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쪽방 틈에 피어난 꽃, ‘선반지기’ 김정호

가난한 유년시절 겪고 거리홈리스 생활 2012년부터 동자동 쪽방촌 거주 주민지도자이자 반빈곤운동가로 10년 폐암 치료 중 6월 10일 별세 주민들이 ‘장례주관자’ 돼 마지막까지 함께

2023-07-27     하민지 기자
6월 27일, 마사토를 섞은 김정호의 유골이 땅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에는 김정호의 영정이 보인다.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김정호의 오랜 연인 오계순이다. 사진 하민지

김정호의 유골이 손바닥 너비의 좁은 땅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쪽방보다 여가 낫지. 깔끔하고, 쾌적하고, 걱정 없고. 동자동 이제 떠난다. 잘 가거라.” 동자동 쪽방 주민 조인형이 인사했다.

유골 위에 흙이 덮였다. 쪽방 주민이자 김정호의 오래된 연인 오계순이 흙을 밟아 다졌다. “잘 가. 잘 자. 사랑해.”

6월 27일 오후 12시, 잔디가 덮이면서 김정호의 장례가 끝났다. 서울시립 용미리 제1묘지 능선형 34, 김정호가 묻힌 곳이다. 조인형은 “쪽방보다 여기가 훨씬 낫잖아요. 탁 트여서 얼마나 좋아요. 내가 올해 팔십인데 나도 얼마 안 남았어요”라고 했다.

쪽방 주민 백광헌은 “아우님(김정호)이 너무 일찍 갔어요. 우리 주민은 나이가 많잖아요. 칠십 안 넘었으면 애기지. 애기가 갔어”라고 했다.

김정호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이사장은 6월 10일,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지난해 9월, 동자동에 방문진료를 오는 의료진으로부터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이미 복강 내 림프샘과 간에 전이된 상태였다.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올해 2월부터 몸 상태가 악화됐다. 쪽방 건물의 공동화장실을 오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방에서 변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6월 8일, 요양병원에 급히 입원했다. 입원 3일째 되던 날 영면했다.

6월 26일, 성민교회에서 열린 추모식. 김정호 이사장이 부른 노래 ‘모두 다 꽃이야’가 재생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이고 지고 산 가난, 젊은 시절 찾아온 폐결핵

김정호는 1960년 8월 15일,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정호가 두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젖동냥을 하며 김정호를 키웠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린 김정호는 논밭을 가진 부잣집에서 소일거리를 했다. 풀을 베어 소를 먹이고 소똥을 치웠다.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다니지 못했다. 학교 다닐 시간에 40리 산길을 걸어서 나물을 팔아 먹고살았다.

동자동 쪽방촌에 살기 전까진 수십 년을 뱃사람으로 살았다. 14살에 처음 배를 탄 김정호는 어선, 잡화선 등을 타고 국내외를 오가며 돈을 벌었다. 번 돈은 전부 사랑하는 여자에게 보냈다. 돌아와 보니 그녀는 어느 무당과 살림을 차렸고 김정호가 보낸 돈은 하나도 없었다.

수십 년의 뱃생활로 인해 김정호는 여기저기 병 들어 있었다. 일을 하기 어려워서 박스를 주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폐결핵이 왔다. 치료 후 거리홈리스 생활을 하다 2012년부터 동자동 쪽방촌에서 살기 시작했다.

6월 26일, 성민교회에서 김정호의 추모식이 열렸다. 사진 강혜민

- 사랑 넘치며 고약한 주민 지도자

‘2013년 동자동 추석 마을행사 주민노래자랑 3등. (참가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김정호 약력 중 동자동 쪽방촌 관련 첫 번째 이력이다. 주민들은 당시 김정호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고 기억했다. 김정길은 “그날 엄청나게 좋아했잖아! 참가비 천 원 주고 노래 불러서 3등하고 화장지 받아 갔어!”라고 말했다.

“엄청나게 좋아하며” 쪽방으로 돌아온 김정호는 그만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김정길은 “노래를 너무 세게 부른 건지…”라고 기억했다. 금세 일어난 김정호는 주민노래자랑 수상을 계기로 ‘이제는 살아야겠다. 살고 봐야겠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2014년, 김정호는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아래 협동조합)에 5만 원을 내고 조합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주민 자치활동을 시작했다. 협동조합의 홍보위원, 교육이사 등을 거쳐 2020년부터 별세 전까지는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아래 협동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20년 10월엔 한국주민운동교육원에서 주민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김정호는 동자동에서 ‘선반지기’라 불렸다. 방마다 선반을 달아주는 활동을 한 덕분이다. 쪽방은 0.5평 남짓이라 선반을 달아야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주민의 가난과 명절과 장례를 보살피며 살았다.

1천여 명 주민에게 애정을 쏟는 만큼 호되게 할 때도 있었다. 난순은 “으휴, 옛날부터 성격이 고약했어. 난 화장터 안 갈 거야”라고 말했다. 조인형은 “우리 이사장님, 이제 이 꼴 저 꼴 안 보니까 좋겠어” 하기도 했다.

김호태 장례위원장이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호태는 6월 26일 성민교회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김정호를 이렇게 기억했다.

“고인은 협동회가 온전한 조직이 되게 하기 위해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자를 경계하고 정직함과 원칙을 중시했던 분입니다. 때로는 희로애락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 주민에게 오해를 사기도 하고 주민과 싸우기도 하며 동고동락해 왔습니다.

이사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었습니다. 주민이 힘을 모아 마을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며 주민의 심부름꾼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이사장 임기 도중에는 코로나19와 싸웠습니다. 또한 동자동 공공개발 사업을 진행하라고 누구보다 크게 외쳐왔습니다.”

김정호 이사장이 2021년 10월 13일,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에서 열린 공공개발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이다. 오른편에 '공공주택확대'라고 적혀있는 우산이 보인다. 사진 비마이너DB

- 사망한 지 17일이 지나서야 장례한 이유

김정호는 6월 10일에 사망했으나 17일이 지난 27일이 돼서야 화장할 수 있었다. 용산구청이 김정호의 연고자를 찾고, 동자동 쪽방 주민들이 장례주관자 ‘심사’를 받는 동안 김정호는 병원 영안실에 안치돼 있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사법) 2조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연고자에 한정된다. 연고자는 통상 ‘혈연 가족’을 뜻한다. 배우자, 자녀, 부모, 자녀 외의 직계 비속(손주), 부모 외의 직계 존속(조부모), 형제·자매 순서로 연고자의 ‘우선적인 권리’를 갖는다. 즉, 혈연 가족이 아니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 문제로 가족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혈연 가족만 장례를 치를 수 있으니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무연고 사망자가 돼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무연고자는 장례 없이 바로 화장해 납골당에 모시는데, 살아생전 그와 친밀했던 이들이 애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공간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시민사회계는 혈연 가족이 아닌 이들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속해서 요구해 왔다. 마침내 2020년,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반영한 보건복지부 지침(장사업무안내)이 신설됐다. 무연고자의 경우 사실혼 관계 등에 있는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지침 내용은 장사법에도 명시됐다. 지난 3월 개정된 장사법 12조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가 사망하기 전에 △장기적·지속적인 친분관계를 맺은 사람 △종교활동 및 사회적 연대활동을 함께한 사람 △고인이 서명한 문서 또는 민법 ‘유언에 관한 규정’에 따른 유언 방식으로 지정된 사람은 ‘장례주관자’로 지정받아 장례를 치를 수 있다. 장사법이 개정되면서 정부 지침으로만 시행되던 내용에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동자동 쪽방 주민들이 운구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그러나 한계도 뚜렷하다. 이번 장사법 개정 내용은 ‘무연고 사망자’에 한정된다. 무연고 사망자가 아니라면 여전히 혈연 가족만이 장례 권한을 갖는다. 게다가 무연고자 ‘승인’을 받아도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장례주관자로 지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인이 생전에 특정인을 장례주관자로 지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직 구청의 심사와 승인을 통해서만 장례주관자는 지정된다. 동자동 쪽방 주민의 경우, 김정호가 무연고자 ‘승인’을 받은 후 구청에 심사서류를 제출하고 장례주관자로 지정받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박진옥 나눔과나눔 상임이사는 “고인이 무연고자로 ‘확정’되는 시간, 고인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장례주관자 심사를 받는 시간을 다 합쳐 서울시 기준으로 길게는 한 달 정도가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고인은 영안실에 있어야 한다.

김정호는 무연고자이지만 장례주관자가 있었기 때문에 절차상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되지 않았다. 쪽방 주민들은 김정호를 자연장하고 용미리 제1묘지에 안장하기로 했다. 해당 묘지는 과거 쪽방 동료 몇 사람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동자동 쪽방 주민 조인형 씨가 울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주민들이 장례주관자로… “동자동 이제 떠난다. 잘 가거라”

“안 가려고 그랬는데 꼭두새벽부터 깨워 가지고. 에잇, 잠도 못 자고 나오느라 머리도 못 감았네.” 6월 27일 오전 8시, 화장터를 안 가겠다고 벼르던 난순은 지팡이를 짚고 서울시립승화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천천히 올라탔다. 그는 장례주관자 중 한 사람이다.

김정호는 사랑과 고약함으로 챙기던 주민들 손으로 마지막 길을 떠났다. 동자동 쪽방에 살던 11년간 수백 명을 제 손으로 보낸 김정호였다. 그 모습처럼 그의 가는 길에도 이웃이자 동료인 주민들이 함께했다.

승화원에 까만 정장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동자동 주민들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승화원을 ‘집’이라고 표현했다. 쪽방 주민 중 많은 사람이 서울시 무연고자 공영장례 제도로 장례를 치르니 주민들은 이곳이 익숙했다. 한 달에 너덧 번씩 장례를 치르러 승화원에 온다. 백광헌은 “여기 우리집이에요. 하도 오니까. 나는 여태껏 한 200번은 왔을걸. 돌아가신 우리 주민들, 얼굴도 이름도 몰라도 일단 다 같이 와. (가족 혹은 조문객이) 아무도 없는데 우리라도 와야지”라고 말했다.

백광헌 동자동공공주택사업추진주민모임 부위원장이 영정이 된 김정호 협동회 이사장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승화원 한쪽에 마련된 공영장례 공간에 김정호의 영정이 있었다. 김영국은 “깔끔하게 면도까지 싹 하고 찍었네. 환하네” 하며 웃었다. 백광헌은 “우리 아우님이랑 사진 하나 찍어야지” 하더니 김정호의 영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조인형은 “얘 봐 봐. 웃을 때 눈이 없어진다니까?” 하다가 영정 앞에 엎드려 “진짜 가는가…” 하며 한참을 통곡했다.

김정호가 화장되는 동안 김호태는 동자동 주민 회의를 소집했다. “곧 빈곤사회연대 빈활(반빈곤 연대활동)이 있어요. 다들 참가를 허시고, 고인의 마지막 뜻을 받들어서 우리가 끝까지 열심히…”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커피를 마시러 간 사이 김호태는 김정호의 영정을 한참 바라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화장터인 승화원에서 용미리 묘지까지, 장례 전 과정에 ‘장례주관자’인 주민들이 있었다. 주민들은 영정을 쓰다듬기도 하고, 남들보다 유골량이 많다는 말에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이지 뭐”라며 쫑알쫑알 뒷담화도 했다. 유골을 묻고 잔디를 덮고 나서는 인사했다. “동자동 이제 떠난다. 잘 가거라.”

김호태 장례위원장이 앉아 있다. 그의 뒤에 있는 TV 화면에 “고 김정호 님, 14번 화로 진행 중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공공개발 끝까지 외쳤던 김정호… “주민들이 이어가겠습니다”

동자동 공공개발 발표가 난 지 3년이 다 돼 간다. 2021년 2월,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가 동자동 쪽방촌을 공공개발 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주민들은 하루라도 깔끔한 곳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공공주택 착공을 해야 했지만 공사는커녕 개발을 위한 지구지정조차 되지 않았다. 개발 구역에 땅과 건물을 가진 소유주들이 공공개발을 결사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이 주거권 보장보다 개발 이익에 우호적이란 점을 고려하면 공공개발이 늦더라도 진행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에 김정호를 포함한 동자동 주민들은 공공개발 쟁취 투쟁을 이어갔다. 김정호는 서울시, 국토부, 한국토지주택공사 등과 면담하며 투쟁에 앞장섰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에 따르면 김정호는 ‘나는 암에 걸려서 (죽기 전에는) 공공주택에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 주민들이 들어가야 한다’ 말했다고 한다.

이원호는 “이사장님은 언제나 ‘우리 주민들, 우리 주민들’ 하셨습니다. 동자동에서 주민 운동을 해오신 것에 대해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공개발 사업에 대해서도 우리 주민들이 힘을 합치면 건물주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연결된 마음의 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장님이 기다리셨던 공공개발 추진 소식을 들려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니 너무 서럽습니다”라고 했다.

안장이 끝난 후 동자동 주민들이 장례예배를 하고 있다.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이 정대철 협동회 사업이사다. 사진 하민지

동자동 주민들은 김정호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김호태는 “고인은 동자동 공공개발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돼 주민과 다 같이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기를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 내며 외쳐 왔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고두고 가슴에 남고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라며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김정호와 협동회에서 함께한 정대철 사업이사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제가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이사장님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김정호는 사망 전날인 6월 9일, 유언을 남겼다. 10년간 주민 운동, 주거권 보장 운동, 반빈곤 운동을 이끌며 조직해 온 주민들이 그 뜻을 이어가면서 거리에서 “투쟁”을 외칠 것이다.

“사랑했어요. 많이 많이 사랑했어요. 주민들, 동자동 조합원들 잘 이끌어 나가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다니 고마웠어요.” (6월 9일, 김정호 유언 중)

김정호의 영정. 사진 하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