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차별·혐오에 맞서는 아시아 연대 필요해"
아시아 성소수자 운동, 국가적·사회적 차별에 직면 “성소수자 해방, 국가 내에서 실현 어려워”...초국적 연대 강조
1990년대 한국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성소수자 운동은 이제 20여 년에 이르는 역사를 갖게 됐다. 성소수자 운동은 음지에 있었던 성소수자들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이들을 권리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했지만, 한편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보수 기독교 세력으로 대표되는 혐오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성소수자 운동이 등장한 다른 아시아 국가도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이에 16회 한국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아래 조직위)는 9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화재보험협회 빌딩에서 2015 아시아 LGBT 컨퍼런스를 열고 혐오에 맞서는 각국의 상황과 성소수자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날 컨퍼런스에서는 한국의 한채윤 조직위 퍼레이드 기획단장을 비롯해 필리핀의 패트릭 에스피노 라드라드당(Ang Ladlad) 집행위원, 중국의 리 레이레이 상하이프라이드(Sanghai Pride) 조직위원회 아웃리치 매니저, 싱가포르 페어린 초아 핑크닷 싱가포르(Pink Dot SG) 조직위원회 대변인 등이 초청됐다.
서로 다른 종교·정치적 분위기 속, 성소수자는 차별 받아
아시아 각국에서 성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성소수자 운동이 대두하면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이로 인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두드려졌다. 각국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들은 서로 다른 정치·사회·문화·종교적 지형 속에서 각자 겪고 있는 성소수자 차별의 양상들을 소개했다.
우선 필리핀의 경우,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존재하지만, 종교적으로 동성애 혐오가 조장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리핀은 1571년 스페인 식민지 강점 전까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으로 규정되지 않는 영적 지도자 바바일란(babaylan) 전통이 있었으나, 식민지 시기 스페인 점령 정책과 천주교 정착으로 이분법적 성 개념과 가부장제가 도입되었다.
이에 성소수자 운동에서의 두드러진 성과 이면에 성소수자들은 노동 시장에서 차별을 경험하거나 학교에서 이성애 기반 규범을 강요당하고 있다. 또한 미디어와 종교 친화적인 정부 정책은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낙인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매년 자긍심 행진(Pride March, 1969년 미국에서 일어난 성소수자들의 항쟁인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고자 197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소수자 거리 행진으로 매주 6월 마지막 주에 열림)때마다 천주교 단체들이 행진 장소에서 동성애 반대 선전전을 진행하기도 한다.
싱가포르는 국가가 성소수자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상황이 더 심각하다. 싱가포르는 1959년부터 50여 년간 리콴유의 보수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이 집권하면서 진보적인 사회 운동을 탄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에 대응해 남성 간 성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 377A조, 모든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한 검열법 등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한 이민자가 많은 사회 특성상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 그룹이 형성돼, 이들에 의한 동성애 혐오 행동도 거세다.
1990년대 생겨난 성소수자 단체들도 경찰의 불시 단속으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당시 게이 단체 ‘People Like Us’는 싱가포르의 공공안전과 질서에 유해하다는 이유로 합법 단체로 승인받지 못했다. 이후 인터넷을 통해 커뮤니티 활동을 이어오던 성소수자들은 2007년을 기점으로 377A조 폐지 운동을 전개했으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반발에 막혀 해당 조항은 그대로 유지됐다. 2014년 싱가포르의 성소수자 행사인 '핑크닷 싱가포르' 개최 과정에서 기독교도, 무슬림 등으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중국 또한 사회운동을 억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013년 중국 후난 성에서 게이퍼레이드를 개최하려던 활동가들이 구류되는 등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종교가 배척되면서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인한 혐오 세력은 뚜렷하지 않지만, 동성애를 타락한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이라는 이유로 금지하면서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해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또한 중국 정부는 한족에게 1가구 1자녀 정책을 통해 이성 간 결혼을 강제하면서, 동성애자들의 결합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1980년대 경제 개방 이후 국제사회의 권고를 따라 1997년 동성 간 성행위 합법화, 2001년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 삭제 등 전향적인 정책 변환을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의 사례를 전한 리 레이레이 상하이프라이드 조직위원회 아웃리치 매니저는 성소수자가 사회에 모습을 비추면서 중국 사회의 주요 전통이나 제도와 충돌할 경우,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무지가 혐오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의 성소수자들도 군인의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의6을 비롯한 동성애 차별적인 제도, 동성애에 대한 보수 기독교 단체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2007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보수 기독교 단체의 거센 반대로 제정 무산된 후, 혐오 세력이 국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혐오와 무지에 자긍심으로 맞선 아시아 성소수자들
이에 대해 아시아 각국 성소수자들은 자국의 상황에 맞게 혐오와 무지에 맞선 성소수자 운동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움직임을 상징하는 것은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자긍심 행진'이다.
먼저 필리핀은 1994년부터 자긍심 행진인 메트로 마닐라 LGBT 프라이드마치(Metro Manila LGBT Pride March)를 열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행진을 기점으로 필리핀 성소수자들이 거리로 나와 차별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며, 성소수자 친화적인 클럽, 바 등 업소와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자긍심 행진은 1994년 필리핀 정부에서 부가가치세 부과에 항의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등 다른 사회적 사안에 대한 연대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필리핀에서는 2015년 기준 82개 주 중 2개 주, 1687개 지방자치단체 중 7곳에서 차별금지조례가 제정됐고, 2003년에는 세계 최초 성소수자 정당 라드라드당이 창립돼 2010년 전국선거 출마가 허가됐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1회 퀴어문화축제를 열고 자긍심 행진을 진행한 후 15년간 끊임없이 자긍심 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행진 50여 명, 축제 200여 명이 참가했던 1회 대회와 비교해 10주년인 2010년 3000여 명, 지난해에는 무려 2만 명으로 참가 규모가 성장했고, 참가자들도 성소수자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시민 등으로 외연이 확대됐다. 성소수자들이 존재를 사회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여론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성소수자 단체들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유보한 서울시에 항의해 서울시청에서 농성하는 과정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지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농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중국과 싱가포르는 자국의 상황에 맞게 변형한 성소수자 대회를 열고 있다. 비록 자긍심 행진을 진행하지는 못하지만, 각종 문화 행사를 통해 성소수자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들 국가 성소수자 단체의 일차적 목표다. 2009년 이후 중국에서는 상하이 내 성소수자와 외국인 성소수자들이 함께하는 상하이프라이드, 싱가포르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사랑할 권리를 외치는 핑크닷 싱가포르를 개최하고 있다.
국가적 혐오에 대항하기 위한 범아시아 연대 필요해
자국내 성소수자 권리 확보를 위한 활동과 더불어 각국 활동가들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범아시아 연대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의하기도 했다.
한채윤 기획단장은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지난 자긍심 행진뿐 아니라 올해에도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한국 내 대응과 더불어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라며 “아시아 공통의 성소수자 인권을 논의하는 것이, 멀리 있는 서구적 인권주제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체감하는 기회가 되지 않나 싶다. 그런 차원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있어 범아시아적 시각이 필요한 듯하다”라고 필요성을 강조했다.
리 매니저는 “아시아 국가들끼리 성소수자 수용에 대한 상반되는 입장들이 수입되고 수출되곤 한다. 일본의 포르노는 중국에서 불법임에도 대중적이며, 중국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케이팝(K-POP) 또한 일부일처제의 이성애 사랑과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전파한다.”라며 “초국가적 상호작용의 영향으로 성소수자 해방은 지역적인 수준에서 추구될 수 없다. 동시에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법적 발전이 도미노 효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질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라고 초국가적 연대의 가능성을 점쳤다.
이에 더해 패트릭 에스피노 라드라드당(Ang Ladlad) 집행위원은 “현재 범아시아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고 성소수자뿐 아니라 모든 개인의 차별을 없앤다는 공통점이 있다”라며 “종교적 영향이 강한 서아시아와 비교해 동아시아의 성소수자 인권이 그나마 나은 측면이 있는데, 우리가 누리는 권리를 유지하면서 전반적인 성소수자 권리를 더 쟁취해야 한다”라고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조직위는 오는 6월 9일부터 퀴어문화축제를 시작할 예정이다. 축제 기간인 오는 13일 자긍심 행진과 공식 애프터 파티, 18일부터 21일까지 퀴어 영화제가 열린다.
▲이날 컨퍼런스에는 각국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를 비롯해 100여 명이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