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장일기] 세계에서 유일할 ‘장애인 노동절’의 아침
2023년 5월 1일 335일 차 혜화역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월요일에는 선전전을 담당하는 단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조금 한산하다. 7시 55분,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정다운 전장연 활동가,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조희은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아래 전장야협) 활동가가 승강장에서 무언가를 기다린다. 이내 곧 한명희 전장연 활동가가 앰프와 피켓 등이 담긴 짐수레를 끌고 나타난다.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 ‘무엇’이다. 이제야 사람들이 분주해진다. 앰프를 켜고, 삼각대를 설치해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준비한다.
8시 2분, 선전전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곡 ‘열차 타는 사람들’이 흘러나온다. 오늘은 133주년 노동절이니 특별히 노동절 관련 피켓들만 뽑아 든다. 노래가 나오는 사이, 선전전에 참석하는 사람이 네 명이나 더 늘었다. 오늘의 사회자는 이규식이다. 이규식이 첫 번째 발언자로 김성연을 지목한다.
8시 10분, 김성연이 말한다. 그는 오늘 여의도 농성장 지킴이어서 발언을 마치고 바로 지하철 타고 여의도에 가야 한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에서 활동하는 그는 활동하면서 만난 다양한 장애인 노동 착취 사례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애인의 노동은 착취와 학대로 연결됩니다. 제가 활동하는 곳에서는 매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관련한 다양한 현장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요, 모니터링하지 못하는 유일한 공간이 노동 현장입니다. 제대로 된 인권침해 확인이 어렵습니다. 장애인을 위한다는 이유로 다양한 고용 형태의 작업장이 있고, 장애인을 고용한 사업주는 장애인을 이용해 여러 정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사업장은 공공기관 우선구매대상자로 선정되거나, 표준사업장으로 지정받아 여러 지원을 받지만 그곳에서 장애인들은 제대로 된 노동자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장애인은 숙련공이 되어도 비장애인과 달리 최저임금만 겨우 보장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노조를 구성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도 없기에 노동절에도 절대 쉬지 못하고 휴일에도 대부분 출근을 합니다. 이건 그나마 최저임금이 보장되는 사업장 이야기고요, 많은 사업장이 대부분 ‘최저임금 예외 조항’을 적극 활용해서 장애인에게 최저임금도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이걸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노동절입니다. 노동절에 노동절을 보장받지 못하고, 노동절에도 노동절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 대한 고민을 우리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띄어쓰기도 없이 말하던 김성연이 “제가 오늘 농성장 지킴이기 때문에 이상 발언을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로 10분간 이어지던 발언을 마친다. 그의 마이크는 정다운에게 넘어가고, 그는 정다운이 발언하는 사이 가방을 메고 지하철에 오른다.
정다운은 오늘 발의가 예정되어 있는 ‘중증장애인공공일자리지원특별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일자리는 이제까지 각 지자체에서 시행하던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관한 정부 책임을 명시한 법안이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가장 노동능력이 없다고 평가받는 최중증장애인이 국가와 지자체에 우선 고용되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홍보하고 장애인 권리를 모니터링하는 활동이다. 이제까지 중증장애인 고용은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직업재활시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으며, 이마저도 부족해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은 사실상 방치되어 왔다.
8시 20분, 정다운이 말한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하루 8시간이 아닌 4시간 일하는 일자리예요. 지금 우리 사회의 기준인 하루 8시간 노동은 중증장애인 입장에선 일할 수 없는 노동 강도입니다. 그래서 노동 시간도 낮추고 노동 내용도 중증장애인에게 맞췄는데요, 노동의 기준을 노동자에게 맞추라는 것이 굉장히 혁명적인 요구 같습니다.”
정다운의 발언이 끝나자 사회자 이규식이 그의 바로 곁에 서 있던 이재민 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 활동가를 호명한다. 이를 보던 한명희가 “아, 서 있는 순서대로 발언하는 거구나…” 읊조린다.
마이크를 쥔 이재민이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표정으로 “그나마 앞에 발언하니 할 말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하면서 잠시 할 말을 찾는다. 그 사이 이규식의 기습 질문이 들어온다.
“전태일 열사가 왜 돌아가셨나요?”
이재민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표정이다. “아… 발언 주제가 있구나….”
그는 갑자기 동대문역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사이에 있는 전태일 열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과 당시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에 대해 말한다. 과거를 방랑하던 그의 이야기는 어느덧 높은 밀집도로 압사 사고 우려가 나오는 김포골드라인(김포도시철도)에 도착한다.
“김포골드라인에 대해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5호선을 연장해야 한다고 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 대표의 말에 대해 ‘고려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노동하기 위해선 이동이 전제되어야 하는데요, 비장애인의 이동을 위해선 여야가 이렇게 빠르게 합의하는데, 우리가 22년 동안 외쳤던 이동권에 대해선 왜 이렇게 계속 유예되고 있는지 참 답답합니다.”
8시 26분, 이규식이 말한다. “그다음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염창동에 사는 시민 박지원이 나온다. 그는 지난 4월 27~29일까지 2박 3일간 이어진 제21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로 참여했다. 그는 영화제에서 특히 좋았던 순간에 대해 말한다.
“어떤 공연이 끝나고 피플퍼스트 활동가분들과 자원활동가분들이 다 함께 춤췄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휠체어 탄 분들도 같이 기차를 만들어서 돌았어요. 무대의 경계가 없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모여서 춤을 추던 순간, 진짜 ‘열차가 어둠을 헤치고’ 이렇게 다 같이 열차에 탑승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혼자 눈물을 훔쳤습니다. 영화제 기간에 부스들 보면서 장애인이 최저임금을 못 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고 너무 놀랐는데요, 이렇게 현장에 나와야만 알게 되는 정보가 있는 것 같아요.”
이어 시민 장세현이 나온다. 그도 박지원과 같이 영화제에서 자원활동가로 함께 했다. 둘은 영화제에서 ‘다음 주 월요일 8시에 선전전에 참석하자’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 오늘 승강장에서 만나게 됐다. 이규식이 장세현에게 “언제 또 나올 거예요?” 묻는다. 그 뒤에서 박지원이 “수요일…?”이라고 물음표를 달고 답하자, 이규식이 “매주 수요일?”하면서 개구지게 웃는다. 매주 수요일마다 승강장에서 보자는 신호다.
8시 37분, 이영욱 차례다. 전장야협에서 영상활동가로 활동하는 그는 이날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마이크를 드는 것은 처음이었던 그는 전장야협에서 만든 장애인평생교육 온라인 플랫폼 ‘이탈’에 관해 홍보한다.
이규식이 이영욱에게 “다음에 또 (발언) 부탁해요. 그다음 타자”하면서 조희은을 바라본다. 아무런 저항 없이 조희은이 나온다. 조희은은 ‘장애인평생교육권리와 노동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관해 이야기하며 장애인평생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장애인평생교육법안을 4월 안에 제정하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이규식이 옆에 있는 서울교통공사 직원에게 “지하철 한 칸에 몇 명 정도 타나요?” 묻는다. 공사 직원이 “150명~200명 정도 탄다”고 답하자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보통 지하철이 8칸 정도 되니, 최대 1600명 정도 타는 것이다. 이규식이 “그분들은 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하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말의 여운을 맛볼 틈도 없이 이규식이 “금문 나오세요” 하며 ‘다음 타자’를 호명한다. 금문은 사실 방금 전에 승강장에 도착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하자, 금문은 출근길에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을 읽었다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한명희는 2020년 6월, 경향신문에 게재된 고병권 칼럼 〈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을 낭독한다. 서울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첫 시행을 앞두고서 이 일자리의 의미에 관해 쓴 글이었다.
8시 57분,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제2회 장애인 노동절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절 때 장애인노동절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집회를 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전장연이 유일할 겁니다. 오늘 민주노총에서 많이 참여할 텐데 그분들께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을 넘어 최중증장애인의 노동 가능성에 대해 많이 알립시다. 우리가 백 년을 싸울 수만 있다면 세상은 더 많이 변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발의하는 법으로 더 풍부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가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직해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투쟁합시다.”
선전전을 마치고, 사람들이 혜화역 승강장 벽면에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권리 스티커’를 붙인다. 이를 혜화역장이 팔짱 끼고 바라본다. 곧 떼어낼 것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부러 한 번에 떼어낼 수 있게 ‘살짝’ 붙인다. 벽면 가득 권리스티커가 채워지고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공사 직원들이 재빠르게 스티커를 떼어낸다. 불과 3분도 안 되어 벽면은 다시 허옇게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