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비장애를 가르는 권력체계에 물음을 던지다
비마이너·전장야협 연속특강③ - 황지성 여성주의 장애학 연구자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장애학의 주제들
비마이너와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는 '빈곤과 차별의 시대를 넘어 장애인운동의 전망 찾기'라는 주제로 연속 특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9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9월 4일까지 격주 목요일에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진행됩니다. 비마이너는 전 강의 내용을 요약해 싣습니다. _ 편집자 주 3.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황지성 여성주의 장애학 연구자) 4.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 것인가?(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진정한 우리’, ‘진정한 여성’은 없다.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
여성주의는 ‘여성’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을 나눠 특정한 성을 억압하는 권력, 전형적인 ‘여성’과 ‘남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배제하는 구조 등에 맞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언뜻 당연하게 보이는 사회 구조에 질문을 던져, 이런 구조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여성주의는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성적 차이로 구성된 사회 구조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 혹은 자연의 섭리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 뒤에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억압, 배제하는 권력이 있음을 폭로한다.
여성주의의 방식은 세상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고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 구조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에 물음을 던지고 실상을 밝혀내는 장애학의 방식도 여성주의와 유사하다.
비마이너와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가 격주 목요일마다 진행하는 연속특강 세 번째 시간은 이렇듯 장애와 질병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기획됐다.
강사로 나선 여성주의 장애학 연구자 황지성 씨는 장애와 질병을 규정하는 사회 구조를 밝히고, 앞으로 장애인운동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를 모색했다.
먼저 황 연구자는 여성주의가 여성만을 위한다는 오해와 달리, 성별로 권력을 나누는 총체적인 체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애를 여성주의적으로 본다면 장애를 특수화하기보다 장애-비장애를 가르는 권력체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을 장애-비장애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남들과 다른 몸으로 말미암아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구분되는 듯하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사회에서 겪는 억압의 경험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위치 짓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황 연구자는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청각장애인은 통념상 듣는 기능이 손상된 ‘장애인’이지만, 일부 청각장애인은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청인과 다른 언어로 소통할 뿐이며, ‘장애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만성질환, 나이 듦과 같이 신체·정신적 기능이 ‘손상’된 상태라도 보통 장애인으로 불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반면 여성이나 유색인종은 신체·정신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여겨져, 과학을 통해 이들의 ‘열등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들은 장애인으로 여겨지지 않으나, 특정한 시기나 공간에서는 이들도 장애인으로 간주한 적이 있다.
더욱이 같은 장애인이라도 장애남성과 장애여성이 느끼는 장애 경험은 같지 않다. 장애남성에게 장애는 역동적일 것을 주문하는 남성성의 상실을, 장애여성에게는 소극성을 강조하는 여성성의 강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성적 차이 등 사람을 구성하는 다른 정체성보다 언제나 우선할 수 없다.
황 연구자는 “장애 범주는 잘 정의되기 어렵다. 사회적 상황과 젠더·인종 등에 따라 유동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라며 “장애가 다른 어떤 차이들과 떨어진 독자적인 차이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장애 범주에 관한 문제는 곧 장애를 규정하는 관점과 연관된다. 장애에 관한 관점은 장애를 개인의 손상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의료적 관점’과 법·제도·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유발한다는 ‘사회적 관점’으로 나뉜다.
그러나 황 연구자에 의하면 여성주의 장애학은 의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 모두를 비판한다. 몸의 손상과 사회적인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험천만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다 장애를 입은 사람, 환경오염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장애아 등 손상과 사회적 상황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장애를 유발하는 사회 구조를 모두 제거한다고 해도 장애인이 손상으로 겪는 고통이 모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황 연구자는 사회적 관점이 자칫 ‘건강한 장애인’을 전제해, 실제로 장애인들이 손상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것을 외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황 연구자는 최근 여성주의 장애학에서 새롭게 제안된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소개했다. 정치적·관계적 모델은 손상과 장애 모두 사회 내 권력관계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관계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렇기에 정치적·관계적 모델에서 보는 장애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황 연구자는 “모든 사람의 몸은 불안정하다. 어떤 외부의 오염이나 손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은 하나도 없다.”라며 “누가 장애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원래 모든 사람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황 연구자는 “사람의 몸이 완전하다고 하는 바로 그게 이데올로기, 정상신체 중심주의이자 권력이다”라며 “천박한 박근혜 정권에 맞서 싸우더라도, 이러한 것들을 밝혀내는 게 우리의 궁극적 투쟁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황 연구자는 장애와 재생산 문제를 다뤘다. 황 연구자는 최근 의료기술과 생명공학기술의 발달로 장애를 부정하는 담론과 지식이 퍼지고 있으며, 이에 최근 장애학에서 장애와 재생산 영역을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의 임신, 출산 등은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세계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단종시술이 이뤄진 바 있으며, 장애인으로 의심되는 태아의 낙태를 허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모자보건법 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에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재생산과 관련한 의료적 지식과 생명공학기술은 장애를 없애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생물학자들이 우성 인자와 열성 인자의 유전을 발견하자, 근대사회는 ‘열등한’ 인자를 말살하는 우생학을 만들어냈다. 태아의 상태를 감지하는 기술은 태아의 장애를 확인하고 장애를 예방, 제거하는 기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으로 임신 전 단계에서 유전자 검사를 통해 부모의 장애를 알아내고 장애 형질을 없애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얼마 전 공중파 방송에서 유전성 장애를 제거한 여성의 사례가 소개됐다. 그녀는 의료기술을 통해 장애 없는 아이를 출산해 대중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황 연구자는 “의료기술이란 것도 결국 실험실에서 따로 만들어져 인간에게 전달되기보다, 인간의 욕망이 의료기술을 만드는 것”이라며 “정상신체 중심사회의 욕망, ‘미래에 장애는 없어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의료기술을 만들어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황 연구자는 “사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미래에 장애를 완전히 없애거나 치료할 순 없다”라며 “다만 기술의 존재는 ‘장애를 없애야 한다’, ‘없어져야 한다’는 인식만을 확산할 뿐 실제로 의학으로 없앨 수 없고, 장애의 현존을 못 보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장애로 말미암아 산모와 태아의 생명이 위독할 때조차 기술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장애아를 기르며 고통받는 장애인 부모가 생명공학에 기대 아이의 장애를 없애려는 시도를 매도할 수만도 없다.
황 연구자는 “발달하는 의료기술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가 됐다”라며 “이때 경계해야 할 것은 미리 무엇인가에 대해 선악의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황 연구자는 “‘장애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인가’, ‘장애라는 게 보존됐을 때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이익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논쟁할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과제를 남기며 이날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강의를 마쳤다.
아래는 황지성 연구자의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 강의 전문이다.
[ 강의 전문 펼처보이기 ▼ ]
황지성(아래 황) :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황지성이고요. 저는 연구 활동가로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장애여성공감이라는 여성주의 장애인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작년에 활동을 중단하고 지금은 초등학교 특수교사로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학교에서) 퇴근하고 바로 왔는데요.
오늘은 ‘거부당한 몸’(수전 웬델 저, 황지성 등 역, 그린비, 2013)이라는 책을 기반으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 해서 장애학과 같은 여러 소수자 학문이 발전했는데요. 미국 북미지역 배경으로 본다면 인종·성 정체성·여성과 같은 소수자 학문과 장애학이 함께 발전했죠. 여성주의가 던지는 질문이 서로 다른 소수자 집단의 운동을 촉발하고 발전시키고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웬델의 책은 여성주의와 장애학의 만남을 이론적으로 처음 시도한 책 중 하나로써 굉장히 유명한, 고전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이고요. 북미지역에서는 실제로 장애학 교과서로 많이 쓰였어요. 이 책을 번역한 이유도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기 때문이에요. 물론 2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론 지형은 많이 변화하고 발전했어요. 실제로 웬델은 이 책 안에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 같은 차원의 문제를 다루진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거든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현재 뜨거운 장애학 이론지형은 게이 레즈비언으로부터 많이 비롯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청각장애인이면서 게이 혹은 레즈비언인 경우, 이 분이 장애 이야기하면서 성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세상의 모순이나 정치적인 힘의 권력관계를 보는 눈이 다원화됐겠죠. 여러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어쨌든 이 책은 이후의 이런 흐름에 있어 중요하게 동기부여를 하는 책이라고 소개를 드리고 싶습니다. 책 보신 분들 있으세요?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는 분은? 수전 웬델은 선천적 장애인은 아니었고 여성학 교수였어요. 그런데 본인이 어느 날 질병으로 쓰러졌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자기가 여성주의 학자로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온 인식론이 있었는데, 질병 경험이 자신의 인식론을 흔들어버렸다고 서문에 이야기합니다.
웬델이 중요한 것은 지난주 HIV 관련해서 윤가브리엘님 강의도 있지만, ‘만성질환이 장애 범주에 포함되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에요. 에이즈란 질병은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을 가지는데, 요즘 흔한 만성질환으로 암, 당뇨 등 많죠.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야기되는 장애인보다 현대사회의 만성질환 범주의 환자가 훨씬 많죠. 또 사회가 굉장히 복잡해지고 다원화되면서 장애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를테면 삼성 반도체 백혈병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이냐를 제기할 수 있을 건데요.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 사회적인 것과 결부된 질병들의 경험들이 막 쏟아지고 있어요. 장애나 질병에 대해 던져지는 질문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는데, 장애인운동은 어디까지 이걸 인식하고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책이)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서설이 길었는데,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주의로 보는 장애와 질병입니다. 먼저 여성주의가 뭔지 간단히 설명하고, 누가 장애인인가 명명·범주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또 장애인에 대한 관점·접근방식의 문제와, 재생산·장애 그리고 시간성의 정치 이렇게 다뤄보려 합니다.
1. 페미니즘/여성주의
황 : 저는 여성주의를 특정 집단, 즉 여성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성주의에 대한 오해는 여성주의가 ‘여성에 대한 학문’이라는 건데요. 그런데 여성주의는 그렇지 않고 총체적 권력과 지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혹시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저, 교양인, 2005)을 혹시 보시거나 아시는 분 있나요? 페미니즘 개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이에요. 사실 여성주의와 장애를 본다고 했을 때,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부당한 몸’을 보기 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꼭 좀 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어요. 여성주의에서 핵심 골자가 되는 문제가 장애를 이야기할 때도 공통된 골자이기도 합니다.
남성의 관점으로부터 여성, ‘나’를 정의하지 말고, 서구(이성애자, 백인, 비장애인, 부자, 서울사람…)와의 관계로부터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 ‘진정한 우리’, ‘진정한 여성’은 없다.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서구/‘우리’,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서구/남성의 권력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사상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어려우신가요? 그러니까 (여성주의는) 이 세상을 젠더 권력, 성별 권력으로 해석하고 분석하고 비판하자는 것이지, 진정한 ‘여성’, ‘우리’, 그런 걸 찾자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성과 남성으로 자연스레 분리되고 조직된다고 말하는 그런 남녀이분법 자체가 권력이라는 겁니다.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는데, 느낌 오시나요?
참가자 1 : 잘 모르겠어요. 남자와 여자, 타자와 나를 나누는 것 자체가 권력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그런 이분법을 받아들이면 그런 권력이 만들어진다는 것인가요?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황 : 사실 여성주의 현실정치투쟁은 뭔가요?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하잖아요. 여성이라는 것을 지워버릴 순 없는데, 그건 정치전략이에요.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에 여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죠. 하지만 하도 이런 것들이 정치투쟁의 의제가 되니, 여성주의가 이런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반론이 ‘남자가 가정폭력 당하는 건 어떠냐’, '남자가 성매매 하는 건 어떠냐’하는 건데요. 즉 남자와 여자의 집단 대립 문제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성별 간 대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별 권력으로 세상을 구획하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사고하자는 것이 여성주의 운동의 골자입니다. 여성주의가 정치투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여성주의 인식론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죠.
참가자 2 : 저는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왔는데요. 남성·여성 이렇게 구분하지만, 사실 간성(여성과 남성의 특징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고, 트렌스젠더도 전형적 남·여로 보지 않잖아요. 성별을 둘로 나누는 게 폭력이라 생각해요.
황 : 트렌스젠더의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매개가 될 것 같아요. 세상에는 남자 아니면 여자화장실 둘로 나뉘어 있지만, 실제 그 화장실에 들어가는 게 진정한 남자, 혹은 진정한 여자만 있나요? 이렇게 명확하게 두 집단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사이에 되게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은 오로지 이분법적으로 조직되고 그렇게 보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 부분은 같이 나중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고요.
이렇게 지식에 관한 문제, ‘세상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볼 것이냐’ 문제를 여성주의가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 관련해서도 기술적으로 세부적인 현실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보다 인식론을 이야기했으면 해요. 젠더 이분법과 같이 장애/비장애로 나누는 권력구조를 보자는 취지가 있습니다.
2. 누가 장애인인가? 명명·범주의 문제
황 : 여러분은 누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께서 생각하는 장애인의 상이 있으신지요?
참가자 3 : 나는 내가 장애인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단지 몸만 불편할 뿐, 비장애인하고 똑같아요.
황 : 몸만 불편할 뿐, 장애인이 아니다. 그럼 장애는 단지 몸이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죠.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는 게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인 거죠.
참가자 2 : 저는 외국에서 장애 범주가 넓다는 게 신선했거든요. 가령 영어를 못하는 제가 외국에 가면 그 나라에서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을 사회적 장애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장애 범주가 (한국과) 다른 것처럼 보였어요. 이렇게 장애를 넓게 보면 장애 낙인을 약화하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
황 : 이 이야기는 오늘 계속 이야기할 부분이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분이 외국에 가서 그 나라 언어를 못하는 것도 장애의 일종일 수 있는데요. 농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인 중 일부 집단은 자기를 장애인이 아닌 다른 문화집단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것의 요지는 이런 것 같아요. 여러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본인이 지닌 차이는 장애로 구성될 수 있다는 거죠. 웬델이 책 서두의 두세 장에 걸쳐 범주 이야기를 끈질기게 해요. 모든 경우의 (장애) 범주 가능성을 다 이야기하고 있어요.
물론 장애 범주는 일정 정도 필요합니다. 복지적으로, 정책적으로 대상을 규정하는 데 필요하겠죠. 하지만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 16개 장애범주 구분과 같은 엄격한 범주 구분은 장애의 정치학에 있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웬델이) 조곤조곤, 차분하게 길게 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책을 통해 꼭 보시면 도움될 것 같아요.
장애 범주는 현실 장애인운동의 담론을 가지고 비교해가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싶어요. 첫 번째 질문은 ‘장애는 다른 모든 차이에 우선하는가’ 인데요. 우리 사회만 해도 장애는 굉장히 강한 정체성이죠. 장애에 대한 억압이 심한 사회일수록 그 장애인이란 정체성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잖아요. 다른 사회적 억압 중에서도 장애가 강력한 억압의 원인이 되고,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게 강력한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건 맞아요.
그런데 실상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제는 지금 장애운동이 강력한 정체성 정치를 하는 것(‘당사자주의’)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소위 비장애 여성학자인 정희진 씨의 책(‘페미니즘의 도전’)에 장애 관련 일화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노들야학에서 강의한 이야기도 있고요. 여기서는 장애여성공감에 관해 이야기하신 걸 인용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장애’+‘여성’인가? 장애여성은 일주일에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가? … ‘공감’에서 레즈비언 인권 운동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강좌에 참석한 중증 장애여성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가해자(이 경우에는 동성애 혐오증)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복잡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맥락으로 구성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가난한+장애+여성, 여성이자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이중억압이라고 흔히 이야기하죠. 그것의 전제는 장애든 여성이든, 본질적인 정체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건데요. 하지만 ‘장애여성은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거죠. 장애인이자 여성으로, 이렇게 복합적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거죠.
이렇게 소위 이중 억압의 피해자인 장애여성이 레즈비언 인권운동가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대요. 왜? 내가 가장 억압받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거였죠.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억압의 형태를 장애여성인 내가 인식하지 못해 충격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이 일화에서 장애는 모든 다른 억압에 우선하는 것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권력 구조나 억압의 형태 중 하나인 거죠.
그다음에 ‘우리 장애인은 동질한 경험을 경험하는가’를 이야기해볼 수 있는데, 일정 부분 그렇죠. 장애인 대부분은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활동보조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이건 현장 투쟁에서 중요한 정치학이에요.
그런데 사실 누구도 동질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장애남성과 장애여성이 다른데요. 장애가 의존성과 결부되는 점이 있는데, 남성과 여성이 이런 것과 겹치는 게 다른 것이죠. 남성은 (장애를 입으면) 손상된 남성이 돼요. 남성은 진취적이고 활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남성성에 상처를 입는 거죠. 반면 여성은 순응해야 한다, 복종하고 유순해야 한다는 젠더 코드가 있는데, 이게 장애와 겹쳐지면 더 증폭되죠. 딱 맞아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소수자 집단의 남성들이 가정폭력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나요. 장애인들끼리 부부인 경우가 많은데, 장애남성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언어폭력, 감정폭력, 성적폭력과 같이 온갖 폭력을 저지를 때가 있어요. 왜 그럴까요? 손상된 남성성을 회복하려고 더 약한 장애여성에게 푸는 거죠. 이렇게 장애라고 같은 장애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다르겠죠. 북미에서는 장애학이 발전했지만, 백인중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해요. 흑인 장애인은 장애보다 흑인이라는 인종이 더 중요하거나, 장애와 인종이 겹쳐져서 백인 장애인과 다른 경험을 하고 있기도 하죠.
아까 말했듯 자신들은 장애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부 농인 집단이 있어요. 청각장애인은 일반적인 규범과 기준으로 보면 듣는 기능이 손상된 장애인데요. 이들 스스로는 자신을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죠. 반면 만성질환, 트라우마, 암, 에이즈, 나이 듦 같은 건 장애인이 겪는 것과 똑같은 사회적 불이익과 불편을 초래하지만 장애 범주에 포함 안 되죠?
물론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낙인 효과가 있어서 거부하는 정체성이 될 수 있어요. 내가 만약 에이즈인데 장애까지 얹어지면 이중 낙인이 될 수 있죠. 여러 가지 다른 정체성에서 장애를 받아들이고 나를 장애인으로 여기는 건 다른 문제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한국 장애인운동에서 만성질환과 같은 게 장애 범주로 포함되는가와 같은 문제가 활발하게 논쟁이 됐나요? 웬델은 이를테면 장애와 나이 듦을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미국에서는 장애인단체가 나이 듦을 장애로 포섭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요. 나이 듦은 뭘 못 하는 건데, 장애인은 신체가 약간 불편하거나 다를 뿐이지 뭘 못하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주장했어요. 나이 듦의 낙인을 장애에 덧씌워 시민권을 못 얻게 하려는 게 아니냐는 건데요.
결론적으로 웬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이 듦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뭘 못하게 되는 것도 문제를 제기해야죠. 누구나 사람은 나이 드는데, ‘나이 들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여기는 것은 이 사회에서 부여한 신체적 규범인 거죠. 이것도 결국은 건강한 신체 혹은 장애 없는 신체 중심주의인 거죠. 그렇기에 나이 듦과 장애를 구분하려 들지 말고 공통적인 운동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고 웬델이 이야기해요. 그 공통된 목표가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죠.
장애범주 문제에 대한 상상력을 좀 더 넓히기 위해 생각해볼 것들이, 역사적으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애인 취급 받았던 역사가 있잖아요. 20세기 초, 최근까지도 남녀 뇌 구조가 다르다는 식으로 의학적으로 ‘여성이 열등하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죠.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구획하는 오랜 역사가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그리고 ‘장애여성’은 ‘여성’ 정체성이냐 ‘장애인’ 정체성이냐 에서 계속 논란이 되는 범주이고요.
‘문화적 장애인’도 있는데, 이건 처음 들어보셨죠? 문화적 장애가 여러 의미가 있는데, 문헌을 보면 외국에 트랜스어빌리티(transability)라고, 트랜스젠더가 성별을 변경하듯 트랜스어빌리티는 소위 ‘멀쩡한’ 내 몸을 장애로 전환하겠다는 거에요. 스스로 몸을 절단하거나 청력을 상실하거나 하는 걸 원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집단이 있는지 궁금한데요. 이렇게 스스로 절단하고 자기 몸을 훼손해서 장애인이 된 사람을 장애인의 범주로 넣을 수 있을까요?
이 사람들은 휠체어에 탄 상태, (남들이 보기에) 장애인인 상태가 역으로 ‘온전한’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트렌스젠더가 성별변경 시술받으려면 젠더정체성장애라는 정신과 진단을 받아야 하듯, 그들도 신체통합성장애라는 정신과 진단을 받아서 몸 변형 시술을 합법화하자고 주장해요.(현재까지 신체통합성장애는 ‘정신장애진단및통계편람(DSM)’ 상 정신장애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며, 트랜스어빌리티의 신체 변형술 또한 합법적 의료시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
이건 현재 퀴어이론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데, 장애학쪽에서는 이론화가 안 된 분야에요. 이 분야를 연구하는 퀴어이론가 니키 설리번이 작년 한국에 방문하기도 했는데요. 이 사람들(문화적 장애인)에게 장애 상태라는 건 소위 ‘멀쩡한 신체’라는 점에서 장애에 대해 굉장히 다른 상상을 하게 하죠.
결론은, 장애 범주는 깔끔하게 정의되기 어렵다는 거죠. 사회적 상황과 젠더·인종 여러 가지에 따라 유동적이고요. 장애가 다른 어떤 차이들과 떨어져 순수하게 독자적인 차이는 아닌 거죠.
퀴어가 이를테면 성소수자 집단에서 쓰는 언어인데, 성소수자도 이렇게 범주가 잘 정의되지 않는 동네거든요. LGBTQI(여성·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성정체성에 의문을 지닌 사람, 간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첫 글자를 딴 단어)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이 있고요. 트렌스젠더도 그 안에 동성애자, 이성애자가 있어 이중으로 복잡해져요. 또 이 범주 안에 없는 무성애에 대해서도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도 비판하죠.
퀴어 쪽은 비교적 제도화되지 않았잖아요. 반면 장애는 사회 복지적으로 강력하게 제도화가 이뤄졌고, 우리나라도 장애인복지법에서 15~16개 장애 범주가 있죠. 이런 제도화된 범주가 되게 강력해서, 마치 장애라는 고정된 범주가 있는 것 같죠. 퀴어는 그렇지 않은 동네라 범주 논쟁이 더 잘되는 것 같아요. 퀴어 쪽은 법이나 제도로 범주가 구획되지 않은 곳이기도 해서, 무궁무진한 논쟁이 이뤄지고 있어요.
퀴어(queer)가 뭔가요? ‘변태’라는 뜻이고 말하자면 욕인데, 그 말을 성소수자운동집단이 가져다가 자긍심의 언어로 바꿔치기한 거잖아요. 크립(crip)은 한국말로 번역된 적절한 말은 없는데 ‘불구’, ‘병신’이라는 뜻이에요. 북미에서는 마치 퀴어처럼 장애인운동 집단도 크립을 자긍심의 언어로 쓰면서, 동시에 장애인에게 강력한 범주·명명의 문제를 돌파할 단어로 채택되는 추세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 말로 불구, 병신이라고 하면 어감이 센데요. 여기서 크립과 같은 새 단어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범주 구분 문제를 장애인운동이 앞으로 활발하게 논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웬델은 책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요.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주의에 진정한 여성, 우리는 없다, 그런 것들을 위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장애와 관련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웬델이 하는데요.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해요.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장애를 정의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단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받고, 잠재력을 계발할 좋은 기회를 부여받으며, 지역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규정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필요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필요가 장애에 대한 사회의 유일한 관심사일 때 “장애인”이란 범주는 쓸모가 없을 것이다.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중에서
사실 모든 사람이 상황에 필요한 것을 받고 어떤 신체적 조건에서도 지역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게 맞겠죠. 이러한 원리는 만성질환, 암환자, 뇌성마비 장애인을 가릴 것 없이, 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돼야 합니다.
웬델은 이게 ‘동등한 목표’라고 하는 건데요. 노화와 만성질환을 장애로 포함할 것이냐, 하면 포함하는 게 맞죠. 포함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사회적 자원을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주는 건데요.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에게만 필요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이렇게 되면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쓸모없는 것이죠. 이 부분이 웬델의 통찰력이 빛나는 부분이에요.
3. 장애에 대한 관점, 접근방식
황 : 장애의 명명이나 범주의 문제는 장애에 대한 관점과 곧바로 연동되는데요. 장애인운동 활동하시는 분들은 익숙하실 텐데, 장애를 보는 관점은 크게 ‘개인/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이 있습니다.
의료적 모델은 장애 문제를 개인의 문제, 개인의 질병, 개인의 손상, 개인의 장애로 보는 것이죠. 이건 사회의 잘못이 아닌, 개인의 몸에 차별의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장애인들은 수용시설에 분리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깨기 위해 사회적 모델이 제시된 것이죠. 개인의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장애를 만든다, 즉 손상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문제라는 것이죠. 사회적 모델은 지금도 되게 유효해요.
생물학적인 실재로서의 장애[손상]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장애는 딱 잘라서 구분되지 않는다. 사회적 요소와 우리 몸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건강과 신체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 위험천만한 노동한경, 아동학대나 방임, 낮은 공중안전 의식, 공기․물․식량의 오염에 의한 환경 파괴, 과다한 노동, 스트레스, 빈곤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의 몸을 손상시키는 사회적 요소들은 인종차별, 성차별, 이성애중심주의, 나이주의, 계급차별, 부와 교육에서의 불균등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특정 집단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중에서
그런데 여성주의와 장애를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을 다 비판해요. 사회적 모델에만 동의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개인적 손상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장애는 딱 잘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회적 요소와 우리 몸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건강한 신체기능에 영향을 미치잖아요. 위험천만한 노동환경, 아동 학대와 방임, 낮은 공중안전인식, 환경파괴, 과다한 노동. 요즘 과다한 노동이 또 많이 이야기되는데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들이 죽거나 질병에 걸리게 돼도 그걸 전혀 보상받을 길이 없어서 문제가 있죠. 그리고 아프거나 병이 들면 노동에서 배제되고, 그러면 또 더 아프거나 병이 들게 되는 상황입니다.
저도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는데 팔이 아파서 깁스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비정규직 노동자잖아요. 내 몸이 성하지 않은 것은, 깁스해야 한다는 건 너무 위협적이에요. 괜히 스스로 잘릴 것 같은 불안감에 깁스 일부러 안 하고 일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암 질환자 같은 경우는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인데, 직장에 다녀도 그 질환을 숨기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이려 폭주하다 (병세가) 더 나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게다가 빈곤하면 더 아프기도 하죠. 이러한 예를 보면 손상과 사회적 요소가 딱 붙어있죠. 신체적 손상이 생물학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 속에서 발생하거나 서로 증폭시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의료 자체도 따로 놓고 보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입니다. 요즘 의료민영화로 의료 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기는 한데, 의료민영화가 사실 장애인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거라 장애인운동에서도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할 문제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적 모델, 사회적 모델로 나누는 게 문제인 이유는, 생물학, 손상, 의료 모두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기에 몸과 사회를 이분법으로 보는 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또한 사회정의가 몸의 손상으로부터 오는 생생한 현실을 모두 해결해줄 수 없죠. 의료적 개입이나 치료에 관심을 두는 장애인들이 많아요. 아픈 장애인이 많지만, 의료적 모델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장애인 운동에서는 건강한 장애인이 오랫동안 전형으로 여겨졌습니다. 아프거나 치료받는 문제에서는 침묵해야 했던 그런 것 없었나요?
참가자 3 : 장애인들이 척추가 아프거나, 디스크 수술도 많이 해요. 어깨수술로 많이 고생하고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황 : 맞아요. 근데 사회적 모델이 하나의 억압이 되었던 거에요. 만약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거 봐라. 문제는 너에게 있지 않았느냐’라는 화살이 장애인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손상도 정치적이라고 할 때,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게 같이 가야 할 문제라는 거에요. 그래서 장애인운동이 의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 못했지 않았나요?
그래서 장애여성이면서 활동가 겸 연구자인 엘리슨 케이퍼(Alision Kafer)라는 사람은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제안해요. 모든 건 정치라는 것이고, 손상이든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이는 실체 모두가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치적이란 건 사회 내 권력관계와 맞물린다는 의미이기에 또한 관계적이죠.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장애인에 누가 포함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임의로 장애로 규정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장애범주를 넓히는 노력은 장애가 의료적 범주에만 갇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엘리슨 케이퍼
요즘 장애등급제 투쟁을 생각해보죠. 정부는 끊임없이 의료적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는 게 옳다고 하잖아요. 근데 장애인이라는 범주를 우리가 생각하는 최대치만큼 확 넓혀버리면, 의료적 모델에 갇히는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겠죠. ‘장애가 꼭 어떤 신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적인 것도 고려하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가 되기 때문이죠.
물론 장애등급제와 싸울 때는 어떻게 싸우나요? 팔을 들 수 있는지, 혼자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고 1급, 2급을 정하는 이런 천박한 논의 속에서,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장애인운동 진영이 전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죠. 그건 현실 정치투쟁을 위해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이 굉장히 험난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현실 정치투쟁을 하는 것과 지향으로써 인식론을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은 차이가 있죠. 그런 지향이나 그림을 가지는 게 필요하잖아요. 정치적·관계적 모델은 우리의 지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인식론을 넓혀주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정치적·관계적 모델은 또한 장애를 고정된 정체성으로 묶어두지 않고, 몸의 불안정성과 함께 유동하는 것으로 사고하자는 건데요. 모든 사람의 몸은 불안정하죠. 어떤 외부의 오염이나 손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은 하나도 없어요.
사실 끊임없이 누가 장애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원래 모든 사람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 거죠. 오히려 완전하다고 말하는 너희가 (모든 사람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못 보고 있다는 걸 말이죠. 그리고 사람의 몸이 완전하다고 하는 바로 그게 이데올로기, 정상신체 중심주의이자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말하는 게 우리의 궁극적 투쟁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가 이 천박한 박근혜 정권과 싸울지라도 말이죠. 밑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지만, 위에서는 고상한 백조처럼 현실투쟁과 이상을 같이 가져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하는 게 운동에서 오는 지침을 막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연대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죠. 이를테면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놓고 보면, 단순히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은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두 개의 성별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거기에 맞는 몸만이 정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권력이고 문제라고 말하는 정치학이어야 하죠.
그와 같이 완전한 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몸이 있다고 말하는 규범들을 상대화하고 다르게 보자는 정치학이라는 점에서 장애운동과 퀴어운동과 상당히 통하는 지점이 있죠. 그런데 장애인운동이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운동에서 당사자주의의 병폐에 대해 김도현 씨가 지적하기도 했고, ‘당사자라고 다 당사자는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잖아요.
좀 더 나아가서 고민해야 할 것이, 장애인에 대해 가장 많이 붙이는 수식어가 ‘특수하다’인데, 이게 정상신체중심주의의 규범을 받쳐주는 논리잖아요. 장애인진영에서도 그 논리를 활용하는데, 그걸 왜 그렇게 말하겠어요? 그런 논리가 콩고물이 떨어지잖아요.
장애인은 특수하다는 논리는 일제 강점기, 군부독재 시대, 그리고 지금도 먹히는 이야기잖아요. 지금도 새누리당을 일부 장애인 집단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이유가 뭘까요. 새누리당의 논리와 자기네와 맞는 게 뭘까요. 장애인을 억압하는 공고한 논리와 맞물려 떨어지면서, 그에 동조했을 때 자원이 떨어지잖아요.
실명을 밝히긴 어렵지만,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장애 연구하는 어떤 분의 최근 논문에서, 기존 인권과 권리담론이 장애인 권리를 말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장애인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시혜에 기댈 때 장애인 권리가 보장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권운동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시혜를 다시 봐야 한다는 논리로 나아가요.
권리, 인권담론의 한계를 이야기했는데요. 장애인차별금지법(아래 장차법)을 놓고 보면, 그 법의 제정과 시행은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죠. 하지만 장애인에게 권리가 있고 장애인도 똑같은 시민이니 차별하지 말라는 장차법이 잘 시행되나요? 모든 사람에게 권리가 있다고 하는데, 또 차별하는 사람들과 정당한 편의제공을 하지 않는 이들도 권리가 있다고 해요. 권리와 권리가 맞붙어서 어디 갈 데를 모르는 거죠.
물론 인권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인권, 권리 담론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우리가 보고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인권이 있다고 했을 때, 왜 모두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지 그 결들을 잘 돌아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거죠. 장차법도 마찬가지로 장애인의 속도, 신체적 차이, 이렇게 장애인이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지적하지 못하고 단지 장애인도 인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차별하면 안 된다는 선언에 그친다는 겁니다.
이건 장차법과 장애인 인권, 법, 몸의 문제에 대해 글을 쓰신 한상희 교수님의 지적이기도 한데요. 권리 담론, 시혜 담론 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지향을 지니고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요?
4. 재생산, 장애 그리고 장애를 보존하는/하지 않는 미래
황 : 제가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여성학에서 장애 관련 논문을 썼는데, 재생산 관련 문제에요. 재생산은 이를테면 임신 출산의 권리잖아요. 여성들은 재생산 권리가 있다고 선언되는데요. 폭력 없이 성관계하고, 안전하게 임신하고 출산할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다양한 여성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장애여성이 그중 한 사례가 되죠.
우리나라 모자보호법에 우생학적 낙태허용 조항이 있어요. 낙태가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우생학적 사유가 있을 때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했죠. 그건 장애인 인권을 위협하는, 문제 있는 법조문이라고 해서 장애인운동에서 ‘모자보호법 폐지하라’, ‘수정하라’고 기자회견도 했었고요.
저는 부모님이 장애인이에요. 우생학적으로 우리 부모님의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죠. 유전자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우생학이지만, ‘태어난 개체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도 우생학이잖아요. 장애가 있는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은 그래서 우생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개체인 거죠.
그래서 제가 장애와 재생산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논문을 쓸 즈음에 우연히 장애여성공감에 있는 중증장애여성들이 대거 임신과 출산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그런데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금 서구 장애학계에서 재생산은 뜨거운 이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엘리슨 케이퍼도 이걸 연구했는데요. 왜냐하면 의료과학기술, 생명공학기술의 발전과 (미래라는) 시간성의 정치 때문이거든요.
제가 논문 쓰고 나서 비마이너에도 장애여성의 재생산정치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재생산도 정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를테면 의료과학 기술이 있어 미래의 장애를 예방할 수 있어요. 생명공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했고, 그러면서 기존 생명 개념에 대한 인식을 다 파괴하고 있어요. 생명, 장애·비장애, 가족과 같이 전통적으로 안정적이고 고정적이라 믿었던 것들을 말이죠.
유전적 장애가 있는 경우 의료과학기술을 통해 장애가 있는 유전형질을 없애고 비장애 형질을 골라 출산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죠. 유명한 사례로 엄지공주(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편)가 있었는데, 이 서사가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환영받았어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장애를 없앤 훌륭한 엄마라 칭찬받았거든요. 여기에 있는 전제는 장애는 미래사회에서 없어지는 게 바람직하고, 장애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는 논리인 거죠.
그런데 장애 형질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의료적으로 일부러 장애를 골라 출산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한 거에요. 엘리슨 케이퍼가 책에서 소개한 미국 사례가 있어요. 의료기술, 생명공학 기술이라는 게 게이, 레즈비언의 가족구성 문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청각장애가 있는 레즈비언 부부가 선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남성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서 이들은 당연히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 행위다’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죠.
의료기술이 미래에 장애를 없애라고 횡포를 부리고 있는데, 산전 진단, 선별 낙태, 인공와우 수술, 줄기세포 연구, 각종 치료·예방술이 다 같은 맥락에 있는 거죠. 황우석 사태가 그 단적인 예가 되고요. 아직도 일부 척수장애인분들이 황우석 지지하잖아요. 의료기술이란 것도 결국 실험실에서 따로 만들어져 인간에게 전달되기보다, 인간의 욕망이 의료기술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정상신체 중심사회의 욕망, ‘미래에 장애는 없어져야 한다’는 시간성의 정치가 특정한 의료기술을 만들어내죠.
장애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장애에 대한 공포,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라고 보는 전제가 장애를 예방하려는 욕망에 기여한다.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중에서
웬델이 1996년에 이 말을 했어요. 이 말은 바로 지금 장애인운동이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이슈가 된 것 같아요. 황우석 사태가 보여주는 생명공학기술 발달, 산전 진단, 장애 선별 낙태기술, 이 모든 것들이 미래에 장애를 없애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깔고 가는 건데요.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래에 장애가 보존되어야 합니까? 장애는 없어져야 합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웬델은 책에서 나의 고통을 낫게 하는 치료제가 있다면 환영하지만, 질병을 갖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는데요. 장애를 긍정하는 거죠. 장애가 보존되어야 하는 거냐, 장애라는 게 보존됐을 때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이익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논쟁할 준비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웬델의 말을 인용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가지지 못하고 접근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갖는다. 이러한 지식에는 고통 받는 몸으로 사는 방법에 관한 것이 있고,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지식이다. 그 지식은 우리 문화를 확장시키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 수전 웬델
# 질의응답
참가자 3 : 내가 아는 부부가 둘 다 뇌병변장애인이에요. 유전 때문에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태어난 아이를 보니 비장애인이었어요.
황 : 청각장애 레즈비언 부부가 청각장애남성의 정자를 받더라도, 100% 청각장애 아동이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결국 확률의 문제인데요. 사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미래에 장애를 완전히 없애거나 치료할 순 없죠.
다만 기술의 존재는 ‘장애를 없애야 한다’, ‘없어져야 한다’는 인식만을 확산할 뿐이에요. 실제로 의학으로 없앨 수 없는 장애의 현존을 못 보게 하는 거죠. 소위 말해 돌연변이도 많잖아요. 제가 일하는 특수학급에 청각장애 자매가 있어요. 그런데 엄마는 청인이었어요. 엄마가 유전자 검사를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대요. 장애 유전자 형질을 집어내는 기술은 이런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