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부모의 비장애인 딸'의 시각

어느날 나는 '장애인의 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식은 만들어지는 것...장애는 ‘차이’이자 ‘다양성’

2015-03-16     TurnToAble 시루

나는 나의 부모님이 ‘장애인이 되었다’고 느끼며,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장애인의 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에 다닐 어린아이 시절에는 장애가 있는 아버지의 전동 스쿠터에 끼여 앉아 같이 놀러 다녀도 아무런 이질감이 없었고, 그냥 평범한 부모 자식의 관계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초등학교 입학식을 기점으로 부모님의 장애는 차별과 구별을 짓는 기제로써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정의 기능에서 장애로 기인한 큰 불편함도, 그 어떤 문제도 없었음에도, 사회에 들어간 순간부터 부모님의 장애는 장애가 되었고 나는 그런 장애인의 딸이 되었다. 2001년, 나는 초등학교 입학식에 홀로 참석했다. 보통 초등학교 입학식은 부모님과 함께 참석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척 어른들은 부모님께 장애인 부모가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애 혼자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몰래 전했고, 부모님은 결국 나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으셨다. 아니, 정확히는 참석하지 못하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은 국가의 임대아파트이고,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장애가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내 또래의 ‘장애부모를 둔 비장애인 자녀’들이 나를 제외하고도 제법 많았고,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었음에도 그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장애인 부모님과 함께 입학식에 참석한 친구는 없었다. 대부분 다른 친척분의 손을 잡고 오거나 아니면 나처럼 혼자 있었다. 처음 보는 어른들, 그 손을 잡고 있는 처음 보는 또래들, 낯선 환경과 어색한 분위기,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족 외의 ‘집단’ 속에 들어가는 막연함 등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지만, 나는 ‘장애인의 딸’이었기에 그 혼란의 폭풍 속에 혼자 내던져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비장애인 자녀를 둔 장애인 부모들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음에도, 자녀의 입학식이라는 사회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자신을 부모로서 사회 속에 표면화할 수 없었다.

 

▲ 나를 포함한 비장애인 자녀를 둔 장애인 부모들은 별 다른 일정이 없었음에도, 자녀의 입학식이라는 사회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자신을 부모로서 사회 속에 표면화할 수 없었다. ⓒTurnToAble

 

​입학식에 혼자 참여한 것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시에 내가 살던 곳 근처에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친구도 있었고, 한 부모 가정의 친구도 있었기에 입학식에 혼자 온 사람이 나뿐이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이 장애가 있다는 게 문젯거리가 아니었으니까. 1학년 6반을 배정받고 친구들과 친해지기 시작해야 했던 학기 초, 어떤 과정을 걸친 것인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짓궂은 친구가 내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반 친구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야! 시루네 부모님 장애인이래 ㅋㅋ.”

 

어린 나의 친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몇몇 그 친구의 무리들은 ‘병신’ 등의 거친 말을 덧붙이며 놀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장애는 놀림거리였고, 왠지 모르겠지만 장애인은 비웃음과 비속어에 ‘당연히’ 노출되는 집단이었다.

 

“부모님이 장애인이니까 시루 너도 장애인이겠네?”

 

한 친구가 무심코 던진 농담과 놀림이 섞인 이 한마디는 어렸던 나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장애가 놀림거리가 되는 분위기를 주변에 의해 폭력적으로 내재화했으며, 나도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장애인이 아냐!”라며 부정하고 울어버리기밖에 하지 못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별하여 타자화함으로써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초등학생 때에는 홀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나는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다녔다. 나에게 장애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숨겨야 하는, 언제든지 들키면 놀림거리가 되고 소외당하게 되는 요소로써 각인되어 버렸다.

 

초등학교에는 특히 학부모들의 참여 빈도가 매우 잦았다. 각종 학예회, 운동회, 심지어는 담임선생님의 생일 때마저도 온갖 간식거리를 마련하셔서 교실에, 학교에 찾아오시곤 하셨다. 친구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찾아오시면 주변 친구들에게 소개해드리며 자랑스러워했고, 학부모들은 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셨다. 나는 그것이 내심 매우 부러웠다. 비록 사회적으로 손가락질받거나 부끄러운 소외집단인 장애인 부모님이었으나 나도 자랑하고 싶은 부모님과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들이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다. 특히 우리 엄마도 다른 학부모들과 어울리며 평범한 학부모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부모가 장애인임을 들킬 것’을 각오하면서도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에 엄마를 초대했다.

 

▲다소 불안한 심정으로 학부모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속에 우리 엄마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눈으로 찾다가, 운동장 구석 정문 근처에서 전동 스쿠터에 앉아 운동장 속에서 내 모습을 찾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TurnToAble

 

반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운동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이사이 주변을 열심히 둘러봤다. 점차 하나둘씩 체육복 차림을 한 반 친구들과 학부모들이 간식거리와 음료 등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하셨다. 대부분 어머님이셨는데, 운동회 내내 자신의 자녀들을 챙겨주시거나 담임선생님과 대화하시거나, 학부모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시거나,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종목에 참여하시면서 운동회를 함께 즐기고 계셨다. 다소 불안한 심정으로 학부모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속에 우리 엄마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눈으로 찾다가, 운동장 구석 정문 근처에서 전동스쿠터에 앉아 운동장 속에서 내 모습을 찾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전동스쿠터를 이끌고, 심지어 도시락이나 간식거리도 없이 빈손으로 찾아온 한 여성의 존재감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다. 주변의 어린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도 엄마를 힐끗힐끗 쳐다볼 뿐, 다른 학부모들에게 하듯이 살갑게 인사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임에도, 장애라는 요소는 엄마의 학부모라는 자격을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 틈틈이 엄마를 찾아가 같이 떠들고, 친구도 소개하러 데려갔지만, 그 누구도 우리 엄마를 보통의 학부모처럼 대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던 엄마는 결국 학교 근처 식당에서 나와 식사를 한 후 먼저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운동회에 엄마를 데려온 것을 매우 후회했다. 운동회에서 엄마의 장애를 커밍아웃(?)해버린 이후 학교생활 내내 나는 친구들의 “너네 엄마 장애인이야?”라는 질문 공세와 학부모, 선생님들의 동정어린 눈빛 등에 시달렸다. 4학년이나 되어 어느 정도 상식이 생긴 친구들은 더 이상 내가 보는 앞에서 나를 장애인의 딸이라는 이유로 놀리거나 비하하지는 않았으나, 그 시선과 나를 대하는 태도, 인식의 핵심은 ‘동정’으로 바뀌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그때의 내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 가엾고 불쌍한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장애는 차이가 아닌 ‘결함’이었던 것이다. 그야 예전에 욕먹고 비난당하던 위치보다는 덜 괴로웠지만, 장애인을 타자화한다는 것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역경 속에 있는 딱한 환경 속의 집단으로 바라보는 동정의 시선은 나를 지극히도 부끄럽게 했다. 부모님이 장애로 불편해하는 일상의 사소한 모습들이 떠오르며, 장애는 정말 결함이고 장애인은 불쌍한 사회적 약자이기에 당당할 수 없으며, 나는 그런 불쌍한 장애인의 딸이므로 자연스레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되면서 참을 수 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 도덕 속에서도 장애인은 배려하고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 객체였고, 대부분이 ‘동정’이라는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운동회를 거친 이후 나의 학창시절 속에서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장애라는 것은 나를 부끄럽게 하거나, 약자로 만드는 기제가 되어버렸다.

 

‘장애인 부모를 모시면서도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고등학생’이란 타이틀을 얻어 작게나마 세간의 이슈가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여겼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인 서울대학교라는 타이틀은 나의 작고 부끄러운 배경인 가난과 부모의 장애를 오히려 빛내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또한 수많은 기사와 주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역시 나는 ‘부모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쾌활하며 공부도 훌륭히 해낸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역경 극복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실제로 내 환경이 공부하기에 큰 어려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의 장애 여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부함에 있어서 가난했던 것이 가장 큰 역경이었음에도, 장애를 핵심 결함으로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은 내 어려움의 원인을 부모의 장애로 소급시켜버렸다. 그런 분위기를 나 또한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나의 뛰어난 학벌로 불쌍한 우리 부모님은 더 이상 숨지 않고, 격리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할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이미 한 차례 실패했던, 우리 엄마 평범한 엄마 만들기 프로젝트를 재개하고자 결심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설이나 시선의 불편함 때문에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카페, 패밀리 레스토랑을 비롯한 괜찮은 음식점, 그 어떤 곳도 자유롭게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쌍한 우리 엄마를 데리고, 자랑스러운 딸내미와 함께 당당히 데이트를 즐기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심 무서움과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엄마에게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밥도 먹자고 얘기했을 때 뛸 듯이 기뻐하는 엄마를 보며 미안한 감정이 들면서, 엄마와 함께 밖에 나갔을 때 느껴지는 시선들과 마주쳐야 할 불편함이 무서웠고 불안했다. 여느 평범한 모녀가 집 밖에서 즐기는 사소한 일상이, 장애인 엄마와 비장애인 딸에게는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매표소의 예쁜 언니는 장애인용 좌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상영관의 가장 앞줄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면서 죄송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 장애인이어도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구나!’ 싶어서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반인’들이 누리는 문화생활을 장애인 엄마와 함께 팝콘에 콜라까지 곁들여 즐겼다는 사실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TurnToAble

 

‘일반인’들이 즐기는 문화생활을 탐내서 온 후줄근하고 불쌍한 약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신경 써서 외모를 꾸미고 엄마에게도 예쁜 화장을 해주고 깔끔한 옷을 준비해 드렸다. 그리고도 불안해서 평범하지 않은 모녀가 그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덜 받을 수 있는 시간인 평일 조조 시간대로 볼 만한 영화를 선택했다. 주변의 정보도 없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표소에서 직접 직원에게 물어볼 때까지 전동스쿠터를 탄 장애인이 상영관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엄마와 내가 매표소에 다가가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마냥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직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질감’ 또는 ‘동정’, ‘연민’ 아니면 드문 것을 보는 듯한 사람들의 눈길과 수군거림 등이 역시나 부담스럽기만 했다. 매표소의 예쁜 언니는 장애인용 좌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상영관의 가장 앞줄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면서 죄송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 장애인이어도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구나!’ 싶어서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관람한 탓에 뻐근해진 목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내용도 맘에 들었고, ‘일반인’들이 누리는 문화생활을 장애인 엄마와 함께 팝콘에 콜라까지 곁들여 즐겼다는 사실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영화 관람이 끝난 이후 같은 건물 1층에 있던 일식집으로 내려가 점심 식사까지 성공했다. 사실 그 날 내내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한 장애인 엄마에게, 자랑스럽고 당당한 비장애인 딸이 호강을 시켜준다는 생각에 자아도취되었던 면도 강했던 것 같다. 내 인식 아래에는 문화생활은 당연히 비장애인이 즐기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장애인 집단 중에서 우리 엄마는 나라는 개념차고 자랑스러운 딸 덕분에 그 영역도 한 번쯤 누려본 수혜자라는 건방지고 어리석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무슨 생각에서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얼결에 TurnToAble(턴투에이블)이라는 신설 장애인권동아리에 가입하면서부터 장애를 대하는 내 인식은 전환의 가장 큰 기점을 맞았다. 모임을 가지면서 점차 장애인을 친절과 배려의 대상이라 생각하며 당연히 습관처럼 해왔던 ‘착한’ 타자화와 객관화에 경각심이 들기 시작했고, 점차 이런 태도가 굉장히 ‘무례한’ 짓임을 피부로 느껴갔다. 또한 정상성이라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사회 속에 정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표준화된 기준은 정말 절대적이고 합리적이며 타당한가? 이 역시도 구성된 산물이 아닌가? 어떤 섬에서는 청각장애인이 많아서 수화를 병행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던데, 왜 지금 내가 사는 사회는 소리를 들어야만, 시력이 좋아야만, 두 다리와 두 팔, 열 손가락이 다 움직여야만 정상인이라는 벼슬을 얻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과연 이 표준화된 정상성은 바람직한가?’

 

가장 가까이서 장애를 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20년에 걸쳐 굳건하게 내재화해왔던 사회적 표준이라는 틀이 흔들려갔다. 장애는 결함이 아니고,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도, 비난의 대상도, 불쌍하고 안타까운 집단도 아니었다. 단순한 ‘차이’, ‘다양성’일 뿐이었다. 이와 같이 사고가 변해감에 따라 모든 건물 및 시설들이 너무나도 장애 친화적이지 않고, 협소한 대상을 표준으로 만들어져있음을, 사람들의 인식과 이데올로기 또한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저 엄마와 데이트를 하면서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 장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학교 네트워크 속에 표면화하지 못했던, 오히려 비난과 놀림의 원인이 되었던 수많은 나의 경험들이 ‘장애가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휠체어나 스쿠터가 이동하기 어려운 계단이나, 좁은 출입문들, 이동하기엔 좁은 식당 구조, 영화를 보려 해도 상영관 맨 앞자리로 밀려나야만 하는 건물 구조와 같이 장애인을 차별하고 소외되게 하는 온갖 물리적 조건들과 사회적 구조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전동스쿠터를 탄 엄마와 함께 대로를 걷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고, 생일선물로 적당한 옷을 고르는 과정 속에서, 과거처럼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하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장애인’ 엄마와 놀러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 ‘엄마’와 놀러 나온 것이었기에. ⓒTurnToAble

 

1월 후반쯤, 엄마 생신에 맞춰서 엄마와의 데이트 코스를 계획해봤다. 고심 끝에 집 근처에 맛있는 식당들과 구경할 만한 수많은 가게가 들어서 있고, 카페나 선물을 살 만한 곳도 많은 대형 백화점을 선정했다. 전동스쿠터를 탄 엄마와 함께 대로를 걷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고, 생일선물로 적당한 옷을 고르는 과정 속에서, 과거처럼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하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장애인’ 엄마와 놀러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 ‘엄마’와 놀러 나온 것이었기에, 먼 옛날 유치원을 아빠와 함께 등하교하던 시절처럼 그 어떤 이질감도, 어색함도, 부담감도 느끼지 못했다. 직원분의 “어머니세요? 대단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어도 우쭐하거나 민망해하는 일조차 없었다. 장애인 엄마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는 일이 정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사실 밥 먹을 곳을 고를 때 조금 곤란하기도 했다. 백화점 내의 많은 식당이 문턱이나 계단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테이블 사이 간격이 좁다든가, 테이블의 높이가 과하게 높거나 낮다든가, 뷔페식으로 이동하지 않고서는 이용하기 어렵다든가 하는 자잘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어려움이나 불편함의 원인이 더 이상 장애를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에서 장애인이 배제되는 수많은 구조를 문제로 삼아, 언짢았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몇 군데 돌지 않았는데 적절한 구조를 갖춘 가게를 발견해서 식사도 맛있게 즐기고, 근처에 있던 카페에 들어가서 디저트와 함께 수다스럽게 떠들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놀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와 엄마의 ‘평범한’ 데이트가 드디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인식은 만들어진다. 사회적 분위기와 이데올로기, 문화도 다 구성되는 산물일 뿐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다. 학교라는 사회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으로 겪었던 장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 동정이라는 시선, 타자화, 객체화 등의 사회적 산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장애를 가장 가까이서 접해왔던 ‘장애인 부모의 비장애인 딸’이라는 위치에 있던 나 역시 그런 사회적 산물에서 떨어지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길고 긴 시간이 걸렸는데, 장애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기만 한 사람들은 어디까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장애인 당사자들도 이로부터 자유롭기는 한 걸까? 어떻게 보면 나의 ‘장애인 부모의 비장애인 자녀’라는 장애와 매우 가까우면서도 멀기도 한 위치 때문에 조금 더 빨리 의구심을 갖고 이런 허황한 당연함을 문제시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 안에서 새로운 당연함이 그 자리를 갈음했다. 장애는 그냥 차이와 다양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정말로 동아리라는 전환점을 거친 이후 이것을 강렬하게 느낀다. 바라건대, 이제는 이런 말이 ‘장애는 잘못된 게 아니라 다른 거예요:)’라는 식의 공익 캠페인에서나 할 법한 무책임하고 선심 써주는 듯한, 멀게만 느껴지는 식상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사람과의 사귐 속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떠한 활동을 함에 있어서도 어떠한 권리를 누림에 있어서도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를 바라며.

 

* 이 글은 서울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TurnToAble(턴투에이블)'이 3월 초 펴낸 문집 ‘THISABLE’ 창간호에 실렸습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비마이너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