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수용 생존자, 피해자 19명 더 찾아냈지만… 진화위 “직권조사 어렵다”
‘신청자’에 한해 진상규명 하는 진화위 피해생존자 스스로 추가로 19명 발굴 그러나 신청 기간 지나 진상규명 불가능 진화위 “직권조사 계획 없고 부담스럽다” 피해생존자들 울부짖으며 규탄
3세에 어머니 등에 업혀 부산시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안종환 씨는 47세가 돼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울부짖었다.
“저는 어머님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고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덕성원을 나와 형제복지원을 찾아가 저의 어머님을 수소문하였으나 아직도 소식을 들을 수 없고 대한민국 정부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은 진화위로부터 진실규명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시설수용 정책으로) 모자지간의 생이별을 주도하였고 이를 묵인했으며 아직도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에 바랍니다. 세 살 때 헤어진 저의 어머님 김성분 씨를 찾아주십시오. 돌아가셨다면 자식 된 도리로서 유해라도 찾고 싶습니다. 저의 억울한 일들을 진화위가 직권조사하여 주시길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덕성원 피해생존자 안종환 씨)
안 씨는 형제복지원 입소 직후 어머니와 강제로 분리됐다. 안 씨가 아동시설 덕성원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후 어머니 소식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알 수 없었다. 안 씨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에도 어머니 입소 기록만 있고 퇴소 기록은 없다. 어머니는 현재 실종상태로 처리돼 있다고 한다.
안 씨는 부산시의 한 경찰서에 도움을 청했다. 경찰은 ‘진화위가 해야 할 일’이라며 조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진화위는 신청자에 한해서만 조사 중이고, 신청 기간은 지난해 12월 9일에 끝나버렸다.
어머니 김성분 씨는 어디로 갔을까.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까. 안 씨와 같은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들은 26일 오후 3시, 서울시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화위가 ‘직권조사’를 해서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 피해생존자가 ‘알아서’ 국가 상대로 소송하라는 진화위
시설수용 피해자 직권조사는 진화위가 전국에서 벌어진 집단수용시설을 조사하고 피해자들을 발굴하는 것을 뜻한다. 현재 진화위는 신청자만 조사하고 있다. 신청은 지난해 12월 9일에 종료됐으며 신청 대상은 1945년부터 2000년까지 불법적으로 이뤄진 집단수용시설 내 사망·상해·실종사건을 경험한 피해 당사자와 목격자였다.
문제는 피해복구와 진상규명이 ‘신청주의’로 이뤄지다 보니, 신청하지 못한 피해생존자 혹은 이미 사망했거나 현재에도 수용시설에 갇혀 있어 신청할 수 없는 피해자는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는 지난해 11월부터 진화위에 직권조사를 촉구하고 피해생존자를 직접 찾아다녔다. 이 같은 노력으로 피해생존자 19명을 발굴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신청 기간이 지난 후였다.
진화위는 직권조사 계획이 없으며 부담스럽기까지 하다는 입장이다. 김광동 진화위원장은 2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청되지 않은 분들의 인권침해 사실이 있다면 함께 보고서에 담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그 기록이 법원에 피해 구제를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피해생존자가 직접 소송에 임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수용시설 조사를 담당하는 이상훈 상임위원은 “진화위 종결 시기가 내년 5월까지라 많은 사건이 밀려 있어 직권조사까지는 부담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수용시설 직권조사할 거냐’ 묻자 김광동 진화위원장 “계획 없다”)
권태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진화위 입장에 강하게 문제제기 했다. 권 변호사는 “피해생존자 스스로 자신이 시설수용 정책으로부터 피해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힘들지만,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피해생존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개개인이 국가폭력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단 걸 성공적으로 입증해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피해생존자 눈물로 직권조사 요구… “내 나이 예순, 한국이 밉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피해생존자들은 진화위를 향해 한목소리로 시설수용 피해자에 대한 직권조사를 하라고 촉구했다.
9살 때 부산에서 신문팔이를 하다가 영화숙·재생원에 끌려간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는 “김광동 진화위원장의 기사를 접하고 순간적으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한 기관의 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진화위 책임자로서 단 한 사람의 피해라도 진상규명해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게 진화위의 일 아닌가?”라고 규탄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생존자가 있습니다. 우울증 약을 먹지 않으면 단 하루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진상규명하여 주십시오. 한 사람의 피해자라도 빠뜨리지 말고 철저히 조사하여 주십시오. 나는 예순이 넘었고 대한민국이 너무나 밉습니다.”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덕성원 피해생존자 안종환 씨는 “내가 자란 덕성원 원장일가의 파렴치한 일들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든 조목조목 얘기하고 고발하고 싶다. 정부와 부산시, 진화위에 간절히 부탁한다. 내 억울한 일들을 조사하여 달라”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장애인운동단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규탄도 이어졌다. 이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 활동가는 “피해생존자들은 현재 매우 고령이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진화위는 조사 인력과 기간이 제한적이라는 핑계로 피해생존자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멈추고 당장 직권조사를 실시하라”라고 성토했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진상규명도 중요하다. 하지만 직권조사를 통해 사회구조적 문제가 규명돼야 한다. 진화위는 시설 운영이 가능했던 사회구조를 점검하고 이 같은 구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직후 진행된 면담에서 진화위는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면담에 참여한 김정하 발바닥행동 활동가에 따르면 이상훈 상임위원 등 진화위 관계자들은 ‘조사 기간도 부족하고 조사할 사람도 없다. 피해자 규모가 너무 크다. 직권조사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최종결정은 진화위가 하는 거라서 직권조사에 대해 답하기 어렵다. 노력하겠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