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우드(Mark Wood, 44세). 복합적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어 노동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라는 전문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근로 가능(Fit for Work)" 판정을 받음. 이로 인해 소득 보조가 삭감되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사망. 사망 당시 몸무게 약 35kg. 데이비드 클랩슨(David Clapson, 59세). 제 1형 당뇨병. 퇴역군인. 고용센터(Job Centre) 면담에 한 번 참석하지 않아 소득 보조 중단. 3주 후 인슐린 부족으로 인한 급성 합병증으로 사망. 사망 당시 전 재산 3.44파운드(한화 약 5800원). 위에 음식물이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전기는 요금을 내지 못해 끊긴 상황이었음 재클린 해리스(Jacqueline Harris, 53세). 시각-지체 중복장애. 간호사로 근무하다 장애로 인해 퇴직. 장애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근로 가능” 판정을 받고 연금이 중단됨. 재심 판정을 요구했으나 결정 번복되지 않음. 신변 비관하여 자살.
위 사례들은 모두 최근 영국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영국 복지개혁 과정에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웹사이트(http://calumslist.org)까지 만들어졌다. 이 사이트에 기록된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영국 노동연금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1년 1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근로능력평가 과정에서 2380명이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왼쪽부터 마크 우드, 데이비드 클랩슨, 재클린 해리스.
영국 복지 체계는 2010년에 보수 연립 내각이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다. 캐머론 수상을 필두로 한 보수 연립 내각은 ‘일하는 복지(Welfare that works)'라는 기치 아래 구직자 수당(Jobseeker's Allowance), 장애인에게 지원되는 고용·지원수당(Employment and Support Allowance), 주거급여(Housing Benefit), 근로장려세제(Working Tax Credit), 아동세금공제(Child Tax Credit), 소득보조(Income Support)등 여섯 가지 급여를 2016년까지 하나로 통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문제는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구직자수당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고용·지원수당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수급자 대 이동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근로능력평가(Work Capacity Assessment)를 통해 기존에 고용·지원수당을 받던 사람들 중 ’일 할 수 있는' 사람을 ‘솎아내는’ 정책은 노동당 정부 때 도입되어 이미 원성을 사고 있었지만 새로 들어선 보수 연립 내각은 노동당의 정책도 너무 허술했다며, 더 강경한 노동연계복지를 펼쳐 나갈 것을 천명했다. 보수 연립 내각은 ‘근로적합(Fit for Work)’ 판정을 받은 이들에 대한 구직 의무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고용·지원수당을 계속 지원 받게 된 사람들도 ‘무조건 수급 집단’과 ‘조건부 수급 집단’으로 나누어 조건부 집단에 대해서는 ‘일 할 준비'를 의무화했다.
노동연금부는 근로능력평가가 건강 전문가들이 대상자들의 현재 건강 상태와 환경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구직과 고용 이후 근로 시 건강 문제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장애인이나 장기 질환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건강을 ‘챙겨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근로능력평가는 매우 허술하게 진행되고 있다. 재클린 해리스 씨는 “의자에 앉아 외투를 채 벗기도 전에” 평가가 끝났다. 평가자가 물어본 질문은 단 하나. 여기 올 때 버스를 혼자 타고 왔는가였다. 마크 우드 씨는 전문의가 “심신 상태가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있어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소견서를 제출했음에도 ‘근로 적합’ 판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노동연금부는 근로능력평가를 대면하지 않고도 전화로 할 수 있는 방안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용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근로능력평가는 노동연금부 공무원들이 하지 않고, ‘애토스(Atos)’라는 민간 기업에서 위탁받아 진행한다. 공공 부문에 민간 기업을 유입시켜 표면적으로는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민영화를 진행하는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정책의 일환이다. 예산이 한정적인 정부로부터 위탁을 받은 민간 기업은 비용을 최소화하여 이윤을 늘리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서비스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떤 장애인이 ‘근로적합’ 판정을 받으면 그 전에 받아오던 고용·지원수당이 중단되고, 구직자수당을 받게 된다. 고용·지원수당은 장애인에게 제공되던 것이고, 장애인의 근로 환경이 열악한 현실을 반영하여 비장애인에게 제공되는 구직자수당보다 수당이 더 높다. ‘근로적합’ 판정을 받으면, 부족해진 수당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지게 마련이므로, 열심히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정신적, 신체적 장애로 인해 고용센터에서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면담이나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면, ‘노력은 안 하고 수급만 받으려 하는 불량 수급자’가 되어 제재 대상이 된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직업도 없고, 수급도 끊긴 사람들은 저축해 둔 돈이 (다행히도) 있으면 그것으로 연명한다. 저축이 떨어지면? 주변에 손을 벌린다. 저축도 없고 돈을 빌릴 주변인도 없으면, 그때는 죽음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유일한’ 선택지는 강제의 다른 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의 죽음은 국가가 강요한 것이다.
노동연계복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 (출처: flickr.com)
복지의 본질 상실한 노동연계 ‘복지‘...한국의 위험한 답습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복지급여 수급보다는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고자 하는 ‘노동연계복지(Welfare-to-work)’가 강화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지난 2010년부터 보수-자유당 연립정부가 수립되면서 복지총량의 대대적인 축소에 나섰고, 지난해 총선에서 보수당이 단독 과반 확보에 성공하면서 이 흐름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복지 구조조정’ 또한 이런 추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지난 2014년에 도입된 ‘근로 빈곤층 취업 우선 지원 사업’은 ‘일할 능력이 있는 기초수급자’들을 고용센터 취업성공패키지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급자는 고용센터에서 1개월 과정의 직업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받고 자활프로그램에 연계된다. 개인적 여건으로 인해 당장 취업이 어렵거나 취업성공패키지를 이수했는데도 취업하지 못 한 경우에는? 국가는 이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활 근로에 참여시키거나 민간 위탁 사업인 ‘희망리본 사업’을 통해 다시 직업 훈련을 시킨다. 희망리본을 이수하고도 여전히 취업하지 못한 사람은 ‘도덕적 해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2년 동안 유사 사업 참여가 제한된다.
흥미로운 것은, 희망리본 사업과 취업성공패키지 등 수급자들의 고용을 지원하는 업무들이 민간에 위탁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 사업에 뛰어들어 있는 기업은 '인지어스(Ingeus)' 그룹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동일한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행이라고 다 따라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영국과 한국은 출발 지점부터 다르다. 영국 노동연금부의 2016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영국에서 사회부조를 받고 있는 생산가능연령(15~64세) 인구는 총 481만 명. 해당 연령 구간의 총 인구가 4천 224만 명이니 10%가 넘는 인구가 사회 부조를 받고 있다. 이러한 비율은 전 연령대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2014년에 11~64세 전체 인구 3천924만 명 중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인구는 78만 명으로, 비율은 2%에 채 미치지 않았다. 전체 인구 중 10%가 공공부조를 받는 영국에서도 이 비율을 줄여 나갈 때 사람이 수천 명 씩 죽어나가고 있는데, 고작 2%만이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고 있는 한국에서 영국과 유사한 ‘노동연계복지’를 시행한다는 것은 아사 직전에 있는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겠답시고 곡기를 끊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복지의 본질은 ‘사회 안전망 구축’이다. 민간 영역에서 배제된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적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아 생존이 아닌 생활을 가꿔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민간 영역, 그것도 자본이 ‘가치있다’고 결정한 영역만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복지 체계를 재편해 가는 현상은 국가가 복지의 본질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민간 영역에서 이미 배제된 사람들을 국가가 다시 민간 영역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환기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