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낸 중증장애인 이규식 “내가 왜 투쟁하는지 썼다”

이규식, 중증장애인 최초로 자서전 출간 활동지원사·활동가들과 함께 쓴 책 시설-집, 시설-집 반복하며 살았던 삶 리프트 추락사고 겪고 투쟁 인생 시작 “시설은 세상이 만든 감옥, 당신도 나오세요.”

2023-05-22     하민지 기자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오른쪽)가 환하게 웃으며 발언 중이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는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며 환히 웃고 있다. 사진 하민지

“‘왜 내가 투쟁하는가’ 궁금하시면 책을 사세 보세요! 그러면 됩니다!”

지난달 27일, 서울시 종로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열린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후마니타스)의 출간 기념 북콘서트 현장. 정장 재킷을 차려입은 저자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는 북콘서트 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투쟁밖에 모르는 사람(투모사)”이라 칭하는 이규식은 평상시 인상이 진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와 함께 20년 넘게 투쟁 중인 동지들은 그와의 첫 만남을 ‘진한 인상’으로 기억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이규식의) 얼굴을 한번 보면 누구나 기억을 하게 돼 있어요. 경찰이라면 더 그럴 거예요. 경찰한텐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도 “(이규식은) 항상 인상을 쓰고 있잖아요. 경찰들 노려보고… 처음 만났을 땐 말을 못 걸겠더라고요. 가끔은 회의할 때도 경찰 보는 눈빛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화가 났나 싶고…”라고 기억했다.

이규식은 경찰에겐 차갑지만 ‘내 동지’에겐 따뜻한 사람이었다. 박경석은 “이규식은 지하철 승강장에 나와 함께 끝까지 남아있을 사람 중 한 명이에요”라고 했다. 김정하는 미래의 어느 날에 열릴 이규식 장례식의 장례위원장이 되고 싶다고 했다. 북콘서트에 이야기손님으로 온 두 사람 모두 그를 향해 커다란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의 자서전 출간 기념 북콘서트 현장. 객석이 꽉 찼다. 사진 하민지

이규식은 어떻게 “투쟁밖에 모르는 사람”이 됐을까. 진한 인상에, 경찰 방패로 돌진하는 일명 ‘장갑휠체어’까지. 현장에서 꿋꿋이 종횡무진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겉보기엔 무서운 그는 동지들과 어떤 시간을 겪으며 애정과 신뢰를 쌓았을까.

이규식의 말대로 그의 자서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규식은 자신의 활동지원사, 인권운동활동가 등 총 세 명의 집필자와 함께 이 책을 썼다. 이날 북콘서트에서는 집필 후기, 책에 담지 못한 일화 등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졌다. 주최 측이 마련한 50석은 꽉 찼고 뒤이어 도착한 수십 명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도서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의 실물 사진. 사진 하민지

- 일단 직진하는 인생… “장애인이 자립하기 좋은 때는 바로 지금”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나뉜다. 이야기가 나눠지는 분기점에는 노들장애인야학(아래 노들야학)이 있다. 노들야학을 만나기 전, 이규식은 장애인거주시설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여러 재활원과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 정체불명의 ‘기(氣) 치료 센터’에 갇혀 시설거주장애인으로 살다가, 답답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재가장애인으로 살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스물아홉 살까지 지냈다. 스물아홉 살에 노들야학을 만난 후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이규식의 ‘투모사’ 인생이 시작된다. 이 부분은 책 전체 분량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이규식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짜고짜’가 아닐까. 일단 직진하고 나중에 수습하는 인생이었다. 열 살 어린이였던 이규식은 재가장애인으로 사는 게 지겨워 스스로 시설에 갇히는 삶을 택했는데, 그 결정은 다소 충동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나 여기(시설)에 버리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집에 가봤자 어차피 똑같은 일상이라 새로운 곳에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면서도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다. 이제 어떡하나 고민했다”(25쪽)고 술회했다.

20대 청년 시절, 시설 생활이 지겨워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가 돈을 댈 테니 3박 4일 동안 같이 여행하자”(61쪽)고 제안했다. 전동스쿠터를 처음 타 본 날에는 배터리가 닳는 줄도 모르고 타다가 길 한복판에서 배터리가 떨어져, 몇 시간을 길바닥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첫 자립생활은 판잣집에서 했다. 2001년 서른두 살, 활동지원제도도 지원주택도 없던 시절이었다. 생활을 지원할 사람이 필요했던 그는 당시 대학생이던 노들야학 교사 두 명을 꼬셔 판잣집에서 같이 살았다. 모기, 귀뚜라미, 뱀과도 같이 살아야 했지만 일단 자립했다고 한다.

그의 ‘다짜고짜’ 인생은 활동가가 된 후 더욱 심화한다. 문을 걸어 잠그면 휠체어로 전속력 돌진해 때려 박아 부숴버렸다. 동지를 연행하면 경찰버스 밑에 기어들어가 연행을 저지했고, 드러누운 채로 줄담배를 피우며 경찰이 연행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불 속으로 휠체어를 꼬라박아 화상을 입거나 몸에 시너를 들이붓기도 하고, 체포를 거부하며 차도로 맥진한 적도 있다.

이규식이 이렇게 거칠고도 다채롭게 산 건 성격 덕도 있겠지만 전무했던 장애인권리를 만들며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나는 무모하다. 간이 완전 배 밖으로 나왔다”(63쪽)고 표현하기도 했으나 그가 힘차게 투쟁한 덕분에 세상은 변했다. 이젠 수도권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90%가 넘고, 활동지원제도와 지원주택도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동료장애인과 그의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 지금 누군가가 다시 나에게 시설로 돌아갈 거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대답은 ‘아니오’다. 가끔 비탈길에 휠체어가 넘어질 뻔도 하고, 신호를 잘못 봐서 사고도 날 뻔하고, 돈이 없어 굶을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게 나의 선택이고 나의 자유다. 주는 것만 먹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과를 아무 의미 없이 하기보단 다소 위험하더라도 자유가 있는 지금이 훨씬 좋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직은 지역사회가 장애인이 살기에는 어려운 환경이라고, 조금 더 탄탄한 복지 체계가 만들어지면 그때 자립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럼 자립하기 좋은 때는 언제일까? 내년? 10년 뒤? 아니면 내가 죽고 나서? 나는 장애인이 자립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복지 체계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면 죽어도 자립 못 한다. 지금은 활동지원사도 있고, 자립주택도 있고, 자립을 뒷받침하는 여러 제도도 존재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립을 도전할 만하지 않을까?” (69쪽)

제일 오른쪽부터 활동지원사 김형진 씨, 이규식 대표,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가 무대 위에 있다. 제일 왼쪽에 있는 두 사람은 수어통역사와 문자통역을 자원한 장애인운동단체 활동가다. 사진 하민지

- 함께 쓴 ‘중증장애인 최초 생애사’

이규식은 자신의 10년 차 활동지원사인 김형진 씨,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장애인지원주택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김소영 씨와 함께 이 책을 썼다. 중증뇌병변장애가 있는 이규식은 혼자서 키보드 타자를 치기 힘들다. 자서전 집필을 지원할 동료가 필요했다. 김형진, 배경내, 김소영 세 사람이 언어장애가 있는 이규식의 말을 곰곰이 듣고 글로 옮겼다. 당일 북콘서트에 김소영은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김형진 씨가 북콘서트에서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김형진은 이규식이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출간 제안을 “덜컥 수락했어요”라고 말했다. 장애인 당사자인 이규식이 출간을 원하니, 처음엔 활동지원사로서 집필을 지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될수록 생각이 많아졌다고 한다. 집필이 활동지원사가 해야 하는 일인지 고민했지만 이규식의 말을 단순히 받아 적는 것 또한 활동지원사의 역할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람이지 단순히 장애인의 손발이 되는 사람이 아니에요. 장애인 당사자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함께하는 사람이 활동지원사예요. 집필 활동이 활동지원사의 단순 업무에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규식이 형의 욕구를 파악하고 자립생활을 지원한다면 제가 끝까지 (집필을 함께)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김형진)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가 북콘서트에서 발언 중이다. 배 활동가는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봤다. 사진 하민지

배경내는 처음엔 “집필 활동지원사” 정도로 생각하고 합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필은 쉽지 않았다. 이규식이 투쟁하느라 너무 바빴고, 투쟁하고 온 날에는 피곤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말하고, 듣고, 글로 옮기는 과정을 넷이서 함께하다 보니 승강이를 벌인 날도 있다.

“작업 기간이 6개월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형에게 ‘뭐 생각해 온 거 있냐’고 물으니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형은 무수한 회의와 지하철 선전전 나가느라 너무 바빴어요.” (배경내)

“일과를 마치고 책 쓰려고 하면 (이규식이) 너무 피곤해 하더라고요. ‘형, 어렸을 때 시설에서 뭐 했어?’라고 물어보니까 ‘그냥 있었어’라고 대답해요. ‘그러니까 시설에서 뭐 했냐고. 말을 해야 쓰지’라고 하니 ‘네가 알아서 써 봐’라고 했어요. 너무 짜증 나서 ‘때려치워!’라고 화내면 미안하다고도 안 하고 사라져요. 사라지더니 소영이랑 작업하고, 저는 그사이에 진정이 돼요. 그럼 다시 집필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세 명(김형진, 배경내, 김소영)과 싸우고, 오가고 하면서 우리 모두 합이 잘 맞았다고 좋게 결론짓겠습니다(웃음).” (김형진)

배경내는 독자 입장에서 궁금한 걸 이규식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한번은 “형,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난 걸 한탄한 적은 없어?”라고 물었다.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물었다고 한다. 이규식은 “없어. 내 몸에 맞게 세상을 바꾸려고 했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질문을 주고받으며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중증장애인 최초 생애사’를 잘 표현할 문장을 빚어나갔다고 배경내는 말했다.

“형의 대답이 제게는 굉장히 깊게 와 닿았어요. 이 대답으로부터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라는 제목이 만들어졌어요. 무례한 질문을 받아준 형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좋은 동료와 함께라면 중증장애인 누구나 저마다 생애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배경내)

제일 오른쪽부터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가 무대에 있다. 제일 왼쪽에 있는 김형진 씨는 북콘서트 1부가 끝난 후 문자통역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경석이 형, 형에게 난 뭐야…?”

1998년 스물아홉 살, 시설과 집을 반복하던 이규식은 전동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빙빙 돌다가 우연히 정립회관 3층에 있던 노들야학에 처음 들렀다. 그때 이규식은 여기서 투쟁 인생이 시작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노들야학에 입학하자마자 투쟁을 한 건 아니었다. 이규식은 당시 노들야학 교장선생이던 박경석을 “나를 장애인이 아닌 ‘사람’으로 봐주지만 말투가 싸가지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박경석도 이규식의 첫인상을 ‘뜨내기’로 기억했다.

“98년도에 제가 치열한 경선을 뚫고 노들야학 교장이 됐어요. 교장 되고 온 첫 손님이 이규식이었어요. 당시 노들야학 학생은 정립전자 노동자가 위주였고, 외부에서 온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어느 날 뜨내기 하나(이규식)가 쓱 오더니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안 믿었어요. 장애인이라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서 온 걸 짐작은 했지만 인상을 보니 공부는 안 하겠다 싶었어요(웃음).” (박경석)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북콘서트에서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박경석 말대로 이규식은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하루는 야학 수업을 땡땡이치고 밖에서 놀다가 혜화역에서 리프트 추락사고를 당했다. 이규식은 “제2의 삶이 그때 시작됐다”(86쪽)고 설명했다. 이 추락사고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된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아래 이동권연대)’가 결성된 후 박경석의 제안으로 투쟁국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싸움 현장에서 전략이고 전술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들이박으며 싸웠다. 경찰들과 소통하거나 협상하는 일은 박경석이 알아서 하고, 나는 행동대장 격으로 싸움에만 몰두했다. 내가 맨날 싸우고 인상만 쓰고 있어선지 경찰뿐만 아니라 동료 활동가도 나를 무서워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저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92쪽)

한창 이동권 투쟁을 가열하게 하던 어느 날, 이규식은 박경석에게 물었다. “경석이 형, 형에게 난 뭐야?”

“연인도 아닌데 너무 간지러운 질문을 하더라고요. 으악. 그때 고민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더 많은 장애인이 함께 투쟁할 수 있을까, 장애인 권리가 변화될 수 있을까… 이 운동을 하는 장애인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규식에게 ‘제베’라고 말했어요.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제패할 때 오른팔로 불리던 장군이에요. 몽골어로 ‘화살’이라는 뜻인데, 규식은 화살보다 더 빨라요. ‘너는 세상을 점거하고 변화시키는, 제베같은 용장’이라고 말해준 적 있어요. 그럼 내가 칭기즈 칸이 되는 건가? 앞으로 내가 규식의 제베가 되겠습니다.” (박경석)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가 북콘서트에서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 발바닥행동 활동가 이규식, 장애인 8명을 지역사회로

이동권연대의 끈질긴 투쟁 끝에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됐다. ‘이동권’이 처음으로 법에 명시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며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으로 3년을 투쟁한 이규식에게 고비가 찾아왔다.

“(동료 활동가들이) ‘규식이는 싸우기만 하는 놈이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싸울 거리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가 쌓였다. 물론 활동가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괜히 서운했다. ‘나는 싸우기만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자, 다른 활동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인권 단체 활동가 하나가 우스갯소리로 ‘이규식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가까이 가지 마’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너무 서운했다. (중략) 3년 동안 죽어라 싸웠더니 돌아오는 게 이런 건가 싶어서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었다.” (167~168쪽)

고비가 온 시점에 발바닥행동을 만났다. 발바닥행동은 2005년에 설립된 한국 사회 최초의 탈시설운동 단체다. 이규식은 발바닥행동 활동가 박옥순을 우연히 만나 이동권연대 투쟁의 고민을 털어놨다. 이규식은 박옥순을 “따뜻한 의지처”로 여기며 자신도 그곳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이규식은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됐다.

“규식이 형의 합류를 결정하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형이 탈시설 경험이 있으니 함께 일하면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의 고민은 형이 아니라 사무실 접근성이었어요. 장애인 화장실을 포함해서, 모든 게 형이 일하기 편한 환경이어야 하니까요.” (김정하)

이규식은 발바닥행동에서도 거칠게 싸웠다. 충청북도 음성군의 대형 시설 ‘꽃동네’에서도 그의 투쟁력이 십분 발휘됐다. 당시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은 인권교육을 핑계로 꽃동네에 방문했다. 거주인 8명이 휴대전화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모두 데리고 청주 시내로 나갔다. 휴대전화 개통을 하고선 꽃동네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지역사회 생활을 맛본 8명은 모두 탈시설 했다.

“저는 비장애인인데요, 제가 아무리 활동을 열심히 해도 장애인 당사자로서 형이 가지는 마음을 따라갈 수 없어요. ‘시설에서 휴대전화를 못 만들게 하는데 이게 될까?’, ‘시설에서 신분증을 안 줄 텐데 가능할까?’, ‘시설에서 이제 그만 들어오라고 하는데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할 때 형은 탈시설 당사자로서 시설거주장애인의 마음을 먼저 이해했어요. ‘휴대전화 만들자’, ‘사무실 가서 신분증 가져오라고 해’, ‘(꽃동네로) 돌아가지 말자. 짜장면 먹자’고 밀어붙였어요.” (김정하)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하민지

- “당신도 나오세요. 내가 세상에 나온 것처럼.”

올해 54세인 이규식은 자신의 첫 자서전을 출간하고 매일 꽉 찬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쉴 새가 없다. 원래도 투쟁하느라 바쁘지만 지금은 더욱 바쁘다.

김형진에 따르면, 이규식이 과거에 몇 번 자서전 집필을 시도했다고 한다.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중단됐다. 이규식이 지난해 자신의 SNS에 이동권 투쟁과 관련한 글을 올렸고, 그걸 본 출판사 후마니타스가 출간 제안을 하면서 집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6개월간의 짧고 굵은 작업 끝에, 이규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자서전 출간이 이뤄졌다.

이규식은 많은 장애인과 그의 가족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비난하는 사람, 왜 저렇게 투쟁하는지 궁금한 사람도 이 책을 꼭 읽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은 왜 차별받으며 살까요? 부모가 이렇게 낳았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국가가 장애인을 차별당하는 존재로 만들었어요. 그 부분을 많은 사람이 책에서 봐주면 좋겠어요. 아침 일찍 지하철 막아서 짜증 나실 수 있는데,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싸웁니다. 모두 나이 들고 시설에 가실 거잖아요. 시설에 갇힐 당신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시설은 세상이 만든 감옥입니다. 장애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시설에서 나오지 말라는 사람도 세상이 만든 감옥에 갇힌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 모두 이 세상 속으로 나옵시다. 이규식이 세상 속으로 나온 것처럼요. 이걸 말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이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