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환자도 장애 범주에 포함해야”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사업 토론회에서 제기돼 “에이즈 인권침해 개선 위해 장차법 테두리 내 포괄 필요”

2014-05-09     하금철 기자

▲지난 8일 이른 10시,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사업 원탁토론회'가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렸다.

 

8일 이른 10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등이 주최한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사업 원탁토론회’에서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의 인권 향상과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후천성면역결핍증도 장애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날 토론회는 국가로부터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사업을 위탁받아 수행하던 S요양병원의 인권침해 문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S요양병원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병원이지만, 환자 방치, 성폭행 등 수많은 인권침해 문제를 낳았으며, 지난해 8월에는 결핵성 복막염으로 수술한 뒤 회복을 위해 입원했던 환자가 사실상 병원 측의 방치 속에 입원한 지 14일 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인권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질병관리본부는 결국 S요양병원의 위탁계약을 해지한 바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병원에서 지내던 50여 명의 환자가 옮겨갈 대체병상 마련에는 질병관리본부가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마저도 요양병원 마련 등을 촉구하는 차별 진정에 대해, 이미 위탁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차별시정조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지난 4월 말 기각 결정을 내놓으며 사실상 질병관리본부에 면죄부를 줬다.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은 현재 상황이 직접적으로는 질병관리본부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점검해 봐야 하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나누리+ 권미란 활동가는 현재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서비스의 문제점에 대해 “의료법 시행규칙상 '전염성 질환자는 요양병원 입원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에이즈 환자는 100% 입원거부를 당한다”라면서 “복지부에 문의한 결과 에이즈 환자가 ‘전염성 질환자’인지 여부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병원 측의 입원 거부를 환자 측에서 대응하기는 매우 어려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권 활동가는 또 “대부분 요양서비스를 민간이 운영하고 있고 공공 요양시설도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어 에이즈 환자에게 적절한 요양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며, 장기요양서비스를 매개로 발생하는 인권침해나 차별에 대해 모니터링 및 평가, 구제시스템도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사회공공연구원 제갈현숙 연구위원

이에 사회공공연구원 제갈현숙 연구위원은 한국과 독일의 장기요양제도를 비교하며 대안 모색의 방향을 제시했다.

 

제갈 연구위원은 “한국의 장기요양제도는 65세 이상 노인 또는 64세 이하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 대상자를 제한해 에이즈 환자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도록 하고 있지만, 독일의 경우 노령에 초점을 맞추거나 연령제한을 두지 않아 에이즈 환자도 제도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라면서 “이는 일본 개호보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어 제갈 연구위원은 “한국의 경우 에이즈 환자가 전국적으로 1만 명도 안 되는 상황이고, 사회적인 낙인이 심해 당사자들만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 형성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그렇다면 에이즈에 대한 별도의 지원체계를 요구하기보다는 전체 사회보험의 틀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보험이 에이즈 환자들도 포괄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라고 제기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인권침해 문제를 일으킨 S요양병원에 남아 있는 환자들을 위한 대체병상 확보와 관련해서는 당장 질병관리본부를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보건복지부에서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 대책을 내놓도록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이훈재 교수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이훈재 교수는 구체적인 대책으로 “에이즈를 장애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실제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에이즈를 법정 장애인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라면서 “그렇게 된다면 현재 장애인을 대상으로 국립재활원을 설치해 종합적인 재활시스템을 운영하는 것 등 지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교수는 “현재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방치하고 있지만, 장애인의 경우 그나마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있어서 제재가 가능하다”라면서 인권침해 예방을 위해서라도 후천성면역결핍증을 장애범주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갈현숙 연구위원도 이 교수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현재 법적으로도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에이즈 환자가 장애 범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라고 설명했다.

 

제갈 연구위원은 “인구로는 1만 명, 요양병원 입소 인원으로는 고작 65명밖에 안 되는 에이즈 환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국가가 6개월이나 허비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동안 에이즈 환자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라도 장애인차별금지법의 테두리 내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에이즈 환자 당사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들은 “에이즈라는 낙인에 장애라는 낙인이 하나 더 덧씌워질 뿐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장애등급을 받는다고 해서 더 혜택받는 것도 없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는 게 더 중요하다” 등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장 혜택받는 것의 문제를 넘어 장기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해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사실 에이즈 인권운동의 성장은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란 점을 떠올려보면, ‘장애’라는 관점을 통해 에이즈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고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며 “또한 부수적인 효과로 장애인운동에서 고민하는 ‘장애의 사회적 정의’에 대한 논의를 더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이즈의 장애범주 포함 여부와는 별도로 에이즈 인권운동이 장애인 탈시설운동의 성과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는 “장애인운동 진영에서는 생활시설 중심의 복지체계에 대한 반성과 함께 탈시설, 지역사회 자립생활 중심의 사회복지서비스 체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다”라면서 “감염인 환자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입원이나 입소를 통해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하는지, 사회복지서비스가 필요한지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수요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지역사회 복귀 정책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장 변호사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방문조사를 해야 하는 다수인 보호시설로 장애인거주시설, 노인요양시설 및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만을 규정하고 있다”면서 “감염인 요양시설의 인권실태가 노인요양시설과 유사한 점을 비추어 봤을 때 방문조사 대상에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상의 감염인 요양시설’도 추가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제기된 논점을 추후 더 풍부한 논의를 통해 에이즈 인권운동의 방향을 설정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으고 토론회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