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독일·프랑스에서 확인한 ‘자립생활’ 이념의 중요성 ② / 이정한
[전장연, 유럽에 가다: 파리 특사단 이야기 ②-2] 에티엔 활동가를 통해 프랑스 장애운동 역사를 배우다 핸디소셜, ‘비장애중심주의 철폐’를 위한 투쟁 다시, ‘자립생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
[편집자 주] 지난 8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을 파견했다. 40여 명의 장애인·비장애인으로 구성된 특사단은 8월 17일부터 8월 31일까지 노르웨이 오슬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를 순회하며 한국의 장애인권리 약탈 현실을 알렸다.
특사단은 유럽 3개국에서 포체투지(기어가는 오체투지)·다이인(die-in) 행동 등 총 24회의 직접행동과 투쟁, 20개의 장애인권 관련 기관·단체 방문 및 면담, 2번의 장애인인권영화제를 진행했다.
특사단은 왜 유럽까지 가야 했을까. 어떤 목표를 갖고,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유럽에 간 것일까. 그곳에서 무슨 경험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을까. 특사단의 여정을 생생히 듣고 기록하고자 다양한 특사단원의 이야기를 8회에 걸쳐 연재한다.
①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세상”을 위한 노르웨이의 장애인 교육 / 조희은
②-1 노르웨이·독일·프랑스에서 확인한 ‘자립생활’ 이념의 중요성 ① / 이정한
②-2 노르웨이·독일·프랑스에서 확인한 ‘자립생활’ 이념의 중요성 ② / 이정한
- 에티엔 활동가를 통해 프랑스 장애운동 역사를 배우다
프랑스에서는 IL(Independent Living, 자립생활) 이념의 활동을 만났다. 2004년 설립된 Coordination Handicap et Autonomie(CHA, 장애인자립연합)의 Etienne Membrives(에티엔 멤브리브스) 대표는 우리와 만나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그는 프랑스 장애인 운동의 굵직한 역사들을 전해주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가로막는 투쟁을 했던 단체, 자립생활 지원 서비스의 부재로 “차라리 내 아이를 시설에 가두라”며 반어적 시위를 했던 부모들의 투쟁, 활동지원 제도의 변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2005년 프랑스에서는 장애인권리보장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애인의 권리와 기회 평등, 사회 참여 및 시민권 보장을 위한 법’(Loi pour l’égalité des droits et des chances, la participation et la citoyenneté des personnes handicapées)이 제정됐다. 이 법은 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위한 제반 권리들을 아우르고 있는데, 모든 공공시설의 10년 내 100% 접근권 보장, 통합교육 원칙, 의무고용 제도를 비롯해 자립생활 권리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10년 내 접근권 보장을 결국 지키지 못해 2015년에 이르러 다시 10년을 연기했다. 한편 해당 법에서 활동지원에 관한 권리도 명시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 정확히 동일한 논리로 유예되고 있는데,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예산이 없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의지 부족의 말에 불과하다.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도 그 법을 준수하지 않는 이들과, 법에서 권리를 명시함에도 마땅히 제도를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을 통해 우리는 법이 결코 모든 것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보편적 원칙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법은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05년 권리보장법으로 활동지원이 제도화된 후 24시간 보장도 형식적으로 가능하지만 충분히 받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에티엔의 설명이었다. 특히 프랑스에도 거주시설 거주 인구가 20만을 넘는데, 정부의 비용 절감 의지와 시설 종사자의 탈시설 반대, 시설화에 찬성하는 보수적 장애 부모 단체들의 강한 정치력이 맞물려 탈시설 운동은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자립생활을 지원한다는 프랑스의 거대한 조직들도 규모의 확장에 따라 이제는 보수화된 채 거주시설을 운영하거나 서비스 제공만 하고 있다.
- 핸디소셜, ‘비장애중심주의 철폐’를 위한 투쟁
에티엔의 소개로 만난 Handi-Social(핸디소셜)은 2001년 Odile Maurin(오딜 모린)을 비롯한 장애 당사자 4명이 설립했다. 핸디소셜은 당초 개개인에 대한 권익옹호 활동과 개인 지원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결국 구조적인 문제를 타개하지 않고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핸디소셜은 Anti-validisme(비장애중심주의 철폐)를 모토로 내걸고 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가 위반한 10년 내 접근권 보장, 신규 주택에 대한 편의시설 설치조차 예산을 이유로 삭감하는 등 여러 현안들을 선전하고 되찾기 위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막거나 TGV 선로를 점거하고, 심지어 활동 지역의 공항 활주로를 점거하며 투쟁했다.
동료상담과 권익옹호 활동, 비폭력운동을 통해 프랑스 정부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을 촉구하며, 완전한 탈시설·자립생활 권리와 ‘온전한 시민권’(citizens à part entière)을 통해 비장애중심주의를 철폐하는 것이 핸디소셜의 목표라고 오딜은 말한다. 물론 이러한 투쟁에 여러 소송과 손해배상 청구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역의 운동 조직으로서 지역사회 당사자들과 여러 투쟁 및 권익옹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확고한 교훈을 주고 있다.
프랑스의 장애인운동을 위해 설립했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며 이념과 정체성이 희석되고 정부와 타협적인 행보를 보이거나 거주시설을 운영하기도 하는 다른 거대 조직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거대한 정치력이나 자본이 아니라 명료한 이상을 위해 헌신하는 중증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들이라는 것을 핸디소셜이 증명하고 있었다. 19년째 유예된 100% 접근성에 대해 보수 장애 단체들은 아직 더 기다리자고 말하지만, 핸디소셜은 수년 전부터 지역과 정부를 상대로 온전한 시민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 다시, ‘자립생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및 운동은 다소 자본주의적 위치에서, 소비자로서의 장애인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20세기 중후반 미국의 맥락을 참조해야 한다. 외부로는 소련과의 체제 경쟁, 내부로는 흑인민권운동 등 자유주의적 시민권 운동이라는 정세 속에서 장애인운동 역시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소비자주의가 권리를 위한 개념적 기틀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장애인도 시민으로’보다 ‘장애인도 소비자로’가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구호였을 것이다. 장애인도 다른 소비자들과 마찬가지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주거 공간을 선택할 수 있다, 교육 시장과 노동 시장에의 참여가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매우 직관적이며 유효한 요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미국식’ 장애인자립생활의 개념을 지금 우리가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미국에서 시작된 이후 몇 개의 국가로 확산되었으나 전 세계적 흐름은 아니었다. 지금 세계에 ‘센터’라는 이름의 조직을 가진 국가는 몇 개 없다. 미국과 일본, 한국을 비롯해 영국·독일 정도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간판을 가진 몇 개의 국가일 뿐이다. 그러나 ENIL(유럽자립생활네트워크) 등 초국적 자립생활 조직의 회원 단체에는 단순히 센터만 소속되지 않는다. 센터는 일부일 뿐, 훨씬 더 많은 고유한 조직들이 IL 이념을 내세우며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IL이념이 단지 ‘센터’로만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기표보다 기의가 더 중요한가? 말하자면, IL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관은 센터가 아니라 복지시설이어도 괜찮은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니 간판의 이름이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면, 그 논리적 전개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복지시설’이라는 이름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센터 말고 시설’이 지시하는 것은 언어만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념·이념은 언제나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데, 한국에선 명확하게 IL이념이 IL센터를 통해서 전개되고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직업재활시설, 거주시설 등의 복지시설들은 장애인이 주체로 서는 공간이 아니라 서비스의 수혜 대상으로 보고 있다. 2024년의 IL센터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서 센터가 시설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그 서비스의 방향성을 뒤집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IL센터라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진정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그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 자립생활 이념, 즉 중증장애인 당사자의 주체성 및 자주성 확보인 것이다.
서비스 제공의 역할 강화를 위해 장애인자립생활지원시설의 형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장애인자립생활 조직이 서비스 제공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그 어떤 배경도 없는 오직 사적 지향에 다름 아니다. 서비스 제공의 형태가 현행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한 부분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서비스가 언제나 ‘비장애인에게 수혜받는’ 형태였기 때문에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통한 보다 주체적이고 권리적인 형태의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서비스 제공 역시 우리의 권익옹호에 기반한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서비스 제공의 기능 강화를 위해 각종 조건과 규칙을 끼워 넣으며 진입을 제한한다면, 자주성이라는 자립생활 이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중증장애인 당사자의 자주적 조직이라는 정체성이 단순히 ‘일정 비율의 장애인 종사자’로 치환될 수는 없다. 이를 포함해 지역사회 안에서 자립생활의 필요성을 알려 내고,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담보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복지관에 불과하다.
오직 서비스 중개만을 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율로바는 서비스 제공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IL이념을 내세우며, 당사자의 권리에 기반한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중증장애 당사자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다. 독일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소속 센터들은 동료상담을 원칙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IL센터는 없으나 당사자 중심의 권익옹호 조직과 서비스 전달 중심의 조직 간의 이원화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권익옹호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는 자주성과 직접 운영을 사수하며 투쟁하고 있으며, 서비스 제공 중심의 기관은 결국 서비스만 남긴 채 자선 단체에 가까운 기능을 하고 있다.
3개국 모두 어떠한 시험의 시간에 놓여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운동 단체들은 그 운동성을 유실하고 있으며, 서비스 제공의 형태가 커지며 이제는 거주시설을 운영하는 기관도 있다. 해당 서비스 영역에서의 독보적인 정치력을 확보한 만큼, 오히려 그로 인해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이다. 서비스 제공의 중개 역할을 함으로 인해 해당 서비스에 대한 개선과 당위적 요구를 상대적으로 하기 어려워지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와 자주성을 사수하며 IL 이념을 공공히 하는 조직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물론 모든 조직이 서비스 제공의 역할을 한다고 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향과 이념을 명확히 하여, 서비스의 물화가 보다 권리적으로 자리 잡도록 요구하는 것이 또한 중개기관의 고유한 역할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의 고유한 정체성이 나타난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공간이 운동성과 투쟁력을 갖춘 나라는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이번 특사단의 연수를 통해 확인한 것은 독창적인 한국의 정체성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이다. 연수를 통해 교류한 단체 모두 한국의 투쟁력과 조직력에 감탄하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등의 발명에 매우 놀라워했다. 정부에 의해 주어지는 제도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필요한 제도를 요구하며 만들어가는 한국의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독일장애인인권영화제를 진행했던 베를린의 훔볼트대학교는 여러 학자들이 수학한 곳으로 유명하다. 훔볼트 출신의 여러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다. 자본주의가 구성하는 계급 구조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했던 마르크스는 유명한 테제를 남겼는데, 훔볼트 대학의 건물 한 벽에는 마르크스의 그 글귀가 쓰여 있다: “Dle Philosophen haben die welt hur verschiedeniaterprelert es kommt aber daraul an Sie Zu Verandern.”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여러 문장들 중에서도 특히 힘 있는 이 글귀는 사회 변혁을 꿈꾸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그리고 이 글귀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주요한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이 훔볼트 대학을 설계한 이의 의도일 리는 없을 것이고, 독일 사회, 혹은 전 지구적 비장애중심주의의 문제를 드러내는 하나의 코믹한 현장이 된다.
훔볼트 대학의 정문을 열면 바로 정면에 큼지막하게 각인된 마르크스의 글귀가 반긴다. 그런데 이 글귀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보행상 장애인은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의도한 바일 리가 없는 이 현장은 실로 우리의 과제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벽에 새겨진 글씨에 다가갈 수 없는 여럿의 계단마다 과도할 정도의 ‘계단 주의’ 문구가 붙어 있는 것까지, 이 코믹한 현실이 우리에게 명징한 과제를 던져 준다.
마르크스와 그 혁명의 정신을 이었던 이들은 자본가 계급으로부터의 해방-노동해방의 혁명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 그 혁명이 다양한 소수자들의 해방까지도 담보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따라붙었다. 다시 말해 자본가로부터 노동자는 해방될지언정, 장애인은 ‘노동자’가 될 수조차 없으며, 이 ‘사회’에 속할 수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그 혁명은 과연 우리의 해방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마르크스는 바로 저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계단을 주의하라,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자립생활에 대한 수많은 설명 중에서도 간결한 하나의 문장을 남긴다면, 그것은 이 문명의 재구조화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회나, 조금 더 많은 복지, 조금 더 많은 동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수급비나 조금 더 증가한 일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지하철 역사에 100% 엘리베이터가 생기더라도,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가 1만 개 생기더라도, 장애인권리예산이 100% 반영되더라도 우리의 해방은 도래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여전히 비장애인중심주의의 사회라면, 그곳은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억압의 세계다. 우리는 이 세계의 전면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변혁 없는 예산은 동정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수없이 마주해 오지 않았던가? 거주시설로의 격리, 장애인복지시설로의 획일화로 장애인의 자립을 끊임없이 제한해 온 것은 특정한 정치인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이데올로기일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지금 맞서 싸우고 있는 ‘비장애중심주의’다. 개별 권리가 아닌 권리들의 권리, 자립생활 권리를 위한 운동이 우리를 그 해방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자립생활을 반복하면서도, 과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상을 새롭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필자 소개
이정한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2024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