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법’ 발의… “국가가 사과하라”
유엔협약, 탈시설가이드라인으로 만든 법 보상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 보상 청구를 피해생존자의 ‘권리’로 규정 피해생존자들 “해당 법안 조속히 제정하라”
국가가 시설수용 피해생존자에게 보상을 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은 지난 9월 6일, ‘거주시설 수용 피해생존자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아래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법)’을 대표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유엔협약)과 탈시설가이드라인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거주시설 운영과 그에 따른 피해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명시해 고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들은 지난 3일 오후 2시,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시설수용 정책의 사과를 촉구하는 증언대회’에 참석해 해당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했다. 또한 국가를 향해 사과받고 싶다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 유엔협약으로 만들어진 법안… 보상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상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탈시설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보상을 담은 법안이 국내에 발의된 건 처음이다.
우선 ‘거주시설’은 관련 법에 따른 장애인거주시설, 정신요양시설과 정신재활시설 중에서도 생활시설, 또한 장애인과 정신질환자가 입소했던 시설 등을 통칭한다. 또한 시설에 거주하는 동안 인권 침해를 받은 장애인, 정신질환자 모두를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라고 명시하고 있다.
법안은 피해생존자에 대한 보상, 지원을 국가와 지자체의 의무로 규정했다. 의무를 이행하게 하기 위해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심의위원회(아래 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위원회는 보상금 지급, 시설 내 인권침해 조사, 시설수용이 미친 사회적 해악의 연구와 발표 등을 담당하도록 했다.
또한 국가 정책에 의해 시설수용 피해를 입은 피해생존자는 국가에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고, 그 과정에서 의사결정, 의사소통에 관한 정당한 편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위로보상금은 시설 거주기간에 따라 지급하도록 했으며, 시설수용 피해로 인한 질환 등이 있으면 의료지원금도 일시에 지급하라고 명시했다. 게다가 피해생존자의 자립정착과 생계유지를 위한 정착금, 회복을 위한 상담·치료프로그램 등도 운영하도록 했다.
법안 내용을 설명한 류다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는 해당 법안이 “탈시설가이드라인 내용과 명확하게 일치하는 법안”이라고 설명했다.
류 변호사는 “이 법안은 국가가 국제인권규범을 준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법안이다. 유엔협약, 탈시설가이드라인,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최종견해 등을 기초해 만들어졌다”라며 “국제인권규범을 준수하고 최종견해를 이행하려면 이 법안이 반드시 제정되고 이행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탈시설가이드라인에는 국가가 피해생존자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제도를 도입하라고 제시한다. 해당 법안에 이 내용은 빠져 있다. 류 변호사는 “향후 법안이 개정된다면 공적사과를 명시하는 조항이 포함되면 좋겠다. 공적사과는 국제인권법상 ‘피해자의 만족’이라는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요소 중 하나”라며 “유엔 진실정의 특별보고관도 대한민국에 ‘공식적,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공적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법안을 대표발의한 장 의원은 “시설수용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고통을 겪은 모든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법을 발의해 준 10명의 헌법기관(대표발의자 1인, 공동발의자 9인)의 이름으로, 모든 피해생존자분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며 고개 숙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장 의원은 “다음번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사과받으실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 피해생존자들 “국가는 나에게 사과하라”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들은 국회를 향해 “해당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라”라고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23년 동안 시설에 살았던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는 “나를 이 시설, 저 시설로 옮겨 살게 한 것에 대해 사과받고 싶다. 내가 외롭게 살도록 만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위로받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보상법’이 필요하다”며 “이런 환경을 만든 것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고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이돈현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활동가는 18살 때 조현병이 발병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인권침해를 겪었다. 강제로 약물치료를 당해서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손이 심하게 떨리는 등 부작용을 겪었지만 병원은 약물치료를 중단하지 않았다. 다른 환자가 말썽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결박당한 것을 보고는 자신도 저렇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 활동가는 “이건 치료가 아니다. 내가 다시 18살로 돌아간다면, 지역사회에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정신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국가가 지금의 의료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사과받고 싶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시스템을 만든 것에 대해, 나를 비롯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라. 정신장애인에 대한 비하 발언을 일삼고, 정신장애인은 자립능력이 없으니 강제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한 국회의원들도 우리에게 사과하라”고 성토했다.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들은 법안 제정 이후의 과제에 대해서도 제언했다.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시설에 보내져 25년이 지나서야 탈시설한 문석영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활동가는 “시설을 더 짓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시설에 억지로 보내는 것도 안 된다. 탈시설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지원주택, 지원인력을 잘 마련해 줘야 한다”라며 “국가는 아기 장애인도, 노인 장애인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고 호소했다.
이돈현 활동가는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 활동가는 “의료적 시스템을 넘어서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정신장애인이 왜 치료를 거부하고 약 먹기를 싫어하는지 생각하라”며 “또한 안정된 취업과 주거지원, 혼자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보조지원 등도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