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해 다양한 입장을 조율하는 일 / 백희원

[공연장을 배리어프리-하기 ④] 접근성 기획의 이해관계자들

2024-01-26     백희원

[편집자 주]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한 ‘2023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는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고자 다섯 편의 배리어프리 공연을 제작하였으며, 이 모든 과정을 아카이빙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애인 관객에게는 정보와 안정감을, 비장애인 관객에게는 인식 전환의 계기를, 그리고 창작진 및 제작진에게는 배리어프리 공연 제작에 대한 방법론적 조언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공연장을 배리어프리-하기’라는 타이틀 아래 연속 기고를 기획하였다. 총 6회에 걸쳐 진행될 이번 기획 연재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① 누구나 올 수 있는 축제를 만들기까지
② ‘듣는 포스터’, ‘만지는 무대’… 배리어 위에 다시 쓴 것
③ 접근성 기획을 하다 보면 마주치는 질문들
④ 모두를 위해 다양한 입장을 조율하는 일
⑤ 접근성 이어 말하기: 관객의 경험
⑥ [대담] 끈질기게,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SPAF)에서 축제 접근성 기획과 운영을 시작한 건 2022년부터다. 시작은 한 명의 접근성 매니저와 함께였다. 이 시도를 통해 축제 전반의 접근성 확보는 물리적 여건의 조성 수준을 넘어 시스템 차원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SPAF의 접근성 기획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2023 SPAF 접근성 기획은 2022년의 시도를 발판 삼아 더 나아간 과정이면서 2024년의 도약을 만들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2023년의 시도는 어떤 변화를 만들었을까? 2023 SPAF는 축제 접근성 기획을 개인이 아니라 팀에 맡겼고, 현장 접근성 기획 및 운영, 배리어프리 홍보 및 관객 예매 관리, 배리어프리 공연 모니터링 및 기록으로 세분화해 진행했다. 다섯 개 창작팀이 자체적인 기획과 인력으로 배리어프리 공연을 제작하며 접근성 작업을 진행했다. SPAF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성 기획의 장면들을 만들어낸 건 이들의 몫이었지만, 이러한 기획이 실제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축제의 협력자들이 크든 작든 이 과정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전체 창작팀, SPAF를 공동주최한 국립극장과 국립정동극장 세실을 포함한 5개 극장, 축제 대행업체, SPAF 자원봉사단 스파플 등. SPAF의 시스템에 접근성 기획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 시스템을 변화시킨다는 것

예술경영지원센터 조윤지 주임은 SPAF의 접근성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이 “누군가의 영역을 건드려야 하는 일”을 거듭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은 결국 구체적인 시스템의 다양한 구성원들, 예컨대 티켓 예매 담당자, 극장의 하우스팀(극장 내 객석 전반을 담당하는 팀), 공식 웹사이트 관리인 등을 건드리고 설득하고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조금다른 주식회사’(아래 조금다른)가 축제 전반의 접근성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고, 공연 단체들이 각각의 배리어프리 공연을 기획했다면, SPAF의 주관단체인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접근성 기획은 ‘누구나 자유롭게 원하는 예술 작품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기본권에 기반해 있지만,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당위만으로 설득되지는 않는다. 비장애인 중심의 공연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 비가시적인 혹은 인지되지 않았던 배리어의 존재를 설명하고, 여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을 앞으로는 기본적으로 챙겨야 한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SPAF 접근성 기획 주체들: 여러 주체들의 관계를 표기한 관계도다. 각 주체들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검은색 동그라미는 접근성 기획 협력 주체이고, 흰색 동그라미는 접근성 기획 실행 주체이다. 이 관계도를 통해 축제 접근성 운영을 위해서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이 조율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의풍경

2023년 6월부터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일하며 SPAF와 ‘무장애 예술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을 담당하게 된 조윤지 주임에게도 접근성 기획은 새롭고 낯선 일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장애인 관객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했어요. 장애인 관객 입장에서 필요한 접근성 기획이 뭘까? 그런데 지금은 접근성이 가져오는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됐지요. 현장에 접근성 테이블 하나 놓는 것 정도의 변화도 결국 이런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가능할 때가 있거든요.”

접근성 기획은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소통을 요구했지만, 역설적으로 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설득은 백 마디 말보다 일단 작게라도 접근성 작업을 함께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접근성 운영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기존 시스템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해보고 나면, 오히려 접근성 작업에 적극적으로 함께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조윤지 주임은 “처음에는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접근성 기획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한 걸 잘 해내도록 기본적인 수준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준’을 옮기려면 느리더라도 모두가 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 접근성 기획에 아직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의 생각을 더 깊이 고려하게 되는 이유다.

- 변화의 동력은 관객의 존재

가장 설득이 어려운 대상도 변화를 수용하도록 만드는 힘은 배리어로 인해 불편을 겪는 관객의 존재 그 자체다. 실제로 이번 SPAF 기간 중에 장애인 관객이 직접 공연을 예매하자, 극장이 접근성 장치를 수용하기 시작한 사례도 있었다. 관객이 공연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SPAF라는 이 크고 복잡한 협업 시스템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목표이므로, 배리어를 인지시키는 관객의 등장은 결정적인 변화의 힘이 된다.

장애인 관객 개발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SPAF 접근성 기획에서 핵심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연장이 환대의 공간으로 변화 중이라는 것을 장애인 관객에게 느끼도록 하는 일은 아직 요원하다. 공연예술 관객 인구 자체가 많지 않기도 하고, 장애인 기관을 중심으로 무료 초대권을 돌리는 등 다소 일방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 외에는 아직 홍보 채널이 많이 개발되지 않았다.

2023 SPAF는 일방적이고 일회적인 홍보는 지양했다. 대신 장애인 커뮤니티들을 리스트업하고 직접 연락해서 음성포스터, 접근성 안내 콘텐츠를 활용해 SPAF를 알렸다. 그 결과 전년 대비 장애인 관객 수가 대폭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유료 관객 수가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예술경영지원센터가 감지한 건 장애인 당사자 커뮤니티를 통한 입소문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접근성 운영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아무리 안내해도 오랜 불신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직접 공연을 감상한 장애인 관객들의 후기는 잠재 장애인 관객에게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가 된다.

입소문은 단시간에 나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 개발의 측면에서 2023년의 목표로 삼은 것은 당장의 관객 수를 늘리는 것보다, 관객들에게 배리어프리 공연과 SPAF의 접근성 기획에 대해 알리고, 장애인 관객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청취하여 관객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었다. 장애인 당사자 관객 모니터링단을 구성하고 전체 접근성 기획 아카이빙을 진행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 창작팀의 협업

2023 SPAF에서 장애인 관객이 가장 많이 찾은 작품은 〈연극연습3. 극작연습-물고기로 죽기〉(연극연습 프로젝트, 아래 〈물고기로 죽기〉)였다. 이는 신뢰할 수 있는 입소문과 관계의 힘을 보여준다. 〈물고기로 죽기〉를 기획한 고주영 프로듀서는 2018년부터 연극 작품에서 꾸준히 접근성 작업을 해왔다. 매 접근성 작업 과정은 연극 제작 과정부터 장애인 동료들과 함께하는 과정이었다. 그중에서도 2021년에 초연을 올렸던 〈물고기로 죽기〉는 이미 한 번 입소문을 탄 작품이다. 고주영 PD는 이번에 재연을 준비하며 좀 더 넓은 범위까지 장애인 관객 대상 홍보를 해보려고 했지만, 티켓 오픈 2시간 만에 매진되는 바람에 홍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정도 있었다.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동료로 친구로 관계 맺어온 이들, 그리고 스태프들의 지인들이었다.

고주영 프로듀서에게 접근성 기획은 작품을 기획하는 순간부터 함께 시작된다. ‘연극연습 프로젝트’는 고주영 프로듀서의 연작 프로젝트이자 이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팀 이름이다. 매 프로젝트마다 그에 맞는 스태프들과 팀을 꾸려 진행한다. 자막해설에 있어서는 많은 노하우를 쌓아오고 있고, 기술 스태프들과도 합을 맞춰왔다. 팀워크 안에서의 접근성 기획 과정은 상충하는 입장을 설득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접근성 작업에 필요한 솔루션을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안하는 과정이다. 〈물고기로 죽기〉에서 수어통역 화면을 무대 왼쪽에 크게 보여주는 건 후반에 정은영 연출이 제안하고 영상감독이 방법을 찾아낸 결과였다. 이런 팀워크도 지속적으로 접근성 기획이 녹아든 작품 작업을 하면서 축적되어 온 여건이다.

2023 SPAF에서는 배리어프리 예산을 추가 신청할 수 있게 되면서 초연에 없던 ‘폐쇄형 음성해설’을 처음 시도해 봤다. 호평도 있었지만 음질이 깨끗하지 못했고, FM 수신기의 이어플러그 모양이 다소 아쉬웠다. 매 시도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공연에 장애인 관객이 많이 찾아와 급히 로비 안내를 위한 수어통역사를 추가 섭외하기도 했고, 당일에는 현장의 접근성 매니저 인력 덕분에 접근성 지원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전에 SPAF 접근성 운영팀을 잘 알았더라면 현장 접근성 운영을 좀 더 유기적으로 함께 기획했을 텐데, 이 역시 고주영 프로듀서가 아쉽게 느낀 부분이었다.

“‘공연 다 만들어 놓고 장애인 불러야지!’ 하지 않았으면 해요.” 고주영 프로듀서는 자신의 작업에 큰 대의는 없다며 당부를 덧붙였다. “배리어는 극장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로비, 티켓 박스, 역에서 공연장 가는 길, 집에서 지하철 가는 길, 공연 정보 얻는 경로, 공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주변 환경…. 극장에서 거슬러 올라가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어디에 위치지어져 있는지 모르면, 공연장 객석에 앉는 순간부터의 배리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허무해집니다.” 창작자의 접근성 작업은 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배제되어 왔던 이 세계에 조금씩 접근성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다.

- 조율에서 협업으로

“안내견 동반 입장 같은 경우도 극장 현장 답사할 때 하우스 매니저에게 직접 물어보고 확인해요. 법적으로 꼭 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한데, 바로 현장에서 된다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SPAF 접근성 기획과 운영을 담당한 조금다른의 김혜진 매니저가 말했다. 극장은 접근성 현장 운영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이다. 아직까지는 소통이 어려운 상대이기도 하다. 공간의 규칙들은 안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변화에 유연해지기가 어렵고, 아주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조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함께 알아가는 것들도 있다. 김혜진 매니저는 국립정동극장 세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안내견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인 보조견, 지체장애인 보조견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덕분에 세실의 접근성 안내에는 ‘장애인 보조견’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2023 SPAF는 국립극장, 국립정동극장 세실, 대학로예술극장, 아르코예술극장, 여행자극장 등 다섯 개의 극장에서 진행되었다. 19개의 공연 작품이 각 극장에 배정되었고, 작품이 바뀔 때마다 극장의 접근성 여건도 변화했다. 창작팀마다 무대와 객석을 활용하는 방식이 다르고 휠체어석의 수나 위치도 달라지므로, 매 현장 세팅 때마다 극장, 창작진, SPAF 접근성 매니저팀의 소통과 조율 과정이 필요했고 주로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중간 소통의 역할을 맡았다. 공연 창작진과 접근성 매니저팀 간의 연계도 시도했지만, SPAF 시작이 두 달여 남은 시점에서 창작팀들과의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2023년 SPAF의 여러 협업자들이 접근성 기획을 접하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 조금씩 조율해보는 경험을 했다면, 향후에는 접근성 기획을 각자의 역할에 포함시키고 함께 솔루션을 찾아나가는 주체의 위치까지 갈 수 있을까? “처음부터 비전을 공유하고, 축제 기획 때부터 접근성 작업을 같이 하는 것”은 예산과 사업 시기의 문제 때문에 확언할 수 없지만, 2024년엔 좀 더 일찍 접근성 기획을 시작하고 싶다고 조윤지 주임은 말했다. 2022년에 축제 접근성 기획을 처음 시도했고, 2023년 범위를 확대하며 기본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2024년에는 초기부터 협업자들과 접근성 기획의 관점을 공유하여 세부적인 수준에서 그 질을 대폭 끌어올리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에 반응하는 시스템은 확인되었으니 함께 기대해 볼 일이다.

* 필자 소개

백희원. 2023 SPAF 접근성 기획 아카이브 에디터. 오늘의풍경이라는 스튜디오에서 글 쓰는 작업과 기획 작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후원(2023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