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빚어내는 장애학생의 꿈, “도예강사 되고 싶어요”
장애청소년 직업전환 교육팀, ‘흙수다’를 만나다 10년을 이어온 도예수업...“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해 줬으면”
“너 마른오징어 알아?”
“마른 오징어가 뭐예요?”
“얘들이 곱게 자라서 마른 오징어도 모르네. 너희들 시장에 가면 맨날 보는 거 있잖아.”
“아, 알아요. 마른 오징어.”
“너 지금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지금 이건 마른 오징어 같아.”
(일동) “하하하”
비가 오는 18일 토요일, 부천 춘의동에 위치한 ‘통합예술나눔터’(아래 통예나) 작업실을 찾았다. 허름한 주택가 1층에 있는 작업실에 도예 수업을 받는 네 명의 발달장애 학생이 모여 앉았다. 여러 작업 도구와 재료들이 가득한 좁은 작업실에 장애학생들의 수다스러운 대화까지 가득차 분위기는 더욱 부산스러웠다. 이들의 모임 이름이 왜 ‘흙수다’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양병창, 이호근, 정다한, 신용섭. 고등학교 3학년인 용섭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등학교 2학년 동갑내기들이다. 부천 고강동 또는 춘의동에서 초등학교부터 같이 다녔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 후 학교가 달라져도 같은 복지관에 다니며 늘 만나는 사이였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도자기 사총사, ‘흙수다’의 멤버가 됐을까? 또, 이들이 흙을 빚으며 그리고 있는 꿈은 어떤 모습일까?
“당신의 삶은 통합예술입니다.”
호근이는 거미를 좋아하는 아이다. 통예나 입구 쪽 문에 붙은 흙수다 멤버 소개 엽서에도 호근이의 특기를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맨손으로 거미잡기, 거미 종류 말하기’. 가끔 산과 들로 나가 거미를 잡는 것은 호근이의 일상에서 매우 소중한 일부다. 하지만 이 때문에 친구들을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주머니에 거미를 넣고 다녔기에 학급 친구들이 호근이를 꺼렸다. 게다가 자폐성장애가 있는 호근이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벽을 쌓게 만들었던 ‘거미’라는 존재는, 호근이가 도자기를 만나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호근이는 자신의 가장 큰 관심사인 거미를 도자기에 그려 넣었고, 작품 전시회에서 이를 본 사람들도 호근이의 작품 설명을 듣고 거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거미는 호근이 자신만의 관심사, 자신만의 작품 소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더 큰 예술의 소재가 된 것이다.
흙수다를 지도하고 있는 이호정 통예나 대표가 추구하는 ‘통합예술’이라는 것 또한 이런 구체적인 삶의 변화 속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술계에서 최근 ‘통합예술’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주로 서로 다른 장르 간의 통합을 얘기하는 방식이죠. 하지만, 저희가 추구하는 것은 ‘결과’에 초점을 맞춘 이런 1차원적인 통합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처음 기획 단계에서부터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각자가 가진 능력을 나누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나는 과정 그 자체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당신의 삶은 통합예술입니다”라는 통예나의 선명한 비전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통예나는 ‘예술’이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넘어, 예술과 삶을 통합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로 내몰린 이들과 예술을 통해 다시금 세상을 만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때문에 통예나가 만나는 사람들도 장애학생뿐만 아니라, 장애아동 부모, 가정 폭력을 피해 쉼터를 찾아오신 어르신, 한부모 가족 아이들까지 매우 다양하다.
‘흙수다’ 또한 이런 시도의 하나로 시작됐다. 흙수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부터이지만, 이호정 대표와 아이들의 인연은 그보다 더 오래됐다. 여러 학교와 복지관 등에서 도예강사로 활동해오던 이 대표는 부천 고강동 복지관에서 진행한 도자기 수업을 통해 당시 예닐곱 살이던 ‘사총사’를 처음 만났다. 그러던 것이, 아이들과 흙을 만지며 작품을 만들고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에 푹 빠져, 수업은 어느새 10년을 넘겨 진행되고 있다.
10년을 했으니, 흙수다 아이들도 이제 반은 도자기 전문가다. 단지 도자기를 손으로 빚는 것뿐 아니라, 재료의 준비, 토련, 가마에 굽기 등 도예의 전 과정을 이들이 직접 한다. 게다가 지난해 9월 출전한 전국장애인도예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했고, 올해 5월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열린 국제장애인도예공모전에서도 ‘특선’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다.
“장애학생 직업교육, 왜 이것밖에 없을까?” ... 직업교육으로 한 걸음 내딛다
물론, 이제 내년, 내후년이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해 사회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도예 수업의 목표도 예전 같지는 않다. 이 대표는 아이들이 단순히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도예강사를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서 직업과정으로 바리스타나 세차, 임가공 등을 배우긴 해요. 그런데 그런 일은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속상했어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이 이런 것밖에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흙수다는 이제 본격적으로 장애청소년 직업전환 교육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올해 고3인 용섭이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초등학교, 복지관 등에서 진행하는 도예수업에 보조강사로 뛸 준비도 하고 있다. 이미 인천에 있는 문화예술 대안학교에서 보조강사로서 실습을 마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아직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자녀들이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부모님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에게 “아이들도 할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지만, 생각보다 힘든 상황에 부딪치게 됐을 때 서로 상처가 될 수 있기에 섣불리 말할 수만은 없다. 그래도 이 대표는 “조심성만 가진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라며 “그래서 부모님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고민도 있다. 바로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임금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이다.
“다른 장애인 작업장들을 많이 가 봤어요. 대부분 한 달에 10~15만 원 정도 주더라고요.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보니까 그렇게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당연히 최저임금도 못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우리는 최저임금 정도는 주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그걸 우리만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통예나는 도자기 만드는 일을 장애학생들의 미래 직업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고 있다. 단순히 외부 도예수업에 보조강사로 나가 강사비를 받는 정도가 아니라,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정식 보조강사로 고용할 계획도 갖고 있다.
흙으로 빚어내는 장애학생의 꿈
흙수다에게는 도예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나 지역사회와의 교류도 중요한 활동의 한 부분이다. 지역 문화예술 단체들이 하는 여러 행사에도 빠짐없이 나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연대활동도 한다. 지난 7월 21일부터 열리고 있는 제17회 변방연극제에도 흙수다 멤버들이 만든 머그잔이 답례품 용도로 납품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19일 오랫동안 머물렀던 춘의동 작업실을 떠나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했다. 춘의동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 통예나 작업실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전보다 다소 넓은 공간을 얻어 흙수다 멤버들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공간에서도 흙수다는 전과 다름없이 흙을 빚을 것이다. 여전히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도자기에 소중한 꿈을 담아 낼 것이다. 이들의 꿈을 응원하고자 한다면, 전화기를 들어 후원 문의 전화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 통합예술나눔터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로 248번지 86 현해탑 프라자 203호
- 블로그 : http://blog.naver.com/tongyena- 후원 문의 : 032-655-4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