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감염인 치과진료 위해 진료실을 비닐로 싸? “차별이다”
서울시 보라매병원 HIV감염인 차별, 인권위 진정
많은 사람이 치아 건강 유지를 위해 가장 많이 받는 치과 진료인 스케일링. 하지만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은 이 간단한 치료를 받는 것조차 차별과 불편함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병원도 아닌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HIV감염인 A씨는 최근 스케일링을 받기 위해 서울시 보라매병원 치과를 찾았다. 치과에서는 처음엔 매우 친절하게 안내를 해줬고 예약 날짜도 어렵지 않게 잡았다. 그러나 예약 날짜를 며칠 앞두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날짜를 연기하자”는 것이다. A씨가 무슨 준비가 필요하냐고 묻자 “처음 치료하는 것이라 준비할 것이 많고, 비닐을 새로 사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비닐이 필요한 이유로는 A씨의 포말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A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편견과는 다르게 HIV는 공기 중에 단독으로 노출되면 3초 이내에 사멸하는 바이러스이고, 체액과 같이 유출되더라고 체액이 마르면 완전히 사멸되어 비말이나 비말핵으로는 감염되지 않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이런 상식조차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런 이유로 예약 날짜를 미루자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보라매병원이 HIV감염인 치과진료를 이유로 진료용 의자, 파티션 등에 비닐을 씌워놓은 모습. ⓒ권미란 |
그럼에도 A씨는 병원의 제안에 따랐다. 그러나 막상 병원을 찾았을 때, A씨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병원은 그를 일반 진료실이 아닌 별도의 방으로 데려갔고, 진료실 의자와 파티션 등에는 모두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게다가 폐기물통에는 HIV 표식이 붙어있었다. A씨는 수치심과 모욕감에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더럽고 무서운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보라매병원에서 HIV감염인을 차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아래 KNP+)에 따르면, 보라매병원은 지난 5월 HIV감염인의 치과 스케일링을 거부했다. 보라매병원은 ‘서울특별시 시민건강관리 기본조례’를 따라야 하는 2차 종합병원이다. 하지만 이들은 “환자의 포말이 튀게 되어 감염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별도의 분리된 공간(전용체어를 포함한 치료실)이 필요하나, 보라매병원 치과의 경우 해당시설이 구비되지 않아 치료 가능한 타 의료기관을 안내”한다고 했다.
KNP+ 측은 즉각 HIV감염인 차별이라며 항의했다. 이에 보라매병원장은 지난 6월 3일 “보라매병원 내규인 ‘HIV감염관리지침’에 치과진료 시 표준예방지침(개인보호구 착용) 준수 외의 별도의 공간이나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라며, 즉각 시정조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병원장의 답변이 무색하게 A씨는 치과 진료에서 또 다시 차별을 받은 것이다.
이에 KNP+ 등 인권단체들은 22일 보라매병원의 HIV감염인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인권단체들이 보라매병원의 HIV감염인 진료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
진정서 제출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권미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는 HIV감염인에 대한 진료 차별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는 점을 거론하며, 그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2011년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은 특수장갑이 없다는 이유로 HIV감염인의 인공 고관절 수술을 거부했고, 지난해 원주 세브란스 기독병원에서도 피가 튀는 것을 막을 가림막이 없다는 이유로 HIV감염인에게 중이염 수술을 해주지 않았다.
김민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가는 “HIV가 타액이나 포말을 통해 감염될 확률은 B형 또는 C형 간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우리나라에서는 1만명의 HIV감염인 있고, 200만 명이 넘는 간염 보균자가 있다. HIV보다 간염이 감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인데, 간염 환자가 병원에서 진료를 거부당했다거나 진료를 위해 진료실에 온통 비닐을 깔아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라고 꼬집었다.
김 활동가는 또 “의료인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HIV 예방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며 “보라매병원 내부 지침에 의하면 치과진료시 일반환자에게 적용되는 표준 예방지침 준수 외에 별도의 공간이나 시설은 필요 하지 않다. 그러나 병원은 이조차 지키지 않고 HIV감염인을 격리해 진료하려는 명백한 차별행위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