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간의 노력 짓밟은 사법부… ‘권리스티커’ 부착한 전장연에 유죄 선고
서부지법, 1심 판결 뒤집고 전장연에 벌금형 선고 법원 “스티커 부착, 승강장의 효용 해하는 행위” “‘이렇게까지 해야 될’ 불가피성 등 인정 어렵다”며 유죄 판결 박경석 대표 “불가피성 등 누구의 기준인가”
2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지하철 승강장에 장애인의 권리를 알리는 ‘권리스티커를 부착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2023년 2월 13일, 전장연은 장애인의 이동권·자립생활·교육권·탈시설·노동권 등의 권리 보장 내용이 담긴 스티커를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 내 벽면 및 바닥에 부착하고, 스프레이를 바닥에 분사했다.
지난해 5월 1일, 이와 관련해 전장연은 공동재물손괴죄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이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2심에서 1심 판결이 뒤집힌 것이다.
서울서부지방법원 2-3형사부(임기환 재판장)는 “전장연이 승강장에 스티커를 붙이고 스프레이를 뿌린 행위가 지하철 승강장의 ‘효용’을 해했다”며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에게는 벌금 300만 원, 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문애린 전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에게는 각 벌금 100만 원을 선고했다.
- 재판부, 24년간 장애인권리 쟁취 위해 투쟁해 온 전장연의 노력 부정해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건조물의 효용을 해하는지 여부는 건조물의 용도와 기능, 미관을 해치는 정도, 이용자들이 느끼는 불쾌감, 원상회복의 난이도, 기타 제반 사정 등을 종합하여 ‘사회 통념’에 따라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고 설명하며 판결을 시작했다.
재판부는 “지하철 승강장은 이용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면서 탑승 및 환승을 위한 통로로서 기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서울교통공사에서는 안내 표지를 명확하게 만드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곳에 피고인들은 벽면과 기둥 위 빈틈에 스티커를 부착했는데 직접 글씨를 가리지 않았더라도 지하철 이용객들로 하여금 정보를 습득함에 있어 상당한 불편을 초래했을 것”이라며 “피고인들의 행위는 충분히 승강장의 효용을 해하는 행위로 인정되어 재물손괴죄를 구성한다”고 유죄를 판결했다.
재판부가 강조한 ‘효용’이란 ‘보람 있게 쓰거나 쓰임, 또는 그런 보람이나 쓸모’를 뜻한다. 재판부의 설명대로라면 지하철 승강장의 효용은 이용객들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지하철을 탑승하여 원하는 곳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재판부는 서울교통공사가 이러한 효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장연의 권리스티커 부착 행위는 지하철 이용객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초래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가 이야기하는 효용과 이용객에 장애인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재판부의 판결에서조차 장애인은 배제된 모습이다.
장애인의 이동권 현실을 들여다보면, 전장연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서울 지하철 엘리베이터 100% 설치’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2002년에는 2004년까지, 2015년에는 2022년까지, 그리고 2022년에는 2024년까지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100%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은 모두 파기됐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서울교통공사가 관할하는 서울 지하철 중 2호선 신설동역, 5호선 까치산역, 7호선 고속터미널역에는 여전히 ‘1역 1동선’[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하나의 동선(지상↔대합실↔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체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아직까지 ‘살인 기계’라고 불리는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거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인근 다른 역까지 이동해 지하철을 타야 한다.
버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토교통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전국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38.9%에 불과하다. 저상버스 도입률이 가장 높은 서울은 66.7%에 그치며, 울산은 14.6%로 최저 수준이다. 울산의 85%가 넘는 곳을 장애인은 버스로 이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는 버스 10대 중 8대는 여전히 장애인이 탈 수 없는 버스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표현의 자유라든가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알리려는 목적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다른 ‘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고 ‘이렇게까지 해야 될’ 긴급성이나 불가피성, 상당성, 보충성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지난 24년간, 전장연은 장애인권리입법과 예산 확보를 위해 권리스티커 부착과 같은 직접행동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청구,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 관계 부처와의 면담 등 재판부가 ‘합법적’이라 여길 만한 방식으로도 수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전장연이 ‘이렇게까지’ 하게 된 과정과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으로 보인다.
- 박경석 대표 “재판부가 말한 불가피성 등은 누구의 기준인가”
유죄를 선고받은 전장연 활동가들은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려 했다. 그러나 서울서부지방법원 법원보안관리대 직원으로부터 저지당했다. 법원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는 것이 ‘불법 시위’이며 지난 19일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현재 법원 사진 촬영 및 취재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활동가들은 한참을 이동해 인근 공원에서 입장 발표를 진행해야 했다.
권달주 전장연 대표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노신사가 와 ‘장애인은 출퇴근 시간에 이동하는 것을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따지니 ‘휠체어가 타면 비장애인 네 명이 지하철에 타지 못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이 이동하는 것을, 또 장애인을 불편한 존재로밖에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권 대표는 “비장애인들의 미관상, 또 비장애인의 출퇴근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한 것이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문애린 전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금 ‘줬다가 뺏긴’ 기분”이라며 “보통 판결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지’라고 물어보는 게 순서인데 우리의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이 판결만 듣고 쫓겨나듯 나왔다. 사회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법원에서조차 장애인을 이런 식으로 대우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인지’란 생각이 든다. 오늘 예상치 못한 판결을 받았지만 고스란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재판부의 판단 기준은 ‘사회적 통념’이었다. 재판부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불법으로 판단 받았다. 재판부는 ‘다른 합법적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보지 않았다’고도 이야기했다. 재판부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지금껏 다른 합법적 수단, 그리고 다른 노력들을 하지 않았는가. 당신이 보고 있는 시각과 시점은 어디인가. 2001년도 오이도역 리프트 참사 이후 24년 동안 외쳤던 우리의 노력과 교통약자법을 제정한 입법적 노력에 대해서, 그리고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이동할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표는 “재판부가 말한 ‘긴급성’, ‘불가피성’, ‘상당성’, ‘보충성’은 누구의 기준인가. 또 이 문제가 단순하게 이동권 보장과 표현의 자유만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국민은 차별받지 않고 누구든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별받아 왔고 평등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이를 인정받지 못해) 너무 슬프다”고 심경을 전했다.
전장연은 이번 2심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