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 오발탄처럼 빗나가던 장애인운동의 방향을 잡아주어 고맙습니다 / 박경석
2일 시청 앞에서 ‘장애시민장’ 엄수 오발탄 같았던 장애인운동을 답습하던 중 ‘탈시설권리’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 형님 탈시설은 ‘치열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편집자 주] 2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앞에서 ‘시설수용에 저항한 탈시설 장애인 김진수 장애시민장’이 엄수됐다. 이날 영결식에서 고인과 한평생 탈시설운동을 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2009년 6월 4일,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 베데스다요양원에서 중증장애인 8명이 탈시설했다. ‘마로니에 8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62일간 노숙농성을 하며 서울시에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을 요구했다. 그 싸움을 시작으로 서울시엔 전국 지자체 최초로 체험홈을 비롯한 탈시설 제도가 만들어졌다. 당시 59세의 고인은 ‘마로니에 8인’의 맏형이었다.
최근까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탈시설 투쟁에 힘써온 고인은 지난 7월 31일,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진수 형님,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님, 우리는 2008년 1월 4일, 석암재단 베데스다요양원 시설비리 인권침해 투쟁 기자회견으로 양천구청에서 처음 만났지요.
형님, 그때 만남에 대해 2022년 1월 7일에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더군요.
“내가 활동한 것이 박경석의 꼬임에 속아서 활동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활동한 것은 힘은 들었지만 내가 좋아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다. 집회나 기자회견에 나가면 모든 동지들을 만날 수가 있어서 힘이 부칠 때에나 몸이 아플 때에도 동지들을 만나면 아프던 것도 잊어 버려서 너무 좋았다.
내가 언제까지 활동할지는 몰라도 힘이 있는 그때까지 할 것이다. 이동권, 탈시실지원법 제정,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이 되고, 전국에 있는 시설이 모두 폐쇄되는 그때까지 언제 될지 몰라도~. 모든 것이 다 되는 그날까지 힘이 있는 그날까지 동지들과 같이 투쟁할 것입니다. 투쟁. 투쟁!”
형님이 남기신 글을 오늘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나 형님 가시는 마당에 말씀을 바로 드리려 합니다.
형님, 그때 제가 형님을 꼬신 것이 아니라 형님의 꼬임에 제가 빠졌잖아요. 맞잖아요.
형님, 제가 그때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저는 형님이 꼬신 그 투쟁을 피할 수만 있었다면 대충 시늉만 하고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다’고 하면서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서 살짝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대충 시늉만 하려 했던 마음을 이제 가시는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못 보내드릴 것 같아 고백합니다.
죄송했습니다. 더 진심을 다해 함께 하지 못했던 저의 이중적인 마음을 너그럽게 웃어주시고 한번 봐주십시오.
그런데 형님. 저는 형님 만나기 전까지 오발탄 같았던 장애인운동을 답습하였답니다. 그리고 애써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탈시설권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88년에 장애인운동을 만났습니다. 그때 장애인운동은 빨갱이 같은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쌍해하고 장애를 부끄러워했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는지, 어머니의 눈물 속에 재가장애인으로 헤매다 비장애인처럼 살기 위해 뒤척였던 세월이 허망하고, 제 삶이 허망한 삶의 부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형님은 1987년에 사고를 당하고, 1989년에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베데스다요양원으로 들어가셨더군요.
저는 운명처럼, 그리고 연인처럼 1993년에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나 장애인운동을 풍경화 그림처럼 하려 했습니다.
그때는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와 시설비리 척결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장애인거주시설 그 자체가 감옥이고 중증장애인들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라는 형님과 같은 부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답니다.
그러나 형님. 그러니까, 형님께서 2009년 6월 4일 ‘마로니에 8인’의 대빵이 되어 베데스다요양원에서 탈출하여 마로니에공원에 거주시설에서 살던 가구들을 하나하나 부려놓을 때 제 눈앞은 캄캄하였답니다.
모세 같았던 형님께서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땅으로 가자며 동료 7인을 꼬셔서 탈출했는데 그 앞에는 홍해가 있었고 40년의 광야 생활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형님께서 ‘시설은 감옥 같다. 밖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사람 사는 게 아니냐’며 홍해 앞에서, 메마른 사막 같은 광야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했던 저에게 탈시설이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의 종류가 아니라 치열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답니다.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단지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만 있다.” (고병권, 《묵묵》)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듣지 않았고 듣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오발탄처럼 엉뚱한 곳을 향해 가려 했던 것 같아요.
형님이 싸워오신 그 길과 역사는 바로 지역사회였습니다.
형님이 계셨던 장애인거주시설 베데스다요양원은 투쟁의 과정에서 ‘향유의집’으로 개명되었고 드디어 2021년에 폐쇄되었잖습니까.
그리고 김정하 동지가 형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폐쇄된 그 공간에는 ‘여기가’라는 장애인지원주택이 건설되고 있잖습니까.
‘여기가’는 2025년 2월에 완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완공을 같이 보지 못하고 보내는 지금이 너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
형님. 형님은 나의 모세입니다. 알지 못했던 것, 아니 어렴풋하게 알고 있지만 보지 않으려 했고 피했던 진실을 알게 해주었답니다.
듣지 않으려 했는데 투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광야에서 헤매고 불평할 때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