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왜 진짜 문제를 우리는 회피하려 하는가?” / 송승연

정신적 고난에 병리적 꼬리표 붙이기를 신화로 규정하고 진짜 문제에 대한 직면을 요구한 토머스 사스 《정신병의 신화(The Myth of Mental Illness)》(2024, 윤삼호 역, 교양인)

2025-02-10     송승연
책 《정신병의 신화(The Myth of Mental Illness)》(2024, 토머스 사스 저, 윤삼호 역, 교양인) 표지. 사진 교양인

작금은 생정신의학(bio-psychiatry)의 시대임을 그 누구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쉽게 잊고 있지만 실제로) 1960년부터 70년까지 약 10년 정도는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의 시대였다. <분열된 자기>(The Divided Self)의 R.D. 랭, 이탈리아 정신건강개혁의 선봉장이었던 프랑코 바자리아(Franco Basaglia), 그리고 1961년 <정신병의 신화>를 출판하며 뜨거운 논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토머스 사스(Thomas Szasz) 등이 반정신의학의 대표적 학자들로 거론되곤 한다.

물론 개념적으로 반정신의학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토머스 사스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지만, 사스는 자신을 반정신의학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강렬하게 반대했다. 오히려 자신을 ‘반강제주의자’로 정의하길 원했다. 사스는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정신병(정신질환)’이라는 의료적 라벨링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신화’로 규정하며 명확하게 반대했지만,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45년간 ‘강제입원 없이, 강제적 약물치료 없이’ 그는 수많은 당사자를 만나 정신치료를 진행한 ‘찐’ 정신과의사였다.

개인적으로 반정신의학이 제기한 담론 중 일부 동의되는 것도 있지만, 일부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도 존재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반정신의학은 과도하게 터부시 되고 있다는 점이다. 1961년도에 출판된 <정신병의 신화>가 2024년에 한국에 공식으로 번역 출판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깊은 간극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쓴 당사자는 어떠했을까? 사스 또한 <정신병의 신화> 출판 이후 겪은 다양한 어려움들에 대해 언급한다.

미국 정신과 의사들은 똘똘 뭉쳐 나를 배척했다. 정신의학계는 공식적으로 내가 “정신병이 다른 질병과 같다는 현실을 부정한다”라고 주장하며 (잘못된) 행동은 질병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일축했다. (중략) 1970년까지 나는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비인간이 되었다. 미국 정신의학 학술지들은 내 연구를 차단했다. 내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저주를 받았고, 이전에 내 주장을 실었던 글들은 판본이 바뀌는 순간 내 이름을 지워버렸다. 요컨대 나는 가장 효과적인 비판 대상, 즉 독일인들이 말하는 묵살전술(Totschweigetaktik)의 표적이 되었다. (372~373.p)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플이라는 말처럼, 사스는 힘든 고초를 겪었다. 관련해서 그는 제멜바이스(Semmelweis)의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한다. 1847년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병원에서 근무하던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출산후 걸리는 심한 열병)을 탐구하면서 손 씻기가 산욕열 발생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그의 발견과 예방법은 의학계에서 거절당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들은 신사로서의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들의 손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고집한 제멜바이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그는 반대자들로 인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2주 만에 사망했다.

진실을 계속해서 외쳤던, 제멜바이스가 ‘미쳤다고’ 인식되어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핍박과 노골적 배제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사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 정신적 고난은 과학의 영역인가 정치의 영역인가?

토머스 사스는 <정신병의 신화>를 통해 다소 논쟁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정신적 고난은 ‘정신질환’이 되며 과학적 의료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질환의 이름을 달고 있는 ‘정치’의 영역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50년 전에는 “정신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철학자, 사회학자, 의료 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도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정치권력이 있는 자들이 이 질문에 답한다(‘답한다’보다는 ‘간단히 처리해버린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해 “정신병은 질병이다!” 하고 선포한다. 정치권력과 전문가의 사리사욕이 결탁하여 거짓 믿음을 ‘거짓 사실’로 바꾸어놓는다. (10.p)

특히 사스는 ‘어떤 특정 행위들(특히 사회적으로 나쁘다고 인식하는)’에 대한 판단을 정치적으로 형성하는 것에 있어 정신의학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수록되는 mental disorder의 목록이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증가되고 있는 추세를 언급한다.

‘정신병’은 어떤 사람들의 (나쁜)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가리키는 용어이기에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정신의학의 역사는 ‘정신이상(mental disorder)’의 목록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역사다. (14.p)

실제 사스는 1960년대 ‘중독, 비행, 이혼, 동성애, 살인, 자살 등’과 관련된 행위들이 정신의학적 병으로 간주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이 1961년도에 출판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DSM에 수록된 공식적 정신질환 진단명 중 하나였지만 1973년에 DSM 진단 목록에서 빠지면서 정신질환이 ‘아니게 되었다’. (이처럼 하루아침에 ‘병’이었다가 ‘병이 아니게 된’ 현상을 지적하며 1973년 12월 15일 한 캘리포니아 신문은 “동성애자들은 한순간에 치료가 되었다!”라고 유머러스한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한 바 있다.) (참고로 DSM-5에는 성별 불쾌감이라는 진단명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나는 지난 60~70년 사이 정신의학에서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무수한 사건들이 ‘병’으로 재분류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중독, 비행, 이혼, 동성애, 살인, 자살 따위를 마구잡이로 정신의학적 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를 엄청난 실수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중독자, 동성애자, 범죄자를 ‘아픈 사람’으로 간주하는 게 유익하지 않은가? 당연히 누군가에게는 그런 꼬리표 붙이기가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고, 나쁜 행동을 죄나 병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같은 이분법을 거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일탈한 행위나 불쾌한 행동을 다른 방식으로 분류하거나 미분류 상태로 남겨둘 수 있다. (93.p)

이와 더불어 사스는 정신의학과 정치의 결탁을 지적하며, 정신의학과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법의학적 수단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을 지속한 바 있다.

사회 측면에서 정신병 개념은 개인을 책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책임 능력이 없는 환자로 취급하도록 권한다. (364.p)

예를 들어 ‘강제입원제도, 치료감호제도, 정신착란성방위(Insanity Defense)’ 등이다. 물론 이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가령 정신착란성방위 개념은 일부 범죄자가 처벌보다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e.g., 치료감호)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학대를 최소화하려는 회복운동의 요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잘못에 대한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근거로 ‘침해당한 행위주체성’을 사용할 때, 정신장애인은 “자기 자신을 이끌고,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회복 경로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행위주체자라는 회복 운동의 주장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Pouncey & Lukens, 2010).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 진영에서도 이와 유사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변호사이자 정신과생존자(psychiatric survivor)로 자신을 정의하는 티나 민코위츠(Tina Minkowitz)는 “정신이상의 이유로 무죄(not guilty by reason of insanity) 주장은 개인의 명백한 결정권과 관련된 책임성을 박탈한다. 정신착란성방위는 장애인의 법적 능력(UN CRPD 제12조 2항)과 더불어 제14조를 위반한다(Minkowitz, 2011).”고 주장한 바 있다.

- 정신적 고난에 대해 직면하기? 우선적으로 ‘질환과 병’으로 규정하는 의료화 깨뜨리기부터

사스는 ‘정신적 고난’(혹은 정신건강 어려움, 정신적 고통 등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현상에 ‘병리적’ 라벨링을 붙이고, ‘의료적’ 관점에서 그 현상을 해석하고, ‘임상적’ 언어로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 ‘신화’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정신적 고난을 ‘병’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 관점을 전환해야 함을 제시하였다.

우선 “정신병은 과연 병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정신병을 이해하는 것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으로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43.p)

(나는) 진단 - 질병 - 치료라는 기만적인 수사학을 거부하고, ‘정신의학’이라고 부르는 강압적이고 고약한 거대 제도적 장치를 기피하고, 사전 동의한 성인과 정신의학적 관계를 맺는 것 — 흔히 ‘정신 치료’라고 부르는 비밀 대화 — 으로 내 일을 제한했다. (20.p)

정신 치료(psychotherapy)는 사람 — ‘병’을 고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타인, 삶에 대해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 — 을 돕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는다. (45.p)

이러한 측면에서 사스가 추구했던 정신치료 접근법은 현재 당사자중심으로 정신적 고난에 대해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는 대안적 접근법들, 예를 들어 오픈 다이얼로그(Open Dialogue), 당사자연구(Tōjisha-kenkyū), 목소리 들림에 대한 자조모임(Hearing Voices Support Groups) 등의 대안적 실천들과 유사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 실천들은 어쩌면 지금도 그 정신적 고난을 ‘모색’하고 서로를 ‘배워가기’ 위한 ‘과정’들 일 수 있다.

-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신적 고통은 ‘병리적 세계’가 아닌 ‘평범한 언어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토머스 사스는 <정신병의 신화>에서 프로이트와 브로이어의 <히스테리 연구>에 대한 한계점을 지적한다. 사스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프로이트. 당신도 알지 않은가? 정신적 고통은 의료화가 아닌(임상적 세계가 아닌, 병리적 세계가 아닌) 평범한 언어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령 사스는 다음과 같이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쓴 문헌 중의 일부를 인용한다.

사랑에 목마른 자존심 강한 소녀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다. 소녀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지 못했고, 가문의 옛 영화를 재건하려던 작은 계획들마저 모두 실패하여 참담한 심정이었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거나 떠나거나 돌아섰고, 낯선 남자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를 돌보고 자신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8개월 동안 칩거했다. (133.p)

사스는 이러한 글을 보면 프로이트 또한 히스테리의 본질이 질환이 아닌 그 사람의 ‘삶’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저 글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정신적 고난’은 불필요한 임상적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언어들로 설명된다. 사스는 더 나아가 히스테리의 경우 오히려 ‘병’이 아닌 ‘여성권리운동’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성운동이 히스테리의 감소에 오히려 더 큰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브로이어와 프로이트가 명명한 ‘히스테리병(hysterical illness)’ 유형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히스테리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고 심지어 히스테리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변화 — 특히 여성의 성적 억압 감소와 사회적 해방 —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의사의 사회적 역할도 바뀌었다. (131.p)

사스는 말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신적 고통은 ‘병리적 세계’가 아닌 ‘평범한 언어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외친다. “진짜 문제를 회피하지 말자”고 말이다.

이 익숙하지만 그릇된 견해를 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정신병에 대한 철저한 의료 접근법을 버리고, 정신과환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윤리적, 정치적, 심리적, 사회적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찾는 것이다. 정신과의사들은 그런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시늉만 한다. (141.p)

- 게임이론으로 바라본 정신적 고난? 본질은 나의 괴로움을 표출하는 ‘또 다른 언어’

게임이론(game theory)은 상호 의존적인 의사결정에 관한 수학적 이론을 의미한다. 개인 또는 기업이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그 결과가 게임에서와 같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의 행동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게임이론은 참가자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해 가는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스는 이러한 게임이론을 적용하여 정신적 고난의 언어와 행위들을 바라본다. 이 경우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행위(몸짓 언어) 등은 게임이론 속 상호작용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영리한 은유를 빌리자면 히스테리성 팬터마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상식이다. 아픈 사람을 보면 애처롭고 도와주려 하는 것은 사회적 윤리다. 따라서 몸 기호를 통한 의사소통은 메시지 수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감정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지금 내가 애처롭지 않나요? 나한테 이런 상처를 주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내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도 마음 아파해야 해요.” (중략) 또 과거 프랑스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목격된 대히스테리나 오늘날 목격되는 격렬한 ‘정신분열적 신체 흥분상태’ 역시 특수한 사회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이다. 이런 의사소통의 목적은 정보 전달보다 분위기 유도라서 메시지 수신자는 마치 이런 말을 듣는 것처럼 느낀다. “나한테 관심 좀 가지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나를 책망하시오!”

정신의학모델에서 소위 ‘증상’으로 지칭되는 것은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생물학적 부조화가 외현화된 질환의 징후로 이해된다. 다양한 근거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화학적 불균형’(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발생한다는) 가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적 불균형 논리에 따라) 심각한 정신질환이 발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증상은 (때로는 부득이 하더라도 불균형을 균형으로 맞추어주는 것이 필요한 개입이라고 인식하기에)) 강제입원과 강제적 약물치료 등으로 통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접근한다.

게임이론으로 바라보면 사람들의 행위는 상호작용에서 이루어진다. 즉 사스는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몸짓 언어는 사실 게임이론 속 ‘다소 열악한 위치’에 놓인 당사자의 ‘대안적 표출’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문득 오픈 다이얼로그가 정신적 위기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OD는 소위 증상은 “당사자가 위기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자신의 고통에 관한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바라본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의료적 꼬리표를 붙이지만, 이를 정신의학적 붕괴(breakdown)가 아니라 오히려 돌파구(breakthrough)를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본 R.D. 랭의 주장과도 유사하다.) 이렇게 되었을 때 소위 증상으로 해석되며 표출되는 언어와 행위들은 병리적 증상이 아닌, ‘힘든 경험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위기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 ‘자연스런 현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

특히 권력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 사회적으로 다소 소외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 (게임이론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정신적 고난의 경험으로 표출하게 되는 것은 (합당한) ‘또 다른 언어’일 수 있다고 사스는 주장한다.

내 말의 요지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상 언어로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없으면 원형 언어(울음이나 ‘증상’)로 전달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로, 가령 일상 언어를 정상적인 어조에서 고함을 치거나 위협적인 어조로 바꿔 의사 전달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할 수 있다. 대개 전자는 약자의 방식이고 후자는 강자의 방식이다. 엄마가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아이와 아내는 울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엄마의 말을 듣지 않거나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와 남편은 고함을 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자/피억압자가 강자/억압자를 마주 보고 의사소통할 때 겪는 근본적인 의사소통 딜레마이다. 이들은 공손하게 말하면 무시당하고, 말 그대로 언성을 높이면 무례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은유적으로 언성을 높이면 미친 사람 진단을 받을 것이다. (188.p)

이처럼 억압된 자신의 괴로움을 표출하는 것이라면 그 기저에 위치한 것은 무엇일까? 사스는 프로이트가 인용한 전형적 히스테리 사례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 안에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이슈들’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프로이트가 인용한 전형적인 히스테리 사례에는 도덕적 갈등 — 젊은 여성 환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해서 생긴 갈등 — 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아픈 아버지를 보살피며 자신이 좋은 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결혼을 하든지 어떻게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었을까? 나는 히스테리 사례에서 결정적인 쟁점은 갈등하는 욕망들 사이의 긴장이고, 성적 문제는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쟁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윤리적 문제는 인간 삶에서 매우 어렵다. 그런 문제는 특별한 책략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기본 목표에 대한 의사 결정을 내린 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309.p)

가령 사스는 프로이트가 인용한 히스테리 사례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회적 돌봄 부담, 윤리적 압력’ 등의 요인들이 대립하고 있으며, 이 게임 속 개인은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정신적 고난의 목소리’라는 것으로 표출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표출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도움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 돌리는 것이 아닌, 임상적 방법으로 개입할 것이 아닌, ‘윤리적 문제’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헌신적인) 사회적 노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이와 더불어 사스는 게임이론으로 사회적 현상을 바라 보며, 하나의 예시로 마녀재판을 언급한다. 가령 다소 과도한 사회적 갈등상태(마녀재판의 경우 표면적으로 드러난 갈등 이면에 사회계층, 가치관, 인간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언급)에서 ‘진정제’가 요구되며, 사회적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진정제의 일종으로 희생양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스는 과거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마녀’라는 집단과 현재의 ‘정신질환자’는 유사한 개념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사스는 이처럼 희생양이 되는 마녀와 정신질환자의 경우 계급적으로 또 다른 불평등에 놓여 있는 요소들이 작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정신장애인이 경험하는 보편적 차별 경험과 더불어 여러 차별(계급, 젠더, 인종 등)이 맞물리며 교차되는 다양한 경험인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주술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중 압도적 다수가 여성이었고 대부분 하층민이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사회적으로 무력하고 더러는 늙고 연약했다. 당시 주술 ‘진단’은 오늘날 누군가를 정신이 병들었다고 부르는 것처럼 모욕이자 비난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보다 하찮은 사람을 비난하는 게 더 안전하다. (중략) 그 당시 식자층과 부유층에게 마녀 낙인을 찍고 그들을 기둥에 묶어 화형 처분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늘날(책이 출판되었을 1960년대) 식자층과 부유층에게 그들의 의지에 반해 정신이 병들었다는 진단을 내리고 로보토미(lobotomy, 전두엽 절제술) 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드문 것과 마찬가지다.(274~275.p)

그렇다면 마녀든 혹은 정신질환자로든 무엇으로 명명되든, 있는 그대로의 그 존재를 인정하기는 어려울까? 게임이론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 존재가 인정되기 위해선 일종의 ‘전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이단자가 인간적 대우를 받기 위해선 진정한 신자로 전향해야 되는 것처럼, 정신질환자가 인간적 대우를 받으려면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정신질환자로 구분되는 자는 ‘열심히 치료 받고 건강해져야만’ 인정의 범위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음을, 더군다나 작금의 권력 구조에서는 더욱 이러한 문제제기가 쉽지 않음을 사스는 언급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 틀에서 이단자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려면 진정한 신자가 될 가능성이 있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했던 것처럼, 전통적인 의료 윤리 틀에서 환자가 주변사람과 의사의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려면 건강해질 가능성이 있고 또 그렇게 되려고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전자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어야만 인간으로 인정받고 후자는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어야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중략) 한물간 믿음을 의심하는 건 쉽지만 현존하는 믿음을 의심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중략) 중세 때 누군가 이단은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면 터무니없거나 해로운 말로 들렸을 것이다. 오늘날 누군가 정신병은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역시 터무니없거나 해로운 말로 들릴 것이다. (284.p)

- 우리를 여기로 이끈 요인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당사자가 ‘운전석’에 앉는 것부터!

<정신병의 신화>를 통해 사스는 말한다. 정신적 고난은 존재한다고. 다만 거기에 병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신화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 괴로움을 병리적, 임상적 언어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평범한 언어 속에서 시작해야 함을 강조한다.

특정한 조건에서 우리가 언어를 바꾼다고 해서 — 가령 프랑스어로 말하다가 영어로 말한다고 해서 — 그런 변화를 ‘치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병인의 측면이 아니라 학습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의사소통 형식들이 저마다 존재 이유(레종 데테르)가 있고 의사소통 참여자마다 상황이 다르기에 저마다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정신과 의사와 정신 치료사들이 영원히 좌절감에 빠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배우는 데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221.p)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병리적․임상적 언어로 번역된 해석을 당사자가 ‘거부’하는 경우, 그것은 치료에 대한 ‘저항’으로 또 다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치료순응성’이 ‘좋은’ 환자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 순응성이라는 논리에서 빠져나갈 길은 쉽지 않으며, 치료순응성이 부족하다고 인식되는 경우 때로는 강제적 (약물)치료 등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당사자 활동가 쥬디 챔벌린(Judy Chamberlin)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비순응적 환자, 나쁜 환자’가 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스 또한 이와 유사하게 ‘치료자 관점’에서 ‘좋은 환자’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보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실천은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당사자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당사자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치료자가 수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치료자의 ‘저항성’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지원과 도움을 주려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열린 태도를 지니고, 그들의 평범한 언어와 게임에 흥미를 가지고 다가가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질병은 치료될 수 있지만 게임 행위는 변화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변화’라는 단어와 달리 ‘치료’라는 단어는 환자의 행위가 나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아픈’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렇듯 전통적인 정신의학의 관점에서는 의사가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아프고 건강한지를 정의한다. 내가 선호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치료’에서는 환자가 좋은 것과 나쁜 것 또 아픈 것과 건강한 것을 스스로 정의한다. 이렇게 환자는 치료자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치료자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 환자가 치료자에게 불복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 치료자가 환자 돕는 일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정신과 환자에 대한 치료 개입과 그의 삶의 활동 변화에 관한 설명은 증상과 치료의 언어가 아니라 환자의 게임 방향 변화라는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중략) 마지막으로 다른 게임들을 배우고 그중 일부에 흥미를 품고 능력을 습득하는 것으로 말이다. (323~324.p)

푸코는 ‘정신의학의 언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사스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 언어를 보고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나의 언어와 행위들이 임상적 언어로 번역될 때의 두려움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래의 예시들을 그러한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정신과약물은) 내 의지에 반하여, 내 허락 없이 그리고 언제나 내 동의도 없이 주어졌어요. 그리고 내 시야가 흐릿해지고 발 두 쪽 모두 부어올랐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그래서 정신과약물은 내가 걷는 것도 어렵게 만들어요. 그리고 병원 직원들은 제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내요. 약물은 내 손을 더 떨게 만들고, 머리에 경련을 일으켜요 그래서 심지어 지금보다 더 미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요. 그리고, 때로는 그들과 싸울 생각조차 못해요. 왜냐하면 만약 내가 약을 삼키지 않으면 그들은 주사바늘로 나를 위협하기 때문이에요.”

출처: 영화 55 Steps 中 엘레노어 리즈

한 여성은 “배가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한 후에 최초의 정신증적 삽화를 경험했다…. 그녀는 4일 후에 입원하였고, 4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다.” 이 동안 10번의 ECT를 받았고, 고용량의 신경안정제를 2번 투여 받았다. 부모님이 사망하고, 남자친구와 결별한 뒤 다시 입원되었다. 이 시기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녀는 “만성적 미분화 조현병”으로 진단되었고, 계속 ECT와 신경안정제 치료를 받았다.

(중략)

그리고 치료팀이 당신을 치료하는 것에 충분히 끔찍하게 실패했을 때라도, 그들은 당신을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것이다. “매일 [신경안정제]를 투약함에도 계속 망상과 환각을 경험”하는 여성은 치료 팀에 의해 입원되었다. 이들은 “그녀가 계속 환각을 경험하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보고하는 병원 직원을 통해서 계속 그녀를 감시했다. (중략) 치료팀 정신과의사는 이렇게 썼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에게 화가 났기 때문에 그녀는 방문을 취소했다. 그녀의 [주사형 신경안정제]를 변경해야겠다. 그녀는 정신증적 생각을 많이 숨기고, 직원들이 믿을만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 그녀가 믿어야 하는가?

출처: Shimrat, I. (2013). The tragic farce of ‘community mental health care’. Mad matters: A critical reader in Canadian mad studies, 144-157.

나의 언어와 행위가 모두 임상적 특성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는 것. 그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사스는 이야기한다. 당사자의 언어와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고, 그들의 고충을 일상 언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말이다.

히스테리성 증상이 사실상 일종의 팬터마임, 즉 무언극 — 환자가 비음성적 신체 신호로 메시지를 표시하는 것 — 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히스테리가 병이 아니라 관용적 표현 또는 언어이고 질병이 아니라 극화(dramatization) 또는 게임이라고 인정한 셈이다. (중략) 그래서 이른바 히스테리성 환자를 다루는 사람은 그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들의 특별한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중략) 히스테리 게임에서는 ‘환자’가 어떤 믿음이나 고충을 연기하면 이 때문에 그는 ‘환자’가 된다다른 사람들가족, (정신과) 의사 등은 그의 팬터마임이른바 ‘히스테리 전환’을 일상 언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24~325.p)

사스는 정신병이라는 ‘신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 존재하는 갈등과 어려움을 은폐하는 동시에 탐구하려는 의식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정신병’은 정신적 고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에 의한 정신적 붕괴’를 내포하는 메타포가 될 수 있다. 즉 계속해서 조금 더 문제를 넓고 깊게 보자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진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더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할 수 있다. 사스에 의하면, 당사자들의 몸짓 언어는 자신에게 가해졌거나 가해지고 있는 해악, 트라우마,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 역경에 대응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히 정당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측면에서 정신병 개념은 자신의 ‘증상’이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갈등이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의식을 마비시킨다. (중략) (인간 행위는 어떤 병리적 행위, 증상이 아닌) 인간 행위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행위이다. 따라서 윤리적 가치에 관한 쟁점과 맞붙지 않고 인간 행위를 설명하고 변경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중략) 이 책이 제시한 개인 행위 이론 — 그리고 이 이론에 함축된 정신 치료 이론 — 을 통해, 나는 정신의학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인간 행위의 도덕적 차원을 규명함으로써 이 결함을 바로잡고자 했다. (364~365.p)

아프리카 현대 문학을 이끄는 대표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지닌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단편적 이야기는 고정관념을 만듭니다. 그리고 고정관념의 문제는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하나의 이야기를 유일한 이야기로 만듭니다. (중략)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해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들고 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존엄성을 부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처 입은 존엄성을 치료할 수도 있습니다.”

사스는 <정신병의 신화>를 통해 정신적 어려움을 다소 ‘단편적인 이야기’로만 바라보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선, 아니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선, 그들과 함께하고, 귀 기울여 경청하고, (진짜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그들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그리고 연대하며) 뛰어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필자 소개

송승연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함께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