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취임 날, 장애인들 지하철 바닥 기어 국회까지

이재명 후보, 49.42%의 득표율로 제21대 대통령 당선 이 대통령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 만들어가자” 취임식 열린 국회 갔지만 대통령 만날 수 없었던 장애인들 “이제는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 지금은 탈시설” 투쟁 선포

2025-06-04     김소영 기자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 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료들입니다. 남녀로, 지역으로, 노소로, 장애인·비장애인, 정규직·비정규직, 기업가와 노동자, 이렇게 틈만 생기면 편을 갈라서 서로 증오하고 혐오하고 대결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혐오와 대결을 넘어서서 존중하고 공존하고 협력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공동체를 꼭 만들겠습니다.

억강부약(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의 대동세상(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함께 갑시다!” (제21대 대선 당선이 확실시된 4일 오전 1시경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의 연설 중)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9.42%의 득표율로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일 오전 6시 21분 임기를 시작한 이재명 대통령은 같은 날 오전 11시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로텐더홀)에서 취임선서를 진행했다.

장애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취임선서식이 열리는 국회로 향했다. 이들의 손엔 장미꽃과 당선을 축하하는 문구가 적힌 화분이 들려있었다.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 지금은 이재명”이라던 이 대통령. 장애인들은 “이제는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 지금은 탈시설”이라고 외쳤다. 휠체어에서 내려온 이들은 온몸으로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며 국회로 갔다.

박동섭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지하철에서 포체투지(기어가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새 시대 열렸다”고 하지만 여전한 장애인에 대한 탄압

이날 오전 8시 광화문역 승강장에 휠체어를 탄 사람 20여 명, 휠체어 비이용자 40여 명이 모였다.

“새 시대를 열겠다”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장애인에 대한 폭력과 탄압은 여전했다. 휠체어 안전 발판을 방패로 변형해 장애인의 앞을 가로막는 서울교통공사 보안관도, ‘불법 시위’를 멈추라며 퇴거를 요구하는 역장의 경고 방송도 그대로였다.

4일 오전 8시. 광화문역 승강장에 휠체어를 탄 사람 20여 명, 휠체어 비이용자 40여 명이 모여 대통령 취임식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보안관들이 방패로 변형한 발판을 들고 장애인들 앞을 가로막고 있다. 사진 김소영

이형숙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방패를 든 서울교통공사 보안관들이 가득 찬 지하철 승강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구시대’인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장은 “2019년에 장애등급제가 폐지되었지만 이는 ‘가짜 폐지’이다. 6년이 지난 지금은 장애를 15구간으로 나누고 있다”며 “새 시대에는 장애등급제가 진짜 폐지된 세상이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의 발언처럼 2019년 문재인 정부는 장애인을 1급에서 6급으로 나눠 서비스를 차등 제공하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서비스지원종합조사’를 도입해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종합조사표는 개인의 필요와 욕구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기능적 손상을 평가해 점수로 수치화하고 있다. 중증장애인은 더 높은 점수를 받아 더 많은 활동지원 시간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능’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점수를 최대한 받아도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보장받지 못한다.

이에 장애계는 종합조사 수행 기관인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에서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촉구하며 현재까지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 “장애인도 ‘새로운 시작’할 수 있게… 지금은 ‘탈시설’”

오전 8시 45분, 기자회견을 마친 장애인들이 5호선 지하철에 올라탔다. 장애인 활동가 여섯 명이 휠체어에서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날 장애인들은 광화문역에서 여의도역까지 포체투지(기어가는 오체투지)를 하며 이동했다.

지하철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마이크를 쥐고 숨을 가쁘게 내쉬며 발언을 이어갔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포체투지를 한 채 마이크를 쥐고 발언하고 있다. 그의 주변 바닥에는 “이제는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 “지금은 탈시설” 등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사진 김소영

“12월 3일부터 시작된 내란 사태가 6개월 만에 종식됐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를 할 수 있는 시작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식에 가서 새로운 정부는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해 이렇게 지하철을 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장애인을 가두지 말아 주십시오. 장애인을 집단적 수용시설에 몰아넣고 그것을 ‘복지’라고 이야기하는 시대를 끝내주십시오. 장애인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지금은 ‘탈시설’을 보장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표가 강조한 ‘탈시설권리’ 보장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 4월 18일 탈시설장애인 당사자와 탈시설 운동가들은 혜화동성당 종탑 꼭대기에서 15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이 투쟁을 통해 탈시설권리를 부정·왜곡하는 천주교 측, 그리고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어냈다. 각 면담에서 종교계와 보건복지부가 탈시설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에 앞서 전장연은 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장애인본부장인 서미화 국회의원과 정책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해당 정책에는 △장애인거주시설 단계적 시설폐쇄 5개년 계획 수립 △탈시설지원법 제정 △유엔 탈시설가이드라인 이행을 위한 ‘탈시설 로드맵’ 2.0 발표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당시 연 기자간담회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되 탈시설을 일률적으로 조기에 강제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발언해 탈시설권리를 부정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장애계는 “탈시설에 대한 ‘우려’가 클수록 국가가 적극 나서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며 “새 정부는 ‘장애인권리보장법’,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으로 탈시설권리 용어의 복원과 탈시설권리 실현을 위해 어떻게 정부가 책임질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 장애인의 자리는 없었던 대통령 취임식

오전 9시 40분, 장애인들은 이 대통령의 취임선언식이 열리는 국회에 도착했다. 이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한 꽃과 화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에게 전하지 못했다. 취임선언식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인들은 국회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에 장애인권리 보장의 염원을 담은 장미꽃을 꽂아두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식에 꽃을 전달하러 온 장애인들이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사진 김소영
장애인들이 경찰의 저지에도 국회 본관 앞까지 갔지만,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어 취임식장에 들어서지 못했다. 오영철·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왼쪽부터)가 꽃을 들고 있다. 사진 김소영

취임선언식에 5부 요인(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정당 대표, 국회의원, 국무위원 등은 참석했지만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새 시대’를 위해 투쟁해 온 장애인들의 자리는 없었다.

장애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국회의사당역사 내에 있는 ‘한국판 T4 철폐’ 지하 농성장에서 ‘이제는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 지금은 탈시설’ 투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이재명 정부를 향해 ‘장애등급제 폐지를 비롯해 이동권·교육권·노동권·탈시설권리가 보장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를 힘차게 밝혔다.

장애인들이 국회의사당역사 내에서 대통령 취임식 맞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라고 적힌 큰 천막이 펼쳐져 있다. 사진 김소영

오전 10시 45분, 대통령 취임을 맞아 벌인 장애인들의 투쟁은 마무리됐다. 각자 이동하려는 장애인들을 경찰이 막아 세우기 시작했다. 경찰은 “대통령이 지나가니 지금은 나갈 수 없다. 5분 후에 나가라”고 했다. 다른 시민들의 이동은 막지 않으면서 장애인들만 제지한 것이다. 기자가 이유를 묻자, 경찰은 “집회를 했기 때문에” 대통령을 마주하면 안 된다는 명분을 댔다.

같은 시각, 이재명 대통령은 ‘무탈하게’ 국회로 이동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이 대통령의 취임선언식이 거행됐다.

지하철 바닥을 기어 국회까지 왔지만 장애인들은 끝내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자신들을 가로막은 바리케이드에 꽃을 꽂았다. ‘새 시대’는 그렇게 온다. 가로막힌 곳일지라도 무엇이라도 남기고 돌아서는 이들에 의해서.

국회 본관 앞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힌 장애인들. 사진 김소영
바리케이드에 꽂힌 장미꽃들. 그 뒤로 “제21대 대통령 취임”이라고 적힌 천막이 걸린 국회 본관이 보인다. 사진 김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