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인’ 김용섭 떠난 지 49일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혜화동성당 탈시설권리 고공농성장서 49재 진행 자립생활운동가 김용섭,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함께 투쟁해 나가자”
“누군가에게는 대표님, 누군가에게는 소장님, 또 누군가에게는 아빠셨습니다. 대표님, 그곳에서는 좋아하는 바다 앞에서 소주 한잔하며 지나간 인연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실까요? 맛있는 잔치국수 한 그릇 하며 그동안의 재밌는 이야기들 나누고 계실까요?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슬플 땐 서로를 위로하며 안아주고, 기쁠 땐 ‘대표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떠올리곤 합니다.
이제는 너무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대표님이 걸어오신 길, 만들어 주신 길 저희가 더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했습니다. 김용섭이라는 사람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애해방의 그날까지 함께 헤쳐 나가겠습니다.” (박수은 강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김용섭 자립생활운동가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이 지났다. 김용섭의 빈자리가 메워지기엔, 그의 동지들의 슬픔이 가시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지난 2일,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성당 탈시설권리 고공농성장 앞에서 열린 김용섭 운동가의 49재. 추모식이 진행되는 내내 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용섭 운동가에게 말을 전하다 목이 메는 사람들, 그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그에게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까지.
김용섭을 떠나보내는 자리였지만 슬프기만 하지 않았고, 무겁기만 하지도 않았다. 생전 그의 모습처럼 슬픔뿐이 아닌 다정함과 결의로 채워졌다.
- 참으로 장애인을 위해 살아온 김용섭, 감사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료이자 단짝 친구로 김용섭 운동가와 함께 해온 김서현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소장님은 말했습니다. 나중에 ‘김용섭은 참으로 장애인을 위해 살았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소장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참으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을 기어코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집이 마련되지 않은 이들을 사무실 한 켠에서 생활할 수 있게 했으며,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배움에 목마르고 사람이 그리운 이에겐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고, 문턱이 높아 점심 한 끼 해결하는 것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작정 무료 급식을 시작했습니다.
김용섭 대표님이 없는 강원도, 김용섭 소장님이 없는 원주 센터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이제 소장님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소장님은 강원도의 뿌리 깊은 나무였습니다. 꽃도 피우고 아름답기도 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쉬십시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용섭 운동가가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된 1987년부터 38년 동안 그와 친구로, 동지로 지내온 박영림 늘해랑보호작업장 원장. 그는 김용섭 운동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지난 추모식 때는 너무 많이 울어서 ‘오늘은 울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짐을 하며 춘천에서 왔습니다. 이제 세월이 가긴 가나 봅니다. 영정사진을 봐도 그때만큼 눈물이 쏟아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소장님, 천국에 가셔서 잘 자리 잡으셨겠지요. 매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때 도청 광장에서 투쟁하던 모습을 뵀는데, 올해 4월 23일 정책 페스티벌을 하는 자리에 소장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아직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고 아직은 어딘가에 계신 것 같고…. 없어지지 않은 카카오톡의 사진을 매일 한 번씩 보곤 합니다.
소장님,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즐거운 생각하면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 나의 은인 김용섭… “영원히 가슴 속에 기억하겠습니다”
이정자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김용섭 운동가가 없었다면 지금을 맞지 못했을 것이라 전했다.
“저는 2008년, 협착증 수술을 받고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 두 번이나 죽으려고 했었습니다. 근데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와중에 김용섭 소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당시에 소장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소장님을 만나며 장애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소장님과 하는 모든 운동이 어렵고 힘들지 않았습니다. 소장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루하루도 잊지 못하는 우리 소장님, 그곳에서는 어떻게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보고 싶고 눈 감으면 생각납니다. 보고 싶고 사랑하고, 그립고 그립고 또 보고 싶습니다.”
권오승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김용섭 소장이 자신에게 ‘은인’이라고 밝혔다.
“배터리 교체 사업으로 처음 만난 김용섭 소장님은 저에게 자립생활이라는 꿈을 꾸게 해주셨고,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좋은 말씀과 위로를 건네주셨습니다.
제가 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야 너 한번 센터에서 지내볼래?’라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제 걱정이 되셨는지 밤늦게라도 센터를 들여다보시고 집에 가시곤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자립을 하던 날 소장님은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소장님 덕분에 지역사회에 나와 자립하며 살 수 있었고 정말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소장님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소장님, 이제 영원한 안식처에서 아픔도 없고 차별도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신 곳 없이 잘 지내시다가 제가 가는 날 행복한 얼굴로 맞아주세요. 항상 잊지 않고 영원히 가슴 속에 기억하겠습니다.”
-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함께 투쟁해 나가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김용섭 운동가가 떠난 뒤, 그의 뒤를 이어 강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과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만남은 천둥 같았고 이별은 번개 같았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를 20년 전에 만났을 때 드디어 강원도에서 장애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를 만나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 떨림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 천둥 같은 떨림이 지금은 저에게 공허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빈 공간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동지들, 우리가 함께 메꿔갑시다. 김용섭 동지를 떠나보내지만 그를 기억하며 함께 투쟁합시다. 우리 함께 자랑스럽게 만나서 언젠가 다시 만날 그에게 우리의 투쟁을 전합시다.”
49재는 헌화로 마무리되었다. 김용섭 운동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그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올렸다. 저마다의 약속과 다짐을 했을 그의 동지들. 남겨진 이들은 김용섭이 꿈꿨던 다음 세상으로, 그를 마음속에 품은 채 함께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