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1천 명, 정부 상대 집단 소송 건다 “접근권 완전 보장하라”

지난해, ‘접근권’ 침해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인정한 대법원 그럼에도 정부의 대응 여전히 미온적 턱 앞에서 멈춰야 하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현실 그대로 장애계, 접근권 보장을 위한 투쟁 선포 기자회견 진행 “편의시설 설치 의무 예외 조항 폐지하라!”

2025-04-14     김소영 기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등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한국판T4철폐 농성장 앞에서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백인혁 한자협 활동가가 사회를 보고 있다. 사진 김소영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이 시행된 지 꼭 27년이 된 지난 11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한자협) 등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한국판T4철폐 농성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선포했다.

장애계는 올해 수립 예정인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여전히 남아 있는 면적 및 건축 시기에 따른 편의시설 설치 의무 예외 조항을 폐지할 것을 ‘제6차 편의증진 국가종합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 장애인의 접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장애인들의 모습. “오늘의 김순석들이 요구한다! 거리의 턱을 없애 주십시오!”, “6차 편의증진 국가종합 5개년 계획, 장애인 접근권 완전 보장 계획으로!” 등이 쓰인 피켓을 목에 걸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역사적인 대법원판결에도 변하지 않은 장애인의 현실

지난해 12월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 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대한민국이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아 왔다고 인정하며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장애인들이 소를 제기한 지 6년 8개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순석 열사가 “서울 거리에 턱을 없애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은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약하는 규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 ‘방치’됐고, 그 결과 장애인의 고통이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위법한 부작위(의무를 다하지 않음)로 인해 장애인이 겪었을 고통을 위자하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국가가 적절한 의무를 이행하며 적극적인 장애인 보호정책을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대한민국이 장애인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 이후에도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도 개선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의 턱 앞에서, 물 한 모금 사 마시러 들른 편의점의 계단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소송 중이던 2022년 4월 27일 편의시설 설치의무 대상시설에서 제외되는 바닥면적 기준이 기존 300㎡(약 90평) 미만에서 50㎡(약 15평) 미만으로 축소됐지만, 여전히 50㎡ 미만 소매점에 대한 설치 의무는 전면 면제되고 있다. 또한, 이 기준은 2022년 5월 1일 이후에 신축·증축·개축 등 건축행위가 있는 경우에만 적용 대상이 되어 실질적으로 장애인 접근권에 개선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장애계는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제외되는 바닥면적 기준 및 건축 시기 기준 등의 예외 규정을 ‘독소조항’(불이익이나 차별을 초래하는 규정)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폐지하고 모든 건축물에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장애인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대법원판결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싸울 것”

소송대리인이었던 한상원 공익법단체 두루 변호사는 기자회견에서 “한번 지어지면 최소 30년에서 100년까지도 사용되는 건물의 특성상, 현존하는 건물의 절대다수는 ‘구축 건물’일 수밖에 없다. 건축 활동이 활발한 서울조차 상업용 건물 중 1년간 신축이나 증축이 이루어지는 건물은 3% 남짓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한 변호사는 “이처럼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면적과 건축 시기라는 이중의 기준으로 절대다수의 건물의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는 이상, 장애인등편의법뿐만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장애인의 접근권은 장애인 당사자의 일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선언적 권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며 “장애인의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건물의 ‘면적’이나 ‘건축 시기’를 이유로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하여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라나 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6차 편의증진 국가종합 5개년 계획, 장애인 접근권 완전 보장 계획으로!”라고 쓰인 피켓이 놓여있다. 사진 김소영

이라나 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참 오랫동안 많이 참고 살아왔다. 그랬는데도 여전히 매일 불쑥불쑥 화가 난다. 눈을 뜨고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어려움이 없었던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지난해 대법원 판결문의 일부를 기자회견 참가자들과 함께 나눴다.

“소규모 소매점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권을 단지 소매점에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은 장애인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구매 그 자체를 위해서라면 활동보조인(활동지원사)을 통해서 더 값싸고 편의시설도 잘 구비된 대형 할인점에서 구매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온라인 쇼핑도 편리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소규모 소매점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의 문제는 ‘쇼핑’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문제이다. 비장애인은 점심시간에 우연히 친구를 만나 식당이나 커피숍을 가거나, 귀가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서점과 꽃집에 들르고,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을 이용하거나 동네 의원에 가면서, 내가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일상생활 또한 그래야 한다. 계획된 ‘쇼핑’은 대형 할인점과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우연과 즉자성으로 이루어진 나날의 ‘삶’은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장은 “하루빨리 대법원판결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 매일매일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싶다. 나도 미용실에 가는 것 너무 하고 싶다. 나도 친구와 함께 어딜 가든 부담스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딸아이가 어디 갈 때마다 ‘엄마, 저긴 계단이야. 엄만 못 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그때까지 더 끈질기고 힘차게 싸워가자”고 힘주어 말했다.

- “적극적으로 소송에 나서 정부에게 명확하게 배상받자”

서권일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는 “우리는 오늘도 많은 건물 앞에서 멈춘다. ‘건물이 작다’, ‘지어진 시기가 오래됐다’는 이유로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장애인은 늘 예외였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대법원도 말했다. 우리의 고통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외가 되지 않겠다”며 “투쟁으로 우리의 생존권인 접근권을 쟁취하자”고 외쳤다.

눈을 질끈 감은 서권일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가 손을 높이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박김영희 장추련 대표는 “이곳에 대법원판결 이후 정부에게 사과를 받아보신 분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우리한테 ‘미안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차별을 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한마디 한 적 없다”고 지적했다.

박김 대표는 “우리는 분명하게 제6차 편의증진 국가종합 5개년 계획에 접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라고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면적 및 건축 시기에 따른 예외 조항을 폐지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똑같이 살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소송에 나서 대한민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명확하게 배상받자. 더 많은 사람을 조직해서 ‘유감이다’ 따위의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우리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받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자협은 장애인 접근권 완전 보장을 위한 정부 상대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 예비 원고를 모집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