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센터 글쓰기 수업 참여 고군분투기 / 김상희

[칼럼]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

2024-03-08     김상희
김상희 씨. 사진 제공 김상희

- 강의를 듣는 건 나만의 취미활동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연초만 되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 계획 세우기에 몰두한다. 이미 사무실 일이 차고 넘치는 상황인데도 새해만 되면 무언가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굳어만 가는 몸을 위해 운동도 하고 싶고, 그림과 악기를 다루는 취미생활도 해 보고 싶고, 뭔가 학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평소 굳게 닫혀 있던 욕망의 항아리가 들썩거리다 뻥 터져 나올 듯, 하고 싶은 게 갑자기 이것저것 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비록 작심삼일도 못 가는 욕망이지만.

이럴 땐 일단 목록을 정리한다.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 놓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둘씩 지운다. 그렇게 지우고 지우다 보면 결국 한두 개밖에 남지 않는다. 그게 강좌를 신청해서 듣는 일이다. 사실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지식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텍스트를 읽고 강의를 듣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증의 장애를 지닌 내가 그나마 남의 지원을 크게 받지 않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강의를 듣는 일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생각의 깨우침이 너무 좋아서 인문학 강의하는 곳을 죄다 찾아내, 저렴하거나 무료인 강의가 있으면 퇴근길에 몇 시간이 걸려도 무조건 들으러 갔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간 강의에서 용어도, 내용도 반 이상은 못 알아듣고 고개만 끄덕거리다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남는 게 있겠지’ 생각하며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인문학 강의는 점점 사라지고 축소됐다.

- 강의실에서 만난 흔들리는 눈빛들

인문학 강의가 점차 줄어들 무렵 나는 글쓰기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내가 가진 생각과 고민을 좀 더 잘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서 글쓰기 강의를 수강했다. 연 1회에서 2회 정도 강좌를 신청해서 듣곤 했는데, 장애 쪽과 무관한 비장애인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애인단체 내에서도 경우에 따라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종종 경험하는데, 장애인을 본 적도 접한 적도 없을 비장애인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는 게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장애인단체에서 만나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과 만날 결심’을 하고 온 사람들이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함이 생긴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만나는 비장애인들은 여기서 장애인을 만날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하고 온 이들이라 첫 대면부터 흔들리는 눈빛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장애인 친구나 지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와 눈빛에서 낯섦과 불편함을 읽게 된다.

인문학과 글쓰기 강좌를 들으며 나는 비장애 사회에 대한 방어벽이 단단하게 생겨버렸다. 여태까지 내가 다녔던 강좌들은 모든 환경이 비장애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나는 강의실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놀라움이나 어떤 불편함을 주는 존재가 되곤 했다. 그 광경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가르치는 인문학 강의실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살피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나 모두 비슷한 분위기이다. 그들에게 장애를 가진 인간은 언제나 놀랍고 낯선 타자로서만 인식되는 것 같았다.

나는 비장애 중심의 강의실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강사의 이력을 꼼꼼히 살핀다. 강사 중에 대놓고 장애인 차별적인 말을 하는 이들을 여럿 보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최소한 이 사람이 어떤 책을 냈고 어떤 인터뷰를 했는지 검색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 사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둘째, 수업 도중에 읽고 쓰고 말해야 하는 참여형 수업은 듣지 않는다. 언어장애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나의 발화 행위를 차분히 기다려주는 강사도 없을뿐더러, 안면 마비로 인해서 말할 때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는 나의 모습에 혐오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보았기 때문이다. 돈까지 내고 듣는 수업에서 그런 눈빛을 받으며 괜찮은 척 앉아 있기는 싫다. 그래서 되도록 말 안 시키고 강사가 주도하는 수업만 골라 듣는다.

한 강의실의 모습. 앞에는 강사가 서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강의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빼곡하게 놓여 있다. 사진 픽사베이

- 넓은 공간, 의자가 빠진 책상, 제 속도대로 말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올해 연초에도 나는 무슨 강의를 들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미디어 비평이나 에세이 글 청탁이 종종 들어오면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글을 쓰려면 냉철한 시선과 관점이 필요하고 미디어를 분석해 내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한참 못 미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관련 에세이 쓰기 강의를 수강했다. 다른 강의도 듣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참여형 수업이거나 이런저런 조건이 맞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망설이며 골라 둔 강의가 하나 있었는데, 강사도 괜찮은 것 같고 강의도 재밌을 거 같아서 수강 신청을 해버렸다.

막상 수강 신청을 하고 나니 그동안 겪었던 불편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불편한 상황을 참고 들을까, 아니면 수강 신청을 취소할까?’를 다시 고민하다, 나와 같은 불편함을 겪는 장애인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화센터 측에 메일을 보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메일을 통해 문화센터 측에 세 가지 정도를 요청했다. 강의실에 휠체어가 편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 확보가 필요하고,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미리 빼놓았으면 하며, 나에게 언어장애가 있으니 이와 관련해서 강사와 사전 소통을 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어떤 강좌에 가도 강의실에는 항상 책상과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사이를 전동휠체어로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도착한 자리에서 나는 비장애인 수강생들에게 ‘의자 좀 빼 주세요~’라고 소리쳐야 한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내가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또한 비언어장애 중심의 강의실에서 언어장애를 가진 나는 배제되기 일쑤였다. 어떤 강사는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한글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한 적까지 있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장애인운동을 하는 차원에서 메일을 보낸 것이다.

수강 신청을 하고 며칠이 흘러 드디어 개강 날이 되었다. 밀린 업무를 뒤로 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듬으며 왠지 외진 곳에 혼자 여행을 가는 것만 같은 두려움과 떨림을 느꼈다. 이 두려운 마음이 더 커져서 가기 싫은 마음으로 변할까 봐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퇴근길 인파를 뚫고 도착한 강의실 풍경은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글에 계속)

* 필자 소개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멋진 글은 못 쓰지만,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인권운동이다. 비장애 중심의 정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의 언어로 말하기를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