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1천 명, 집 4만 채 소유… 주거빈곤층은 180만 가구
1017 빈곤철폐의 날 올해 구호 ‘이윤에 떠밀리는 도시를 구출하라’ 집 부자 상위 1천 명, 주택 42,000채 사들여 쪽방, 고시원 등 주거빈곤층은 180만 가구 정부는 다주택자 감세 추진 의료급여 개악에 매입임대주택 예산 삭감까지
매해 10월 17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이다. 한국에서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 반빈곤운동단체들이 2005년부터 ‘1017 빈곤철폐의 날’로 정해 투쟁 중이다.
올해 구호는 ‘이윤에 떠밀리는 도시를 구출하라’다. ‘1017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아래 조직위)’는 17일 오전 10시,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난한 이들을 도시에서 내쫓는 폭력에 단호히 맞서며 평등만이 대안이라고 선언한다”고 외쳤다.
- 2개 기조와 9개 요구안 “도시는 모두의 것, 평등 사회로”
조직위에 따르면 올해 빈곤철폐의 날 투쟁에서는 ‘이윤에 밀려나는 도시를 구출하라’는 슬로건 아래, 2개 기조를 바탕으로 한 9개 요구안을 제시한다.
2개 기조는 △도시는 모두의 것, 이윤이 아니라 주거권을 보장하라 △기후위기 시대, 불평등을 철폐하고 생명과 안전, 평등 사회로 나아가자 등이다.
9개 요구안은 △노점단속 특별사법경찰 해체, 노정삼 생계보호특별법 제정 △강제퇴거 금지, 선대책·후철거 순환식 개발 시행 △전세사기·깡통전세는 사회적 재난, 세입자 권리 강화 △장애인권리예산을 동반한 7대 장애인권리입법 1년 내 제·개정 △쪽방지역 공공개발 이행, 공공임대주택 확대 △홈리스를 겨냥한 차별과 배제 중단, 공공장소 이용 권리 보장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의료급여 개악 철회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사회서비스·돌봄·의료 공공성 강화 △불안정노동 철폐, 모든 사람의 노동권 보장 등이다.
- 생계 터전 짓밟힌 철거민, 투쟁했다고 집유 1년 6개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에서 9가지 요구안을 자세히 설명했다.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 조직국장은 ‘강제퇴거 금지, 선대책·후철거 순환식 개발’ 요구안을 설명하며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라고 성토했다.
김 국장은 “죄 한 번 짓지 않은 철거민이 어제(16일) 법원에 가서 죄인인 양 집행유예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수십 년 동안 닦아온 생계의 터전을 짓밟는 사업 승인에 반발했다는 이유다. 자본과 권력은 철거민에게 특수공무집행방해라는 법의 굴레를 씌운다”고 비판했다.
또한 “철거민은 ‘개발을 하려거든 생존권을 보호하고 해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 생존권을 보장하고, 이주 대책도 마련하고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고 외쳐 왔다”며 “그러나 자본과 권력은 철거민의 생존권을 뺏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철거민은 평생 벌어 모은 작은 집마저 빼앗기고 투쟁 중”이라고 규탄했다.
- 역대급 공공임대주택 공급? 알고 보니 ‘빌라시장 활성화’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쪽방지역 공공개발 이행, 공공임대주택 확대’ 요구안을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기자회견 중인) 바로 이곳 용산은 빈곤과 불평등의 상징적 공간이다. 지난 1년간 전국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아파트의 실거래가 순위 1위부터 5위 중 세 군데가 용산에 있다. 나인원 한남 220억 원, 한남 더힐 180억 원, 포레스트 한남 120억 원. 이렇게 비싼 아파트가 바로 이곳 용산에 있다”며 “그런데 용산은 전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인 동자동 쪽방촌이 있다. 여기 1천 세대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이 말한 동자동 쪽방촌은 2021년, 공공개발이 발표됐지만 3년이 지난 현재까지 첫 삽은커녕 지구지정조자 고시되지 않았다. 민간개발을 주장하는 토지주와 건물주의 반발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지난 8월, 주택공급 정책을 발표하면서 “역대급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 서울시에서는 기존 주택을 무제한 매입해 공공임대주택으로 공급하겠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환영할 만한 정책이지만 이 위원장은 “씁쓸하다 못해 화가 나고 모욕을 당한 기분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정부 정책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아니라 ‘빌라시장 활성화’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 아파트값은 오르는데 빌라는 값이 잘 오르지 않으니 빌라 시장이 정상화될 때까지 무제한 매입하겠다는 취지다.
이 집행위원장은 “해당 정책 발표 소식을 듣고 매입임대주택 예산이라도 좀 늘어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을 보니 다음 해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더 삭감됐다. 매입임대주택 예산은 3조 원 가까이 삭감됐다”며 “정부는 부동산 시장 분위기를 띄워서 (빌라의) 가격이 올라가기를 기대하고 실제로는 공공임대주택 공급 의지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라고 분노했다.
- 머물 곳이 공공장소뿐인데… 늘 강제 퇴거당하는 홈리스
‘홈리스를 겨냥한 차별과 배제 중단, 공공장소 이용 권리 보장’은 홍수경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가 증언했다.
현재 민간기업인 서울스퀘어(구 대우빌딩)는 서울역 앞 지하보도의 홈리스들을 강제 퇴거시키고 있다. 해당 보도는 서울시 중구 관할의 공공장소임에도 서울스퀘어 영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홈리스를 쫓아내는 중이다.
홍 활동가는 “홈리스들은 ‘(지하보도에) 앉은 이를 뽑아내듯이, 물건 치우듯이 퇴거시킨다’고 전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모멸감을 겪어왔다. 서울시는 (서울스퀘어의 강제퇴거 행위가) 부당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 활동가는 또 “빈곤 때문에 일상생활 대부분을 공공장소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표적이 된다. 공공장소는 홈리스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마지막 체류 공간이다. 그곳에서조차 소리 소문 없이 존재를 삭제당한다”고 규탄했다.
- 의료급여 개악, 의료 빈곤층에게 더 많은 의료비 부담을 물리겠다는 것
정성식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요구안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의료급여 개악 철회’를 설명하며 “(정부는) 의료급여가 왜 존재하는지, 그 본질적인 목표를 망각했다”고 개탄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25일, 다음 해부터 의료급여 수급자의 본인부담 체계를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에는 정해진 금액만 내면 되는 ‘정액제’로, 의료급여 1종 수급자의 경우 의원 외래 진료 시 본인부담금 1천 원, 병원·종합병원은 1,500원, 상급종합병원은 2천 원을 내면 됐다.
다음 해부터는 진료비 2만 5천 원이 넘어가면 정률제, 즉 진료비 비율에 따라 본인부담금을 지불해야 한다. 1종 수급자는 진료비가 얼마가 나오든 1천 원에서 2천 원만 내면 됐다. 정률제가 적용되면 의원 외래 진료는 진료비의 4%, 병원·종합병원은 6%, 상급종합병원은 8%로 늘어난다.
정 연구원은 “복잡한 내용이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의료 빈곤층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의료비 부담을 물리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 연구원은 또 “의료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건강보험과 별도로 만든 제도가 의료급여다. 건강보험보다 공공성이 높은 제도다. 정부가 임의로 (의료급여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개악한 것은 우리 모두가 막아야 할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의료급여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수급자의 비용의식을 제고하고 합리적 의료이용을 유도하고자”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의료 쇼핑’, ‘도덕적 해이’ 등 마치 의료급여 수급자가 제도를 악용한다는 식의 관점이 담긴 발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 연구원에 따르면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 의료’ 경험이 건강보험 가입자에 비해 높다고 한다. ‘미충족 의료’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비용 부담 등으로 병원에 제때 못 간 경험을 의미한다.
정 연구원은 “정액제 때문에 의료비 본인부담금이 적어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고 한다면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 의료 경험이 당연히 낮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의료기관은 의료급여 수급자를 부담스러워하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정부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부양의무자기준의 경우 주거급여와 교육급여에선 폐지됐고 생계급여에선 완화됐다. 그러나 의료급여는 완화조차 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공약으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걸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현 정부에서도 생계급여 완화만 추진 중이다.
정 연구원은 “(정부가)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돈(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예산 논리로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행태를 규탄했다.
또한 “연구해 보니 의료급여를 받아야 하지만 못 받고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의 수가 80만 명이 넘는다. 이 사람들은 건강보험료 체납자가 돼서 의료이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데 정부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 공공돌봄 제공하던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살려내라
마지막으로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사회서비스·돌봄·의료 공공성 강화’에 대해서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아래 서사원) 해고노동자 당사자인 오대희 공공운수노조 사회서비스원지부 지부장이 증언했다.
2019년 설립된 서사원은 활동지원사, 요양보호사 등 돌봄노동자를 서울시가 직접 고용해 최중증장애인 등 민간기관이 기피하는 이용자에게 돌봄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지난 4월,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의원들이 발의한 ‘서사원 조례 폐지 조례안’이 가결됐다. 3개월 만인 지난 7월, 서사원은 폐지됐다. 이로써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중증질환자 등에게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돌봄’은 사라졌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6월 열린 ‘서울시 공공돌봄위원회’에서 “서사원은 본연의 설립 목적과 달리 공적 사회서비스 제공기관으로서 공공돌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 설명하진 않았다.
이에 공공운수노조 사회서비스원지부는 지금까지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오 지부장은 “정권이 바뀌자 공공돌봄을 제공하던 서사원은 졸속 해산됐다. 돌봄노동자 400여 명이 대량 해고됐다”고 성토했다.
또한 “서사원은 공공성을 바탕으로 양질의 돌봄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안정적인 근로환경을 통해 돌봄노동자에게 정당한 노동조건을, 시민에게는 질 좋은 복지서비스를 보장해 왔다”며 “그러나 서울시는 경제적 효율성을 앞세워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을 해체했다”고 비판했다.
오 지부장은 또 “공공돌봄은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필수적이고 중요한 사회적 가치다. 따라서 서사원 폐지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서사원을 살려내서 공공돌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직위는 기자회견문에서 “주거빈곤층이 180만 가구에 달한다. 반면 지난 5년(2019년~2023년)간 집 부자 상위 1천 명이 사들인 주택은 42,000채고 서울시 임대소득 상위 0.1%의 평균 임대소득이 13억 원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다주택자 감세를 추진했고 지난해 집 부자에게 3조 원의 세금을 깎아줬다”며 “우리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도시 중심부에서 가난한 이를 축출하는 폭력을 거부한다. 가난하고 차별받는 이가 연대해 평등만이 대안임을 선언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모였다. 우리는 빈곤을 만들어내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위는 19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 보신각에서 ‘1017 빈곤철폐의 날 대회’를 열고 조계사, 광화문 등을 거쳐 도심을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