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 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무죄’ 판결
2023년,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 전액 삭감으로 187명 해고 위기 발달장애인들, 고용노동부 장관 면담 요구하며 고용공단 점거 서울중앙지법 “목적이나 동기가 정당한 적법한 행위” 무죄 선고받은 장애인들 “죄가 없음을 인정받아 기쁘다”
“피고인들이 한 행위는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고인들은 ‘무죄’”
‘2023년도 중증장애인 지역 맞춤형 취업 지원사업’(아래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 전액 삭감에 반발해, 이정식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한국장애인고용공단(아래 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를 점거했던 발달장애인들이 11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 예산 삭감에 반발해 고용공단 찾아간 발달장애인들… 검찰, 벌금형 구형
동료지원가 사업은 중증장애인(동료지원가)이 다른 중증장애인을 만나 취업 정보를 제공하고, 정서적 지지를 통해 취업의지를 끌어올려 일자리를 연계해 주는 사업이다. ‘비경제활동 또는 실업 상태에 있는 중증장애인의 취업의욕 고취 및 경제활동 참여’를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대다수는 발달장애인이다.
2023년, 정부는 국회에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 23억 원 전액을 삭감한 2024년도 예산안을 제출했다. 예산이 사라지면 사실상 사업이 폐기되는 것과 다름없어 동료지원가로 고용되어 있던 장애인 187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단순한 ‘일자리’를 넘어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던 동료지원가 사업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발달장애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2023년 9월 18일 오전 7시경, 발달장애인 동료지원가들과 비장애인 활동가들 20여 명은 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의 고객상담실을 찾았다. 장애인의 고용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는 고용공단에 예산 전액 삭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면담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고용공단에서는 요구사항이나 면담 요청 등에 대한 확인 절차 없이 곧바로 퇴거를 요구했다. 이후 고용공단 직원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활동가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경찰들은 활동가들을 한 명씩 뜯어내며 폭력적으로 퇴거시켰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설명이나 절차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검찰은 오히려 활동가들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퇴거불응) 혐의로 벌금형을 구형했고 법원 역시 벌금형 약식명령을 내렸다. 활동가들은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 서울중앙지법 “목적이나 동기가 정당한 적법한 행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5단독 박병곤 판사는 발달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의 저항을 “적법한 정당행위”라고 인정했다.
법원은 “활동가들이 업무 시작 전에 고용공단 안으로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특별히 제지를 받았거나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등 허용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예산 전액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그 과정에서도 역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거나 다른 민원인들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어 “당시 고용공단 직원들은 시위 인원들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더라도 먼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관련 절차를 안내하는 등 사태를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동료지원가 사업 필요성이 공론화됐고 실제 예산이 일부 복원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활동가들이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하에 고용공단 안에 들어가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 전액 삭감에 항의하고 밖으로 나가달라는 요구를 거부한 행위는 그 목적이나 동기가 정당했고 수단이나 방법도 상당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활동가들이 무죄임을 명확히 판시했다.
- 무죄 선고받은 장애인들 “죄가 없음을 인정받아 기쁘다”
판결 직후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서문 앞 삼거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의 무죄판결을 환영했다.
소송대리인인 김영주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발달장애인들은 국회의원이나 기획재정부 등에 동료지원가 사업의 중요성을 호소할 마땅한 통로가 없었다. 정당한 절차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찾아가 면담을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발달장애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김 변호사는 “재판부가 발달장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정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적인 책무를 방기하고 무조건 내쫓으려 한 고용공단에게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청취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있음을 인정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장애인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공적인 통로가 없다. 이에 대해 국가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죄를 선고받은 문석영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는 “고용공단에 들어간 이유는 고용노동부에서 동료지원가 사업 실적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예산을 0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지원가 사업을 다시 살려달라고 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억울했다. 장관님이 처음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면 고용공단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활동가는 “동료지원가는 소중한 일자리이다. 지금이라도 무죄가 되어 너무 좋다”며 “오늘 선고 받은 활동가들 외에도 20여 명의 동료들이 검찰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판결이 다른 동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어 무죄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