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사적인 몫이 아닌 ‘보편적인 권리’로 전환하기 위하여

장애여성공감, 돌봄과 섹슈얼리티 주제로 포럼 진행 “돌봄, 특정 연령·삶의 특정 시대에만 발생하는 것 아냐” “서로의 선을 넘다 보면 세상의 차별적 선도 다르게 타고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잘 의존할 수 있게 되는 것’

2025-01-06     김소영 기자

“내 몸은 의존적이다.
그러나 나는 의존적이지 않다.
아니 나는 적극적으로 의존하고자 한다.
타인이 내게 의존할 수 있게 늘 나 역시 의존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한다.”

(진은선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 소장)

‘돌봄’은 흔히 일방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특정한 능력이 부족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여성공감(아래 장공감)은 ‘돌봄’을 “제도를 통해 ‘서로 잘 의존할 권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단순히 그뿐만 아니라 내 옆의 동료, 활동지원사, 친구, 교사, 주거코치 등 일상의 관계에서의 ‘온전한 의존’”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장애인들의 일상 속에서 ‘돌봄’이 동료들과의 ‘의존’이 되기 위해서, 어떠한 몸이라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선택’하고 조력 받을 수 있는 의존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이 지난 12월 13일 오후 2시, 서울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2024년 IL(Independent Living, 자립생활)과 젠더 포럼 ‘돌봄과 섹슈얼리티: 교차적으로 고민하고 정의로운 실천을 모색하기 위하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아래 숨센터)은 지난해 12월 13일 오후 2시, 서울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2024년 IL(Independent Living, 자립생활)과 젠더 포럼 ‘돌봄과 섹슈얼리티: 교차적으로 고민하고 정의로운 실천을 모색하기 위하여’를 열었다.

정주희, 조화영, 서지원 숨센터 활동가와 진은선 숨센터 소장, 유진아 장공감 사무국장이 발제로,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대표,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최경화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 대표, 한낱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활동가가 토론으로 함께해 ‘돌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 “돌봄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

조화영 숨센터 활동가는 발달장애와 프라더윌리 증후군을 갖고 있다. 조화영 활동가는 중증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돌봄을 받기도, 조 활동가가 그들을 돌보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돌봄 관계를 맺었던 경험을 공유하며 “한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연대활동하고, 서로 돌보고 걱정해 주고 생각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동료와 주고받은 돌봄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도 돌봄이 필요하고, 그래서 돌봄이 두 배가 되는 것 아닐까”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조화영 숨센터 활동가가 발제하고 있다. 조 활동가가 “중증장애인과 비장애인한테 돌봄을 받는 나의 경험”을 주제로 직접 그린 그림이 띄워진 화면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김소영

뇌병변장애와 언어장애를 가진 중증장애인인 서지원 숨센터 활동가는 활동지원제도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옷을 벗을 때 어느 쪽부터 벗으면 될까요?”, “어디부터 닦으면 되나요?”, “어느 정도의 강도로 할까요?”

서지원 활동가가 장공감 활동가들에게 목욕지원을 받았을 때 들은 질문들이다. 그는 그때 받았던 질문이 “사소하지만 강력했다”며, ‘목욕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배우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서 활동가는 “제도화가 되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안정된 제도화 속에서 갈등을 회피하기도 한다”고 말하며 “돌봄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서지원 숨센터 활동가가 발제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서로의 선을 넘다 보면 세상의 차별적 선도 다르게 타고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진은선 숨센터 소장은 ‘돌봄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현장의 고민과 연습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진은선 소장은 “서로 기대고 의존하는 관계를 맺을 때 돌봄 관계 또한 더 많은 상상력을 가질 수 있다. 여러 현장에서 돌봄을 놓지 않기 위해서 선을 넘고, 또 실패하면서 분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서로의 선을 넘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차별적 선도 다르게 타고 넘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우리 모두의 숙제 같은 질문을 남겼다.

진 소장은 장공감 20주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선언문(▶ 바로가기)을 인용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프고 장애가 있는 몸들은 의존적이고 폐를 끼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골방이나 시설에 가둬졌다.’ 국가는 매일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취약한 집단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장애의 경험은 성장과 개발이 보편인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으로, 의존과 돌봄 없이 온전히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돌봄에 기대 살아간다’”고 말했다.

진은선 숨센터 소장이 발제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또한 그는 “‘동료 되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균열을 만들어갈 때 가능하다. 갈등과 실패를 계속해 나가는 일은 때론 피곤하지만 함께 겪어낼 것을 선택하고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서로의 삶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의존’이다. 이때 한 사람의 능력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역할’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진 소장은 “서로 의존하는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돌봄을 나와 가까운 주제로, 사소하고 사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일들을 더 드러내야 한다. 나와 서로의 몸에 익숙해지고, 뒤섞이고, 오염되기도 하면서, 스며드는 관계에서 우리는 돌봄의 정의를 다시 써나갈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비민주적인 행태에도 일상의 돌봄을 멈출 수 없고, 멈추지 않고 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정치이자, 운동이다. 이후부터가 아닌 계속 연결되어 온 삶에서 존엄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돌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들을 더 정의롭고 끈질기게 만들어 가야겠다”는 다짐으로 발제를 마무리했다.

포럼에 참석해 발제를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김소영

-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잘 의존할 수 있게 되는 것’

발제가 모두 끝난 뒤 진행된 토론에서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화영 님의 발제를 통해 제도의 틀만으로는 결코 이뤄낼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돌봄의 관계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일, 그 관계 맺기를 어떻게 권리로서 가능하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앞으로 함께 더 이야기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의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왔다”고 전했다.

한낱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활동가가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한낱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활동가는 “적극적으로 의존하길 선택하고, 노력하고, 심지어 연습하는 사람들의 치열함에 주목하고 싶다. 그래야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있고, 어쩌면 그것이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한낱 활동가는 “일상 곳곳이 돌봄 관계로 조직되지 않는다면, 탈시설 ‘이후’의 삶을 그리기 어렵다”며 “갈 곳도, 만날 사람도 다채로워야 한다. 즉, 탈시설 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사자의 존엄을 지키는 책임의 역할 분담’ 과정에 모두를 연루시켜야 한다는 것, 구체적인 ‘나의 몫’을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공감은 이날 포럼에서 진행된 토론과 논의를 기반으로 ‘우리 모두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돌봄 섹슈얼리티 가이드라인’을 올해 1월~2월 중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4년 IL과 젠더포럼 ‘돌봄과 섹슈얼리티: 교차적으로 고민하고, 정의로운 실천을 모색하기 위하여’ 자료집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