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작지만 큰 발걸음

'중증장애인들의 삶 다룬 '안녕! 36.5℃ 고통에 주저 앉지 않고 일어선 장애인들의 이야기

2009-12-28     박현진 기자

정신질환이 있는 오빠의 상습적인 폭력, 어렸을 적 입은 성폭행, 자식에게 정이 없는 부모. 누군가 이런 설정을 얘기한다면 너무나 뻔하고 상투적이라고 얼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너무나 극적인 설정이어서 오히려 지루하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설정이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진행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투성과 지루함은 남에게 얘기조차 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바뀐다.

 

누군가 자신의 현재 모습은 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외부 탓을 할 수 없다고 말했던가. 하지만, 극단 판의 안녕! 36.5를 보면 그렇게 만은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중증장애인으로서 집안에서 내내 지내야 하는 영희. 영희를 위해 모든 걸 해주고 싶어하는 엄마가 있지만, 술 먹고 들어와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 때문에 영희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장애인시설에서 원장에게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미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만 어린 시절 상처로 마음을 다 열기 어렵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버림받아 시설에 들어간 철수. 배우가 되고 싶지만, 장애인을 받아주는 곳은 없다.

 

극 속에 나오는 이 세 명 중증장애인의 삶은 일부러 만들어낸 설정이 아니다. 외면하고 싶겠지만 바로 우리 사회 중증장애인의 삶이다. 연출가 좌동엽 씨는 미란이 장애인모델로 활동한다는,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실만 제외한다면 실제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희곡에 반영했다고 말한다.

 

중증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살던가, 아니면 시설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나오지 못한다. 장애여성이 시설에서 성폭행당하는 사건은 잊을만하면 신문에 오르락내리락 한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시설에서 낙태시켜 쉬쉬하는 예도 부지기수다. 대학진학률이 80%를 웃도는 시대에 부모가 창피하다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 장애인들은 49.3%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이다. 세 명의 주인공 중 철수 역을 맡은 문명동 씨는 시설에서 산 적은 없으나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산 세월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을 가지고 연기했다. 그러나 나도 언젠가 시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에 편하게 연기할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희는 노래한다. “꿈꾸지 마라, 처음부터 꿈꾸지 마라.” 처음부터 꿈조차 꿀 수 없는 삶.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는다. 장애인 극단에서 만난 영희와 미란과 철수. 물론 그들은 완전히 상처를 치유했다고, 이제 누구보다 꿋꿋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바뀐 행동, 바뀐 일상이 모여 세상을 바꿔나갈 것임은 확실하다. 그들은 이 불행이 다 외부 탓이라며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작지만 큰 발걸음을 시작했다. 영희 엄마가 삶을 포기하려고 아파트 난간 위에 섰다가 "엄마 미안해"라고 말하는 영희에게 우리 밥 먹자라고 되돌아서는 모습은 소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그들은 다 함께 노래하며 희망을 꿈꾼다.

 

▲삶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연극 안녕 36.5

 

중증장애인의 삶은 나랑 상관없는 삶이라고 유리되지 않고 관객이 자신의 고민을 녹여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도 이 연극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다만, 세 주인공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루다 보니 그들의 인생이 너무 압축적으로 보여져 시선이 분산되는 것은 조금 아쉽다.

 

조촐한 무대지만 나무상자를 이용해 공간의 변화를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가능하게 한 점, 빛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그림자를 통해 상황전개를 설명한 무대구성 등이 눈에 띈다. 피아노 연주의 강약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 음악극의 형태를 취한 점도 이채롭다. 주인공 역을 맡은 임은영, 홍미숙, 문명동 씨의 연기도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30일까지 동국대 소극장. 문의) 017-356-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