해서’. 지역사회가 시설보다 훨씬 좋습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고 싶은 데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설에 갇혀 사는 삶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2번,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아서’. 혼자 살고 싶습니다. 시설 안에서는 그런 자유 없습니다. 싫어도, 성격이 맞지 않아도 같은 방 안에서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3번, ‘나를 돌봐줄 가족이나 도와줄 사람이 없거나 부족해서’.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면 서울시와 국가가 지원체계를 마련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체계는 마련하지 않으면서 탈시설 장애인에게 왜 이런 걸 묻는 겁니까? 4번, ‘나에게 맞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설에 ‘나에게 맞는 서비스’는 없습니다. 나는 현재 지역사회에서 활동지원서비스 등 여러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예산이 부족하다며 활동지원시간을 조금밖에 주지 않습니다. 활동지원시간을 더 주시죠!
5번,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힘들어서.’ 장애인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비장애인도 혼자 사는데 장애인은 왜 혼자 못 삽니까? 장애인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혼자 잘 살 수 있습니다. 탈시설 장애인에게 이 조사표는 차별입니다. 서울시는 이런 차별을 당장 멈추세요!” (이수미 탈시설연대 회원)
- 다른 조항도 심각… “시설 유지 정책 위한 조사인가?”
문제적 조항은 10번뿐만이 아니다. 9번에서는 “향후 시설 환경이 개선(1인실 사용, 특화서비스 제공 등)된다면 다시 이용할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시설을 ‘좋은’ 곳으로 만들면 재입소할 의향이 있는지 유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좋은’ 시설도 시설일 뿐이다. 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에서는 시설에 대한 투자, 예산 편성 등을 금지하며 현대화된 시설도 시설일 뿐이라고 명확히 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이를 위반 중이다.
건강 관련 항목에서는 “거주시설 퇴소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수술 또는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단순히 탈시설 장애인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항목이라기에는 이 항목 앞뒤로 별도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항목이 잘못 활용되면 탈시설이 건강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될 수도 있다.
김정하 활동가는 “조사표 초안을 보면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서울시가 탈시설 장애인에게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시설에서 등 떠밀려 억지로 나온 거죠? 지역사회에서 혼자 살아가기 힘들죠? 시설 개선해 줄 테니까 다시 시설로 돌아갈래요?’ 이건 서울시가 시설을 유지하는 정책을 만들기 위한 조사라고 사료된다”고 성토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또한 “조사표 초안 내용을 보니 기가 막힌다. 지난해 서울시가 스스로 제정한 탈시설조례까지 역행하는 내용이다. 비장애인은 시설에 가라고 안 하면서 왜 장애인에게만 자꾸 가라고 하나? 탈시설 정책을 선도적으로 하던 서울시가 지금은 왜 앞장서서 다른 지역은 하지도 않는 짓을 하나?”라고 비판했다.
- 탈시설 반대 측 요구대로만 하는 서울시
이번 조사는 서울시가 지난 2월, 탈시설 장애인 1천 명을 전수조사하고 향유의집에서 탈시설한 장애인 50여 명을 단독으로 조사한 것에 전장연이 반발하며 착수됐다. 전장연이 ‘탈시설과 전장연을 죽이기 위한 표적조사’라고 비판하자 서울시는 ‘탈시설한 장애인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에 전장연은 탈시설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조사를 하라고 요구하며 조사설계를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실무협의체가 꾸려졌다. 실무협의체의 전문위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잡음이 컸다. 탈시설 찬성 측에서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김정하 활동가를 추천했지만 탈시설 반대 측이 거절해 박 대표와 김 활동가는 실무협의체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현재 전문위원은 찬성 측에선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 전근배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이 추천됐다. 반대 측은 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 장애인탈시설 범사회복지대책위원회 측 인사가 참여 중이다. 찬성 측은 조사표 초안에 관해 서울시에 서면으로 의견을 보냈지만 반대 측에선 별도의 의견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경석 대표는 “서울시는 이번 조사가 탈시설 찬반 논쟁과 관련된 조사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위원 추천조차 탈시설 반대 측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원활한 조사를 위해 조정요구에 응하며 협의해 나가고 있었다”며 “조사표 초안을 보니 참담하다. 서울시에게 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은 쓰레기일 뿐인가? 1인실 방 하나 주면 시설에 가겠냐니, 이런 야비한 질문을 하나? 장애인을 시설에 격리하고 이 사회에서 배제하는 게 조사의 목적인가?”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전장연은 서울시에 △탈시설 장애인을 표적수사하기 위한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 항목 삭제 △협약 및 탈시설가이드라인 위반 항목 삭제 △탈시설 장애인이 지역사회 통합적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묻는 항목 보완 △서울시 장애인거주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의 탈시설 지원을 위한 권리지원조사 실시 등을 요구하고 5월 초까지 답변을 기다리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