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마비 장애인에게 택배업무 시킨 회사, 인권위는 진정 기각

왼손, 왼쪽 다리로만 택배 물품 옮긴 ㄱ 씨 일하다 넘어져 전치 3주 사고 겪기도 “업무 벅차다” 거듭된 호소 묵살한 사측 인권위는 진정 기각… ㄱ 씨, 행정심판 청구

2024-11-27     하민지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장애인 차별 사건에 대한 진정을 기각했다.

오른쪽 편마비가 있는 지체장애인 ㄱ 씨는 ‘사측이 내가 할 수 없는 택배 분류 업무를 지시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권위는 사측이 지시한 업무가 ㄱ 씨에게 현저한 신체적 부담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이에 ㄱ 씨는 행정심판을 청구하기로 했다. ㄱ 씨를 비롯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안산단원센터) 등 장애인운동단체는 27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를 고려하지 않는 업무 배치와 강요가 차별이 아니라는 인권위를 규탄한다”고 외쳤다.

ㄱ 씨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회사 내 차별로 우울증 생긴 지체장애인 ㄱ 씨

ㄱ 씨는 두 자녀를 둔 생계부양자다.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있다. ㄱ 씨는 “오른쪽 편마비라서 무거운 짐을 옮기고 내리는 일에 엄청난 힘을 기울여야 오른손을 쓸 수 있다. 오른손으로 짐을 들다 긴장되면 힘이 빠져 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래서 자주 상처가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ㄱ 씨는 2012년, 경기도 ㄴ병원에 장애인의무고용제도로 고용됐다. ㄱ 씨에 따르면 ㄴ병원에 장애인이 고용된 건 ㄱ 씨가 처음이다. ㄱ 씨는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 더 많은 장애인이 고용될 것 같아 힘들어도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 4월,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문제의 ‘택배 분류 업무’를 하기 전엔 총무팀에서 11년간 우편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ㄱ 씨는 해당 업무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업무용 회사 차량으로 우편물을 우체국에 나르는 일을 했는데, 다른 직원이 회사 차량을 쓰면 ㄱ 씨는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장애가 있어 택시 트렁크에 무거운 우편물을 실었다 내리는 게 힘들었다. ㄱ 씨는 ㄴ병원에 회사 차량을 이용하게 해달라고 수십 번 요청했지만 ㄴ병원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ㄱ 씨에 따르면 회사 차량은 비장애인 직원에게 우선 배치됐다. ㄱ 씨는 “2019년 12월경, 총무팀 파트장이 ‘다른 부서 직원이 불편해하니 앞으로 회사 차량을 쓰지 말라’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ㄱ 씨는 “나를 회사 직원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너무 치욕스러웠다. 괴롭고 죽고 싶었다. 그래도 책임감을 가지고 헌신했다. 두 자녀를 생각하며 마음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면서 꿋꿋이 일했다”고 했다.

결국 ㄱ 씨에게는 우울증이 생겼다. 첫째 자녀를 돌볼 시간도 필요했다. 고민 끝에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휴직 중에 다른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완치는 되지 않았지만 휴직이 끝나 ㄴ병원에 복직했다.

눈 내리는 기자회견 현장. 사진 하민지

- 복직하니 택배업무 변경 통보… 인권위 진정

복직하고 4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ㄱ 씨는 총무팀 파트장으로부터 ‘택배 분류 업무’를 하라고 통보받았다. 택배 분류 업무는 ㄴ병원에 오는 모든 택배를 부서별로 정리해 옮기는 일이다.

기저귀 박스, 수동휠체어, 생수, 장례용품 등 매일 들어오는 택배량이 적게는 50개, 많게는 200개가량 됐다. 이 많은 물품을 들어 올려 정리하는 걸 ㄱ 씨 혼자 해야 했다.

업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사측에 작업용 선반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결국 택배 무게를 못 견디고 넘어져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전치 3주에 해당하는 상처를 입게 됐다.

ㄱ 씨는 “일이 너무 벅찼다. 시간 변경도, 업무량 조율도 없이 일했다. 사람 대우가 아니었다. 12년 회사 생활을 하며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업무에 대한 결정권도 없었다. 업무 중 사고가 났는데 이에 대한 조치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참다못한 ㄱ 씨는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산하 서울대 공익법률센터 공익펠로우변호사는 “이런 업무 배치는 장애인에 대해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장애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간접차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간접차별이란 형식상으로는 장애인을 불리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장애인을 불리하게 대한 일을 가리킨다(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 4조 1항의 2). ㄱ 씨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형식적으로는 고용과 업무 배치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차별을 두지 않았지만, ㄴ병원은 ㄱ 씨 장애를 고려하지 않고 업무를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ㄱ 씨는 차별을 겪게 됐다.

김 변호사는 또한 ㄴ병원이 “장애인이 직무를 수행할 때 비장애인과 동등한 근로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라(장애인차별금지법 11조 1항)는 의무 또한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장추련은 “ㄴ병원의 차별행위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중 ‘모집, 채용, 고용, 고용연장, 승진, 안전하고 위생적인 근무환경의 조건을 포함해 고용 관련 제반 사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37조 1의 가)’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 사측 주장만 듣고 진정 기각… ㄱ 씨, 행정심판 청구

인권위는 ㄱ 씨 진정을 기각했다. ㄱ 씨의 장애 정도와 평소 업무 능력 등에 비춰 볼 때, 택배 분류 업무가 ㄱ 씨에게 현저한 신체적 부담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인권위는 ‘택배기사가 물건을 쌓고, 수령자가 물건을 찾고,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할 땐 다른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ㄴ병원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택배 분류 업무’를 하는 동안 퇴근 시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과도한 업무량이라 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김 변호사는 “ㄴ병원(피진정회사)의 답변만을 토대로 업무 내용과 환경을 실제와 다르게 판단해 ㄱ 씨(청구인)의 진정을 기각한 건 미진한 조사와 심의에서 비롯된 위법한 처분이다. 따라서 기각결정을 취소하기 위한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인권위가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 법을 명확하게 해석해 장애인 차별 시정기구로서의 역할을 해주길 요청하기 위해 행정심판을 청구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ㄱ 씨가 편안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빠르게 조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ㄱ 씨를 상담해 온 김정훈 안산단원센터 활동가는 “내가 좋아하는 책 구절을 인용해 발언하겠다. 장애인은 장애인에게 안 맞게 설계된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고 그 결과 교육, 취업,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장애를 입는다. 장애는 사회구조 때문이지 개인 신체 조건 때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ㄱ 씨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인권위에 행정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