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어 부산서도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소송 이겼다
부산고등법원 “발달장애인에 투표보조 제공해야” 신체적 뿐만 아니라 심리·사회적으로 투표 어려울 경우도 포함 위자료 100만 원 지급 판결… 국가 책임 명확히 해 장애계 “선관위가 판결 이행하도록 잘 지켜봐야”
“기쁩니다!”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권리 보장을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한 ㄱ 씨가 짧고 굵은 소감을 전했다.
지난 16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부산고등법원 민사2-2부(최희영 재판장)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한 발달장애인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소송의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엎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발달장애인인 원고들이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하는 2인의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아래 선관위)가 ‘발달장애인이 심리·사회적 특성으로 투표가 어려울 경우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투표관리 지침에 포함하도록 했다.
다만, 투표보조인에 대한 사전 교육을 제공해 달라고 한 원고 측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부산 판결은 서울과 달리 원고들에게 각각 100만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해 장애인 참정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더욱 명확히 한 판결로 평가된다.
- 투표보조 권리 보장받을 수 없었던 발달장애인들
2022년 3월 4일, 발달장애인인 ㄱ 씨와 ㄴ 씨, ㄷ 씨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사회복지사와 함께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한 투표소를 찾았다. 사회복지사들은 발달장애인들과 기표소에 동반 입장하여 투표를 보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사회복지사의 투표보조를 거부당했다. ㄱ 씨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평소 많은 지원을 받는 사회복지사의 보조를 받고 싶었지만 혼자 기표소에 들어가야 했다. 시력이 좋지 않은 ㄴ 씨 역시 홀로 기표소에 들어갔다. 투표용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사회복지사가 아닌 투표사무원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ㄷ 씨도 사회복지사와 기표소에 함께 들어가려 했으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투표보조를 거부당했다. 결국 ㄷ 씨는 혼자 기표소에 들어갔고, 원활히 기표할 수 없어 불편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ㄷ 씨는 스스로 지원받기를 선택한 이가 아닌 투표사무원의 지원을 받아 투표를 마쳐야 했다.
-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권리를 인정한 연이은 판결
지금껏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선관위는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의 요구로 2016년부터 투표보조를 지원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20년 4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발달장애인들이 현장에서 투표 인력 지원을 저지당해 투표를 하지 못하거나 사표 처리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당시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의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선거관리지침을 개정했다. 이로 인해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부분이 일방적으로 삭제되면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장애계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고, 2021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선관위에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정당한 편의제공을 지원해야 한다’는 시정권고를 내렸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애계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8조에 따라 법원에 임시조치를 신청했다. 해당 법에 따르면, 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차별이 소명되는 경우 본안 판결 전까지 차별행위 중지 등 임시조치를 명할 수 있다.
2022년 2월, 법원은 임시조치에 대한 강제조정을 통해 선관위에 “선거사무지침 중 투표보조와 관련해 ‘자신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에 ‘발달장애인’을 포함하는 것으로 수정하라”며 발달장애인 투표보조를 재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제20대 대선 투표소에서 이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대선 이후 2022년 5월에는 부산의 발달장애인들이, 2023년 3월에는 서울의 발달장애인들이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23년 10월, 부산의 발달장애인들이 소송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4년 10월 법원은 서울에서 소를 제기한 발달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지난 16일, 부산의 발달장애인들도 연이어 승소하며 투표보조 권리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 “진일보한 이번 판결… 선관위가 잘 따르도록 지켜봐야”
판결 직후 부산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주언 공익법단체 두루 변호사는 “서울에서의 판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점이 있다. ‘발달장애인이 심리·사회적인 특성으로 투표하기가 어려울 때’ 투표보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주언 변호사는 “선관위는 그동안 눈이 안 보이거나 손이 떨리는 등 신체적으로 투표하기가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만 투표보조를 허용하고, 그 외의 경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은 신체적 어려움 외의 본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투표 시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다”며 “그럴 때 스스로 선택한 사람으로부터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지침에 포함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또한, 국가의 잘못에 대한 위자료까지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판결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아쉽긴 하지만 이번 재판부의 결정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선관위는 이번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역시 “선관위가 오늘 법원이 내린 판결을 잘 따를지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하며 “선관위는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