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복과 정인택의 희망원 / 전근배

[칼럼] 전근배의 받아쓰기

2024-09-30     비마이너

“순나가 삼일 전에 나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 […] 아무래도 희망원에 잡혀갔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불쌍한 순나가 어서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6월 15일 토요일 맑음)

“「검」을 팔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읍니다. […] 멍하니 바라보면서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나의 멱살을 잡고 『너 「검」파는 아이제?』하고 끌고 가기에 『와 이카십니까?』하니 『잔소리 말고 따라와.』하고 끌고 가기에 명찰과 옷차림을 보니 시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읍니다. […] 또 희망원에 잡혀가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읍니다.” (6월 16일 일요일 흐림)

“학교에서 돌아오니 순나가 집에 있었읍니다. 나는 순나를 보니 가슴이 울렁했읍니다. 어제 내가 희망원에 잡혀 갔을 때 순나를 거기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순나가 무사히 집에 돌아왔기에 기쁜 얼굴로 『순나야 우예 도망 왔노?』하니 『[…] 오늘 아침 밥 먹을 때 철조망 뚫린 구멍으로 빠져 나와 도망쳤다. […] 오빠 나 내일부터 학교 갈란다. […] 사흘이나 결석했다. 선생님 마이 걱정할끼다. 거쟈?』” (6월 17일 월요일 비)1)

“〈희망원〉에도 여러 번 잡혀 갔다가 도망쳐 나오는데, […] 윤복이는 이런 당국의 보호조차 동생들을 굶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 잡혀 들어갈 때마다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고, 법과 질서를 무시하면서 〈잡으러 다니는 아저씨〉들을 피해 검 장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윤복이가 검을 팔고 밥을 얻으러 다니고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신문에 나게 되어 대구시에서 〈최고 높은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부시장, 사회과장 이런 사람들이다. 이런 〈높은 사람들〉이 검을 팔아서 살아가는 윤복이를 붙잡아 희망원에 끌고 가도록 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윤복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기문에는 그런 비판적인 말이 일체 없다. 윤복이는 교장실에 불려가서 그 높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사진도 찍고 하여 기분이 좋아 그 날은 공부도 잘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도 윤복이는 검을 팔러 갔고, 그리고 또 시청직원에게 붙들려 희망원에 가게 된 것이다.”2)

1965년 5월 5일 어린이날 개봉한 이윤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포스터

1965년 5월 5일 어린이날, 영화 하나가 개봉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며 껌팔이와 동냥으로 동생들과 아버지를 보살피는 소년 가장 이윤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대구 중구에 위치한 명덕국민학교 4학년 윤복의 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당시 어려운 시대를 겪어내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이다. 그런데 윤복의 일기에는 희망원이 수차례 등장한다. ‘높은 사람들’은 낮이면 학교를 찾아와 불우한 환경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 윤복을 칭찬하며 사진을 찍었지만, 밤에는 명랑 사회를 위한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서 윤복과 동생을 붙들어 시설로 집어넣었다.

희망원은 “자립생활치 못하거나 또는 무의무탁하여 배회하는 고아, 노인, 불구자와 걸인 등 유랑자를 수용보호, 갱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58년에 대구시가 설치한 집단 수용시설이다. 윤복의 일기가 영화로 개봉되기 전, 희망원 측은 영화가 사실을 허위로 조작했다며 내무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영화 촬영을 직접 희망원에서 하고자 한 영화사의 제안도 희망원을 보호양육시설이 아니라 강제 수용시설로 그린다며 거부했던 터였다. 영화의 흥행 이후 그 이듬해인 1966년 희망원 원장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11편의 특별 연재를 했는데, 희망원에 대한 그와 윤복의 서사는 자못 상반된다.

“희망원에 와보이 앞이 캄캄했다. 병동은 손질을 하지 않아 비가 새고 보잘 것 없었으며 사무실에는 비품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희망원 주변은 공동묘지를 파헤쳐놓은 그대로였고 나무하나 없었다. 밤에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40~50명의 원생이 있었으나 모두 깡패, 날치기로 희망원은 날치기와 절도범 등 범죄자의 소굴로 전락해 있었다. 사흘이 멀다하고 원생 간에 폭행과 난투극이 벌어졌고 심지어 강간 등의 파렴치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 나는 그들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 말썽꾸러기 원생들에겐 매일 밤 잠자리에 찾아가 페스탈로치나 성경의 탕아 이야기를 들려주며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면서 매질까지도 사양치 않았다. 이러다가도 그들의 걸어온 생활기록을 듣고 참회하는 것을 보고 부둥켜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그 몇 번이었던가. […] 거리로 나가 방황하는 자를 설득 또는 반강제로 데려다 수용시켰다. 어느덧 원생은 1천여 명에 달했다. 젖떨어진 기아, 미아, 장님, 꼽추, 반신불수, 정신병자, 폐결핵자, 노약자등 영아로부터 칠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원생이 들어왔다.” (『경향신문』, 1966년 10월 6일자 정인택의 글 중에서)

그럼에도 이윤복과 정인택의 글이 해방 이후 국가에 의해 자행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수용과 감금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행히 얼마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이뤄진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확인하여 발표했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1년 구걸행위자보호대책, 1987년 보건사회부훈령 제523호 등 부산 형제복지원과 동일한 정부 시책에 의해 운영된 희망원에서는 경찰·공무원 등에 의한 강제 수용, 본인 의사에 반하는 ‘회전문 입소’, 폭행 및 가혹 행위, 독방 감금, 강제 노역 등의 인권 침해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강제 수용 이후 신규 입소자를 적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감금실인 ‘신규동’을 운영했으며, 평소에는 규칙을 위반한 이들을 격리시키는 독방으로 활용했다. 당사자의 진술을 ‘신빙성이 없다’거나 ‘횡설수설한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정신병원에 격리 조치하는가 하면, 임신 상태로 입소한 여성이 출산할 경우 당일 또는 하루 만에 해외입양 알선기관으로 전원 조치하고 친모의 친권포기서를 받기도 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윤복의 일기를 두고 어른들이 쓴 대다수 아동문학 작품보다 훨씬 값진 작품이라고 평가했는데, 그가 보기에 아동문학은 대체로 아동을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동시고 동화고 소설이고 할 것 없이 (아동문학이) 천진난만한 동심을 그리는 것”에 머무는데, “그 천진난만의 동심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마음 쓸 필요가 없는 천사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사실 정인택이 언론에 열한 번이나 자신의 글을 연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경향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아 제정한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의 첫 번째 대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당시 이 상의 수상자는 박정희 부부에 의해 청와대로 초청될 만큼 각별한 위상을 가졌다). 개원 이래 1966년까지 약 2만 명의 무의탁자와 불구자를 보살펴 온 공을 치하하며 국민들은 그에게 희망의 상을 수여했다. ‘이윤복들’에게 희망원은 ‘잡혀가는 곳’, ‘끌려가는 곳’, ‘도망쳐 나와야 하는 곳’이었지만, ‘정인택들’에게 희망원은 (그의 연재 글 제목처럼) ‘겨자 씨 한 알’의 믿음만 갖고서도 다시 갱생을 꿈꿀 수 있는 ‘약속의 장소’이며 그들을 보살피는 이들이 가득한 ‘천사들의 세계’였던 셈이다.

9월 13일. 대구시청앞에서 열린 대구시립희망원 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지원정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 사진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추석을 앞두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든 시설 수용 피해 생존자들은 대구시청 앞에 섰다. 이들은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홍준표 시장이 시립시설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해줄 것을 바랐다. 아직도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하여 희망원에서 있었던 일들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나서줄 것을 촉구했다. 이날 전봉수는 생전 처음 집회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가족과 함께 살던 그는 1998년 천안역에서 납치되어 희망원으로 붙들려 왔다. 2022년 탈시설 지원기관인 나로센터를 통해 희망원을 벗어나기 전까지, 고향 마을, 부모, 형제의 이름을 정확히 말함에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준 사람은 없었다. 24년 동안 찾지 못한 가족을 찾는 데에는 놀랍고 허무하게도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그가 말한 희망원의 퇴소 이유는 명확했다. “살아남으려고.”

9월 13일. 대구시청앞에서 열린 대구시립희망원 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지원정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시설 수용 피해 생존자인 전봉수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희망원의 진실은 아직도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는 정해진 시간적 범위의 한계로 5년 이내 발생한 인권 침해 행위만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검찰 수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특정되어야만 요건을 갖추기에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을 다루지 못했다.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는 ‘형제복지원’이 단수가 아닌 복수이며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과제도 남겼다. 2017년 대구시가 희망원의 인권 유린 및 비리 사태에 대한 해결책으로 발표했던 ‘혁신 대책’에 의하면, 시립시설인 희망원은 2030년까지 수용시설이 아닌 시민들의 복지 이용시설로 변화해야 한다. 이제는 여기에 시설 수용 생존자 중심의 진상 규명과 과거사 청산이라는 배경이 맨 윗줄에 추가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1) 이윤복, 『저 하늘에도 슬픔이』, 신태양사, 1965.

2) 이오덕, 「동심의 승리-이윤복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나타난 동심론」, 『창작과 비평』 통권 38호, 1975년 겨울.

 

* 필자 소개

전근배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대학교 장애학연구소, 탈시설정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종종 연구도 한다. 온전히 받아쓰는 일을 활동과 연구의 주된 목적이자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rmsqo129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