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으로 탈주하라 / 박정수

소수자의 철학, 카프카의 경우 ④

2024-04-13     박정수

『변신』이 탈주(fuite)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던가요? 네, 『변신』은 회사 생활과 부양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몸이 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애정에 이끌려 인간적 과거에 미련을 갖게 되고, 그 미련에 가로막혀 동물적 삶의 탐색을 중단하고 말죠. 이후 그는 자기 방 안에 봉쇄되어 아버지의 심판과 가족들의 방치 속에서 죽어 갑니다.

- 학술원에 드리는 변신의 보고

‘변신’이 ‘탈주’의 방법임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17년 오스트리아 조간신문에 게재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그겁니다. 이 소설은 우리 속의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신해 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변신’이라고 했지만, 신체 모습이 정확히 어떻게 변한 건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내 몸에서 털가죽”을 벗겨낸다는 표현으로 보아 원숭이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도 같은데, 그럼에도 이 소설이 인간으로 변신한 원숭이 이야기인 건 틀림없습니다.

『변신』은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화자가 자기 몸이 바퀴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걸 발견했다며 독자를 놀라게 하죠. 마찬가지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화자는 첫 문장에서 “고매하신 학술원 회원 여러분! 여러분들은 원숭이로 살아왔던 저의 전력에 대한 보고서를 학술원에 제출하도록 요구하심으로써 저에게 영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라며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5년 전까지 원숭이로 살았던 화자가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하여 “유능한 인사들의 안내를 받고, 충고, 박수갈채,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성원도 받”는 사람으로서 학술원 회원들에게 인간의 언어로 보고하는 게 자연스런 일은 아니잖아요.

영화 「혹성탈출」 보셨나요? 이 SF는 뇌세포를 증식시켜 주는 알츠하이머 치료용 바이러스에 감염된 유인원들이 불과 수년 만에 인간의 지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설정합니다. 반면에 카프카 소설의 원숭이는 집요한 노력과 교육을 통해 그와 같은 급작스러운 진화를 성취했답니다. “반드시 배워야 한다면, 배우게 됩니다. 출구를 원한다면, 배우는 법입니다”라는 말처럼, 출구를 찾으려는 간절한 욕망과 의지가 변신의 원동력입니다. 『변신』에서 회사와 가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변신의 원동력인 거 기억나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 화자는 어디로부터 탈주하려 욕망한 걸까요?

그는 원래 황금 해안에 살던 원숭이였습니다. 5년 전 그는 무리 가운데 섞여 물을 마시다가 하겐벡 회사의 사냥 원정대가 쏜 총에 맞았습니다. 한 발은 뺨에 맞아 붉은색의 흉터를 남겼는데, 그 때문에 그는 얼마 전 죽은 유명한 조련된 원숭이의 이름인 ‘페터’ 앞에 ‘빨간’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빨간 페터’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발은 엉덩이 아래에 맞아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고요. 하겐벡 증기선에 잡혀 온 그는 한 면에 쇠창살이 달린 궤짝에 갇혔습니다.

- 하겐벡 사냥 원정대와 인간 포획

네. 맞아요. 흑인도 이렇게 포획되어 노예가 됐고, 야생동물도 이런 사냥 원정대에게 잡혀서 동물원에 갇혀 살게 됐죠. 실제로 동물원의 아버지라 불린 칼 하겐벡(1844~1913)은 동물뿐만 아니라 에스키모인, 흑인, 베두인족, 누비안 종족의 사람들을 잡아 오거나 사 와서 동물원에 전시했습니다. 19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 역시 이런 방식으로 길거리에서 잡아 온 부랑인들과 장애인들을 철창이 달린 시설에 수용했습니다. 1950년대 부산 영화숙, 1960년대 재생원 역시 경찰과 단속반원들의 부랑인 사냥을 통해 수용소를 채웠고, 1942년에 세워져 1982년에 폐쇄된 선감학원의 소년 수용자들 역시 이런 부랑인 사냥을 통해 안산 선감도에 잡혀 왔습니다.

하겐벡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궤짝 모양의 우리는 “똑바로 일어서기에는 너무나 낮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협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무릎을 굽히고 쭈그린 자세로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좁았으므로 그 안에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소리 죽인 흐느낌, 고통스러운 벼룩 잡기, 피로하게 야자를 핥는 일, 머리로 궤짝 벽을 두드리는 일,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혀를 내보이는 일”이 있을 뿐이죠.

1961년 5월 26일 서울시 직원들이 부랑아 수용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출처: 서울기록원

시설에 갇힌 장애인들의 일상도 비슷하다고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음성 꽃동네에 살다 탈시설하신 윤국진 님이 여기 계시네요. 국진 님의 시설 생활은 어땠나요?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 반에 밥을 먹고, 8시 기도가 끝나면 잠을 자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벽지 무늬를 관찰하며 지냈다고 하시네요. 이렇게 시설에 갇힌 채 무미건조한 단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고력과 언어 능력이 둔화되고 우울, 무기력, 의존성이 높아지는 ‘시설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다행히 국진 님은 탈시설 지원 단체를 만나 지역사회에서 투쟁하는 장애인들을 알게 됐고, 끈질긴 투쟁으로 20년 만에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죠. 시설에 갇힌 삶에서 탈주하려는 욕망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빨간 페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난생처음 출구가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렇게도 많은 출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출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하겐벡 증기선 중간 갑판의 좁은 우리 안에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어디 있을까요?

- 인간 흉내로 출구 찾기

사람들 몰래 우리 문을 열고 도망쳐야 할 텐데, 가능할까요? 화자는 아마 가능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원숭이에게는 언제나 도주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물쇠의 허점이 발견될 거고, 강한 이빨로 자물쇠를 물어뜯는 데 성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엇이 얻어졌겠습니까?” 다행히 사람들 눈을 피해 “다른 동물들, 예컨대 제 맞은편에 있었던 구렁이에게로” 도망친들 잡아먹히기나 할 테니까요. 증기선 바깥의 바다로 도주하는 건 어떨까요? 사방이 탁 트인 대양이야말로 자유의 공간이니까요.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저 자유의 신봉자라면” 분명히 “대양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페터는 바다로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10분도 못 가서 익사하거나 상어 같은 다른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혔을 테죠.

그는 다른 데서, 갑판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길 속에서” 출구를 보았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섣부른 도주를 포기한 그는 철창 너머 “사람들이 언제나 같은 얼굴, 같은 동작으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흡사 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걸어 다녔습니다. 그는 가만히 배로 생각했습니다. “원숭이는 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원숭이들은 동물 우리에 갇혀 있어야 하지만, 인간은 자유롭게 우리 밖을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원숭이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밖의 인간을 흉내 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처럼 우리 밖을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을 흉내 내는 건 쉬웠습니다. 침 뱉는 건 며칠 만에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의 원숭이는 우리 밖 선원들과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뱉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그는 파이프 담배 피우는 걸 흉내 냈습니다. 담배 맛을 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파이프 담배를 멋들어지게 피우는 원숭이의 모습에 하겐벡 선원들은 환호했습니다. 병에 든 독주를 들이켜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걸 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원숭이의 모습에 선원들은 감동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매일 찾아와서 독주를 들이켜는 걸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저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제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이제 수수께끼를 품은 존재, 즉 원숭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모호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그는 우리 밖의 선생이 독주를 마시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코르크 마개를 빼내고, 병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술병을 앞으로 쭉 내밀다가 단숨에 들이켜고, 마신 후 배를 쓰다듬는 손동작까지. 그는 이를 따라 하고 싶은 열정 때문에 “낑낑거리며 제 몸을 이리저리 닿는 대로 마구 긁어” 댔습니다. 관찰 수업이 끝나고 실습에 들어갔습니다. 그 실습은 실로 “원숭이의 본성과 투쟁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구경꾼들 앞에서 우리 앞에 방치된 독주 병 하나를 손에 들고 배운 대로 했습니다.

마개를 뽑아 입에다 대고는 서슴없이, 입도 찡그리지 않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전문적인 술꾼처럼, 정말이지 맹세코 남김없이 마셔버렸고, 더 이상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예술가처럼 술병을 내던졌습니다. 비록 배를 쓰다듬는 일은 잊어버렸으나, 그 대신 저는 다른 것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졌기 때문에, 각설하고 ‘헬로우!’ 하고 소리쳤습니다.1)

인간처럼 침을 뱉고, 인간처럼 담배를 피우고, 인간처럼 독주를 마시고, 결국엔 인간의 말을 하게 된 원숭이를 궤짝 안에 가둬둘 수 있을까요? 빨간 페터는 우리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짐을 끄는 짐승들』에 나오는 침팬지 ‘부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1970년 미국의 영장류연구소에서 침팬지의 언어 능력을 연구하던 로저 파우츠 박사는 어린 부이에게 수어를 가르쳤습니다. “부이는 50개 이상의 단어를 외웠고, 이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 질문했으며,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 연구가 끝나고 파우츠 박사는 연구소를 떠났고, 부이는 동물 실험을 하는 곳으로 팔려갔습니다. 부이를 잊지 못한 파우츠는 1995년 방송 인터뷰에서 부이 얘기를 했고, 방송사 직원을 대동하고 부이를 만났습니다. 파우츠가 수어로 자신을 기억하느냐 묻자, 부이는 무척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머리 한가운데로 그었습니다. 그것은 25년 전 파우츠가 부이에게 붙여준 수어 이름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방송으로 나가자 부이를 풀어주라는 시청자들의 요청이 빗발쳤고, 부이는 동물실험실 우리에서 풀려나 비영리 동물보호소로 옮겨졌습니다. 우리 안의 원숭이가 우리 밖의 인간 사회로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인간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 낮에는 인간으로, 밤에는 동물로

하겐벡 증기선의 우리를 벗어났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함부르크에서 첫 번째 조련사에게 넘겨졌을 때 빨간 페터 앞에는 동물원의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버라이어티쇼 극장으로 달아났습니다. 극장에서 빨간 페터는 어떤 공연을 했을까요? 담배 피우는 연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침 뱉는 연기, 담배 피우는 연기, 독주 마시는 연기, ‘헬로우’라고 말하는 연기 등, 그가 동물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했던 인간 흉내를 무대 위에서 재연했을 겁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연기했습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원작으로 한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 포스터.

빨간 페터는 “반쯤 조련된 작은 암컷 침팬지”와 결혼도 했습니다. 낮에는 손님을 만나거나 연회에 참석하거나 학술 모임과 그 외 여러 가지 회합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한 후 밤늦게 집에 돌아와 아내 곁에서 “원숭이 식으로 편안함을 취합니다.” 보통의 인간 남성이 살아가는 모습이죠. 하지만 보통 사람과 다르게 그는 낮에는 아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길에는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조련된 동물의 착란 증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오직 빨간 페터만 알아보는데, 그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조련된 동물의 착란 증세란 어떤 걸까요?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게 아닐까요? 자신이 원숭이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럽기 때문에, 특히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낮에는 억압된 원숭이의 본성이 착란 증세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걸 빨간 페터만 눈치챌 수 있고, 차마 견디기 힘들다는 건 그 역시 정체성의 분열을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빨간 페터는 그런 분열을 ‘낮에는 인간으로, 밤에는 원숭이로’ 살아가는 이중생활로 풀어냈습니다. 다른 “조련된 동물”이 정체성의 분열을 자기가 ‘동물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과 달리, 빨간 페터는 그걸 ‘동물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한’ 이중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의 정체성만 고집하면 ‘동물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럽겠지만, 이중의 정체성을 긍정하면 낮에는 인간으로 밤에는 동물로 생활하며, 인간사회의 일원이 된 동물로서 학술원에 보고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는 도달하려고 했던 것에 도달한 셈입니다. 그것이 애쓸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덧붙인다면, 저는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단지 견문을 넓히고자 할 뿐입니다. 저는 다만 보고할 따름입니다. 고매하신 학술원 회원 여러분들께도 저는 다만 보고를 드렸을 뿐입니다.3)

빨간 페터는 동물 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으로 변신했습니다. 우리에 갇히지 않고 우리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는 목표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누군가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냐고 힐난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정체성만 고집하는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되려고 한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자기 세계를 인간 사회로 넓히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인간으로 잘 변신했는지 평가받기 위함이 아니라, 원숭이 우리로부터 인간 사회로의 탈주 과정을 보고할 뿐입니다.

 

1)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 1997, 266쪽.

2)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이마즈 유리 옮김, 오월의봄, 2020, 107쪽.

3)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 1997, 269쪽.

필자 소개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자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2020년에 『‘장판’에서 푸코 읽기』를 썼고, 2024년 1월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 장애학자가 들려주는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노들야학 영화반에서 학생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다가 1년 만에 철학 수업으로 돌아왔다. lizo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