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번의 금요일과 23년의 기다림 / 최태현
[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 520번의 금요일
올해 4월은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엄숙히 지키는 모임들로 가득하다. 그 와중에 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은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지난 10년간 사연을 구술기록을 통해 담아낸 책 『520번의 금요일』을 펴냈다. 동시에 한때 사회가 ‘아이들’이라고 불렀으나 어느덧 청년이 된 세월호 생존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도 펴냈다.
두 책을 읽으며, 10주기를 기념하는 여러 모임에 참여하며, 520번의 금요일이 지났다는 사실 앞에서 탄식했다. 이분들이 가장 외로웠을 시기, 가장 힘들었을 시기, 가장 혼란했을 시기가 어느새 지나고, 팽목항에서 하염없이 울던 부모와 형제자매에서 돌덩이처럼 단단하면서도 노래처럼 자유로운 시민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는 분들을 볼 때면, 고마움과 미안함을 마음에서 덜어낼 수가 없었다. 이분들을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위로해 드리려 갔다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분들과 생존자분들, 함께한 분들의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데까지 그 긴 520번의 금요일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절로 가슴에 손을 얹게 된다.
- 520번째 사람
노들장애학궁리소의 고병권은 기록작가 홍은전을 ‘두 번째 사람’이라고 불렀다. 고통받는 첫 번째 사람이 있고, 그를 기록하는 두 번째 사람이 있는데, 홍은전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왔다는 의미였다. 그 표현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몇 번째 사람일까. 이는 결코 나에게만 떠오르는 질문이 아니라고 확신하기에 이런 공적인 글쓰기에서 이야기해 본다. 당신은 몇 번째 사람일까.
지난 4월 7일 오후 6시 416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있었던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예배에 참석하고자 홀로 안산 화랑유원지에 갔다가, 드넓은 유원지에서 예배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5년 넘게 진행되었던 이곳에서의 예배를 이제야 처음 참석하러 왔다는 사실을. 네모난 유원지의 남동쪽 끝자락, 언덕배기에 위치한 단원고등학교가 바라다보이는 그 ‘부지’, 이미 공원이 들어섰어야 할 그 ‘부지’에서 예배를 드리던 작은 무리가 바로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이어오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람들이라는 것을. 10년의 시간, 520번의 금요일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이분들에게 한 걸음쯤 다가서 볼 수 있었던 나는 그 순간 520번째 사람이었다.
- 23년의 시간
지난 2022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웠던 숫자 중 하나는 ‘21’이었다. 장애인들이 출근 시간 지하철역에서 외치던 “21년”. 2001년 1월 22일, 오이도역에서 장애를 지닌 노부부가 참사를 당한 이후 한국 사회가 장애인들의 인권에 침묵해 왔던 시간. 21세기 이후 우리 사회 전반의 자유와 복지의 신장에 비해 장애인권은 제자리에 머물러 왔음을 강조하며, 우리더러 언제까지 더 기다리라는 말이냐고 외치던 그 절규를 응축한 숫자. 그리고 그 숫자는 2년이 지난 2024년 현재는 23년, 주로는 1,210주가 되어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는다.
불과 몇 년 전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작년 그날이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장애인이 정책대상화되지 않고 주체로 서는 날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탄식했다. 장애 정책의 이슈들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하던 즈음, 내 인식의 지평이 얼마나 좁은지를 다시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아무리 읽고 공부하고 배워도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관점, 언어가 등장하는 장애 운동의 거대함 앞에서 나는 ‘1,210번째 비장애인’임을 인정해야 했다.
- 참회록
작년 12월, 탈시설 운동을 하는 단체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송년 모임에서 다소 코믹한 ‘프로바이오틱스 상’을 받았다. 유쾌하지만 과분한 순간이었다. 그랬다. 나는 위장도 아니고, 위액도 아니고, 심지어 장내 유익균도 아니었다. 딱 프로바이오틱스였다. 그 위치는 한편으로는 편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지 씁쓸한, 1,210번째 경계인의 위치였다.
지난 1월, 416합창단의 월요 연습에 처음 찾아갔을 때, 연습 말미 이미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에 단원분들은 나를 불러내더니 「사랑합니다」라는 곡을 불러주셨다. 합창단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이들이 방문했을 때 불러주는 곡이라고 했다. 역시 과분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520번째 사람이 아닌 두세 번째 사람에게 합당한 곡이라 생각했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어쩌면 언론의 칼럼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520번째 사람, 1,210번째 비장애인이 나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이 416생명안전공원 부지가 어디에 있는지, 지하철에서 포체투지1)를 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힘을 보탤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이는 어쩌면 자신을 이어줄 519번째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동행으로 이어지는 데는 꽤 긴 거리가 있다.
비마이너의 독자들은 대부분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이겠지만, 만일 그 길의 초엽에서 망설이고 있는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다. 한 걸음을 내디뎌 보시라고. 521번째 사람, 1,211번째 비장애인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결코 꽃길은 아니지만, 대단한 헌신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라고. 따뜻한 김치볶음밥과 노래가 있는 길이라고. 무엇보다 함께 하기에 절대 늦지는 않은 것 같다고. 지금부터 가도 먼 길일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앞서 서 있는 분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들의 환대에 감사하다고. 당신들의 뒤에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계속 있을 것이라고.
1) ‘포체투지(匍體投地)’는 두 팔꿈치, 두 무릎, 이마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온몸으로 땅을 기어가며(匍)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시민불복종 행동을 말한다.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2725senato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