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와 소수자 / 박정수

소수자의 철학, 카프카의 경우 ①

2024-02-19     박정수

[필자의 말] 이번엔 카프카다! 노들장애학궁리소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 일은 ‘장판에서 푸코 읽기’, 즉 장애인 운동의 시좌(視座)에서 미셸 푸코의 철학을 읽는 연구였다. 두 번째 연구는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 읽기’로, 장애학의 시좌에서 그리스 비극을 읽음으로써 비극의 의미를 탈구축하는 동시에 소수자의 관점에서 운명애를 정치적으로 재구축하는 작업이었다. 두 권의 책을 내고 나니 이번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카프카의 소설을 좋아해서 카프카 전집 읽기 세미나도 했다.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소수자의 철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장애인의 삶과 연관될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아직 막연한 느낌이어서 연구를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1월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를 출간하고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수업을 다시 맡게 되면서, 이번 참에 ‘장판에서 카프카 읽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았다. 그 계기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약자와의 동행’ 때문이다. ‘약자만 선별한 복지’를 내세운 오세훈의 시정 철학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선봉대 노들야학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정을 선함으로, 시혜를 도덕으로 여기는 ‘약자의 철학’에 맞서 소수자의 철학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진보적 장애인 언론사 이름이 왜 ‘소수자 되기’란 뜻의 비마이너(Be minor)인지,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가 카프카의 소설에서 소수자의 철학을 발견한 이유가 무엇인지 장애인 운동을 통해 밝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카프카 소설에는 장애인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동안 주저했는데, 소수자의 철학으로 장애인 운동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 읽기’를 통해 여성과 장애인의 교차성을 탐구했다면, ‘장판에서 카프카 읽기’는 소수자의 시좌에서 동물과 장애인의 교차성을 탐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기획을 들뢰즈의 소수자 철학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비마이너’에 연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 기획연재는 노들야학 철학 수업에서 진행할 혹은 진행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장애인처럼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예전에는 ‘취약 계층’이란 말을 주로 썼는데, 요즘에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란 단어를 많이 씁니다. ‘취약 계층’이란 어린이, 노인, 장애인처럼 ‘무르고’[취(脆)] ‘부서지기 쉬운’[약(弱)] 몸을 가져서 사회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집단을 뜻합니다. ‘약자’는 그냥 ‘힘없는 자’란 뜻인데, 이 무미건조한 단어가 널리 쓰이는 건 ‘갑질한다’, ‘갑-을 관계’란 말이 유행한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힘 있는 자(강자)와 힘없는 자(약자)로 양분되어 있다는 대중적 인식 때문으로 보입니다. ‘소수자(少數者)’는 ‘다수자(多數者)’와의 상대적 관계에서 볼 때 한 사회에서 ‘적은 수’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 오른손을 주로 쓰는 오른손잡이 한번 손들어 볼까요. 이번엔 왼손잡이 손들어 보세요. 네, 이 교실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에 비해서 적은 수를 차지하는 소수자입니다.

- 소수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 소수자는 단지 그 수가 적다는 사실로만 정의되는 게 아닙니다. 소수자는 적은 수로 인해 의사결정을 비롯한 사회적 기회, 권력, 부의 분배 결정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집단입니다. 이 교실에서 휠체어 이용자가 수는 많지만 그렇다고 이동할 때 이족보행하는 사람에 비해 더 많은 기회와 권세를 누리지는 못하죠. 왼손잡이가 소수자인 것은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일상생활의 온갖 사물을 배치한 사회에서 왼손잡이가 겪는 불편과 차별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의 몸과 정신을 기준으로 만든 사회적 환경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은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 겁니다.

수가 적다고 반드시 권세가 적은 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아주 소수지만 그들이 누리는 권세는 다수 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크죠. 과거 귀족 사회에서도 그랬고 오늘날 신자유주의 신분 사회에서도 높은 신분의 권력자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가 적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수는 적지 않지만 의사결정을 비롯한 사회적 기회, 권력, 재산은 훨씬 적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 귀족 사회에서는 귀족 신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이 사회적 가치의 척도가 되고 권력과 부의 분배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가 적은 것이 곧 권세가 적음을 뜻하게 된 건 근대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다수결이 정치적 의사결정의 지배 원리가 되고, 다수민족 단위로 국가가 운영되고, 다수의 평범함이 정상성의 기준이 되면서 소수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배제되고 차별받으며 사회적 약자로 내몰린 겁니다. 단적으로 다수민족이 한 국가의 지배 인구가 되면서 소수민족 내지 소수인종은 차별과 배제, 심지어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비교적 동질적인 민족(인종) 단위로 살아온 우리나라와 달리, 민족국가의 형성이 19세기에 폭력적으로 이뤄진 서구 사회에서는 소수민족(인종)이 근대사회의 약자인 소수자의 대표 형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다수자의 인종적 특성이 국민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수자의 일상적 평범성을 ‘정상성’의 척도로 삼고 소수성을 ‘비정상’으로 치부합니다. 흔히 ‘나치(Nazi)’라 불리는 독일 파시스트 정당의 명칭은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인데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는 단지 단일민족 국가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소수적 특성이 다수 시민의 평범한 삶에 ‘비정상’을 초래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치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전에 먼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장애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22년부터 여러분이 지하철 선전전에서 많이 듣고 외친 ‘T4’라는 단어가 그 학살의 대명사입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개인적 지령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Tiergartenstraße, 동물원로) 4번가에 위치한 비밀조직이 총괄해서 ‘T4’라는 암호명이 붙게 된 이 학살 프로그램을 통해 수십만 명의 장애인들이 집단 수용되어 가스실에서 죽어갔습니다. 나치가 내세운 논리는 불치의 유전적 장애가 다수 국민들의 정상적인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독일 인종의 정상적인 발달에 퇴행을 초래하고, 다수 선량한 노동자들이 힘들게 낸 세금으로 쓸모없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느라 정상적인 생활이 위태로워진다는 선전에 다수 국민들이 동조했습니다.

2020년 8월, ‘국제 성소수자 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이 신촌역 지하철역에 게시한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광고판이 20대 남성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다시 게시된 광고판에 시민들이 환영과 지지를 표하는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사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나치 치하에서 정신장애인과 비슷한 비난과 공격을 받은 소수자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입니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나치 돌격대(SturmAbteilung, SA)의 우두머리 에른스터 룀(Ernst Röhm)은 자타 공인 동성애자로 군대 조직에서 남성 간의 사랑은 전우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룀의 동성애를 별로 문제 삼지 않던 히틀러는 독일 총통이 된 후에는 국가 통치에 방해가 되는 룀과 돌격대를 숙청합니다. 그때 히틀러는 보수적인 기독교 대중들의 동성애 혐오를 이용합니다. 동성애는 독일 인종의 재생산을 저해하고 정상가족을 파괴하는 혐오스러 짓이라는 거죠. 1934년 6월 30일 ‘긴 칼의 밤’이라 불리는 숙청 이후 나치는 당 내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매년 8,000명 이상의 성소수자들을 체포하거나 수용소로 끌고 갔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흑인 차별과 유대인 학살의 역사 속에서 소수민족(인종)이 소수자의 대명사로 부각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소수인종에 대한 경험이 드물었습니다. 그나마 6.25 전쟁 이후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인종적 소수자를 대표했습니다. 1961년 ‘한국장애아동조사보고서’는 장애의 12가지 종류에 ‘혼혈아’를 포함시켰습니다. 혼혈아를 장애아에 포함시킨 게 이상하죠?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소수민족(인종)’이라는 범주조차 없었고, 장애인처럼 군대도 가지 않는 혼혈아는 ‘비국민’으로 배제되어 사회적으로 유령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소수자’는 ‘성소수자’란 단어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소수자’라고 하면 곧바로 ‘성소수자’를 떠올리고, 그와 구별해서 장애인과 이주민은 ‘사회적’ 소수자라 칭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2000년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유명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과 퀴어문화축제가 이어지면서 성소수자라는 존재와 명칭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이 대량 유입되고 ‘다문화’ 정책이 시행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2001년 이동권 투쟁 이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등으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매체에 알려진 것도 이 무렵입니다.

성소수자를 비롯해 장애인과 이주민 등의 소수자들이 다양성과 인권의 기치하에 존재감을 드러내자 그에 대한 반발 세력도 생겨났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국제통화기금(IMF)과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용 불안정성이 커지고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인터넷 환경의 비약적인 발전 속에서 다원주의를 표방한 집권당에 대한 불만, 사회경제적 불안 심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소수자 혐오로 모아져 ‘일베’ 같은 ‘넷우익’ 집단이 득세했습니다.

인터넷 바깥에서 혐오 담론을 확산시킨 집단은 보수 개신교입니다. 2007년부터 성소수자 차별까지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논의되자, 보수 개신교는 동성애 반대를 내세우며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젊은 층의 유입이 감소하면서 교세가 약화되던 보수 개신교는 정상가족과 정상사회 수호자를 자임하며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했습니다. 나치 독일에서 보수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동성애자와 이주민, 특히 이슬람 국가 출신 이주민들이 ‘종북 세력’과 함께 정상적인 가족 질서와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는 담론을 퍼뜨린 겁니다.

최근에 존재감을 드러낸 소수자는 ‘비건(vegan)’이라 불리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입니다. 육류는 물론 생선, 우유, 달걀 등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고요? 어릴 적 체질이나 식성 때문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의 동물 착취를 거부하는 이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음식을 못 먹기 때문에 육식 중심의 사회에서 비건들은 먹고사는 데 많은 제약을 지닌 소수자입니다. 동물에 가해진 폭력을 자기 것처럼 공감하기 때문에, 이들은 동물 학대가 일상인 대중매체와 일상생활에서 정서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비건 중에는 스스로를 그냥 동물이라 여기며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경험은 다수자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나 남들한테 인정받기 어려운 정체성, 가령 자신을 외계인이나 간첩, 메시아라고 여기는 정신장애인의 경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다수자는 ‘인간’과 ‘동물’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 여기는데 반해 동물해방론자들은 인간도 동물이라 여기고, 굳이 한쪽을 고르라면 자신은 동물 쪽에 속한다고 여깁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텐데 카프카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여겼으며 그런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소수자라는 말을 익히 들어봤을 겁니다. 진보적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 알죠? 비마이너(Be minor)는 ‘소수자가 되자’라는 뜻이에요. 영어로 소수자를 ‘the minor’ 혹은 ‘minorities’로 표기합니다. 야구 좋아하는 분은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란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네, 2군, 1군이라고도 하죠. ‘메이저’와 ‘마이너’라는 단어의 뜻에는 수의 많고 적음은 없고, 대신 사회적 세력으로서 주류냐 비주류냐, 사회적 위치가 중심이냐 주변이냐, 사회적 힘(영향력)이 크냐 작으냐의 차이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왕이면 메이저가 되는 게 좋지 왜 ‘소수자가 되자’란 이름을 지었냐고요? 자신의 장애를 치료하거나 극복하면 비장애인과 같은 주류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장애인이 주류인 사회, 장애인이 사회적 가치의 척도가 되어 권세를 휘두르는 사회를 만들면 됩니다. 물론 어렵겠지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원하세요?

왜 장애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보적 언론사가 ‘소수자가 되자’란 뜻의 이름을 사용할까요?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소수자로 만든 특성(장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긍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척수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소수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거나, 치료해 없애려고 발버둥치거나, 비장애인과 같은 주류의 꿈을 성취해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도 않고 소수자가 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특성을 자기 존재의 고유한 특이성으로 긍정할 때 비로소 소수자가 됩니다. 나아가 소수자는 그 소수적 특이성을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주류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힘의 원천으로 여기기에 소수자가 되라고 한 겁니다.

- ‘약자와의 동행’, 어떻게 느끼시는지?

요즘 많이 쓰이는 ‘약자’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소수자란 개념처럼 ‘약자가 되자’, 약자의 정체성을 갖고 약함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길어 올리자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중에는 작년까지 서울시가 고용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였다가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해고된 400명에 포함된 분들이 많습니다. 그 대량 해고를 규탄하며 복직 투쟁을 하는 장애인이 든 피켓 가운데 “오세훈, 약자와의 동행을 실천해”라고 적혀 있는 걸 봤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웠는데, 정작 최약자인 중증장애인의 일자리를 뺏은 걸 비판한 문구입니다.

서울시 홈페이지. 왼편에는 웃고 있는 오세훈 시장의 사진이 있다. 하단에는 “약자와 함께하는 동행특별시”, “‘약자와의 동행’은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입니다” 등의 문구가 쓰여 있다. 

서울시는 장애인을 위한 공공일자리를 없앤 게 아니라 ‘장애유형별 맞춤형 특화일자리’로 바꾼 것이라고 말합니다. 발달장애인은 원예관리 보조, 뇌병변장애인은 품질검사 보조 등 장애 유형별로 할 수 있는 일을 잘 찾아서 나눠주겠다는 겁니다. 뭐가 달라진 걸까요? 2020년부터 해온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면서(문화예술 직무), 공공건물의 장애인 접근성을 조사하고 ‘Disability Pride’ 거리 행진을 하면서(장애인 권익옹호 직무),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하면서(장애인 인식개선 직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중증장애인도 시민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공공일자리로 보장한 사업입니다.

그런데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운 오세훈 시장은 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을 폐지하고 400명의 중증장애인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걸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약자와의 동행’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약자와 동행하기 싫어서? 아니면 오세훈이 생각한 ‘약자와의 동행’에 그 사업이 걸맞지 않아서? 좀 더 단순하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세훈 시장이 말한 ‘약자와의 동행’이 듣기 좋으세요? 듣기 좋은 말이긴 한데, 제대로 실천을 안 해서 기분이 나쁜 건가요? 아니면 애초에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 자체가 듣기 싫고 그 시정 철학이 기분 나쁜 건가요? 대략 반반 정도네요. 말은 좋은데 실천을 안 해서 문제라는 분의 의견은 뭔가요? 네, 역시 중증장애인은 ‘약자’가 틀림없고 ‘약자와의 동행’은 약자의 삶을 옆에서 잘 돌보겠다는 뜻이므로 좋게 들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기분이 나쁜 이유는 뭔가요? 네, 자신은 약자가 아닌데 약자와 동행한다는 게, 동등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동정의 손길을 내미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쁜 것이겠죠.

박원순 사망 사건으로 치러진 2021년 4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잔여 임기를 마치고, 2022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새로운 서울시장 임기를 시작한 오세훈은 보란 듯이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웠습니다. 저는 여기서 금의환향한 탕자의 복수 의지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혹은 믿기지 않겠지만) 오세훈은 4선 서울시장입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첫 서울시장 임기를 시작한 오세훈은 당시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과정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와 많이 부딪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후 2010년 12월 초·중등학교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는 조례가 서울시의회에서 통과되자, 오세훈은 전면적 무상급식을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며 저소득층을 선별해서 단계적으로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급기야 자신의 선별적 복지 이념과 시장직을 걸고 전면적 무상급식에 대한 반대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가, 투표율이 3분의 1에 못 미쳐 자동 부결되면서 시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 쫓겨났던 오세훈이 다시 서울시장으로 되돌아와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내세웠으니 그 뜻이 뭐겠습니까? ‘약자와의 동행’이라 쓰고 ‘선별적 복지’라 읽을 수밖에 없는 거죠. 2011년 오세훈은 시장직까지 걸고 선별적 복지를 주장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는 건 좋은데 그걸 모든 학생에게 한다고? 오세훈 생각에 그건 ‘복지’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복지는 도움이 필요한 ‘약자(저소득 계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인데, 모든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자는 건 사회주의에서 하는 밥공장의 배급과 다를 바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념 공세에 넘어가기엔 서울시 주민들에게 밥 문제는 매우 절실하고도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밥 먹을 때만큼은 차별과 낙인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녀들 도시락 싸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사회적 효능감이 더해져 서울시민들은 보편적 무상급식을 선택했습니다. 친환경 무상급식을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학생의 기본적 권리로서 공익적 가치가 있다고 인식한 겁니다.

오세훈 시장이 여러분을 해고한 것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이 자신의 복지 이념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장애인도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음을 알리는 홍보 및 선전 활동을 가치 있는 노동으로 보고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로 시행된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오세훈이 보기에 그건 친환경 무상급식처럼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복지 이념에 걸맞지 않습니다. 오세훈 시장의 ‘장애유형별 맞춤형 특화일자리’는 노인일자리 사업처럼 노동시장의 약자를 위해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복지부의 예산 규모와 시혜 여건에 따라 실시하는 복지 사업입니다. 직무 역시 중증장애인의 정체성을 긍정할 수 있는 활동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밀려난 노동 영역의 주변부에서 단순 보조 역할을 맡기는, 그래서 그들의 약함과 쓸모없음이 재차 드러나게 하는 일자리입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오세훈 서울시장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약자의 철학 vs 소수자의 철학

202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오세훈 시장은 “전장연을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왜냐하면 전장연이 2021년 12월부터 1년 넘게 장애인의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예산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타기 직접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세훈이 보기에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선량한 다수 시민”의 출근길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시위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세훈 시장이 생각한 ‘약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전장연처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조직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약자가 아니랍니다. 오세훈 시장이 동행하려는 ‘약자’는 강자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 불쌍한 개인들입니다. 오세훈 시장에게 ‘약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세가 미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객관성으로 정의되는 집단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힘없고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라 여기며, 강자가 베푸는 시혜와 동정에 감사하는 ‘주관적’ 태도로 정의되는 불쌍한 이들입니다. 주로 최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참여하고, 최중증장애인들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두는 전장연은 객관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조직이 맞습니다. 그러나 오세훈이 봤을 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체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장애인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약자’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약자’에게 걸맞은 태도는 뭘까요? ‘약자’는 자기와 세계에 대해, 특히 강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약자의 처세술, 혹은 약자의 철학이라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힘이 있어도 힘을 억제하는 태도를 도덕이라 여기고, 욕망의 억압을 선하다고 여기는 것, 동정과 시혜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이 대표적인 약자의 철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세훈 시장의 시정 철학인 ‘약자와의 동행’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약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의 철학은 약자의 철학과 어떻게 다를까요? 소수자가 자기와 세계를 느끼고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앞으로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소수자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어떻게 소수자의 철학을 내포하는지 탐구할 것입니다.

필자 소개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자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2020년에 『‘장판’에서 푸코 읽기』를 썼고, 2024년 1월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 장애학자가 들려주는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노들야학 영화반에서 학생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다가 1년 만에 철학 수업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