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현행 종합조사는 협약에 부합하지 않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2·3차 한국 심의 ① 심의 이틀 전에 보완보고서 ‘늦장’ 제출한 한국 정부 유엔, 장애를 의료적 관점으로만 보는 ‘종합조사’ 지적
[편집자 주] 지난달 24일과 25일, 한국 정부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로부터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심의를 받았다. 협약은 국제인권조약으로, 장애인이 보장받아야 할 주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08년에 협약을 비준했으며, 헌법에 따라 이 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진다. 한국 정부에 대한 심의는 2014년 이후 두 번째다. 장애계는 5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협약 한국 정부 심의 대응 장애계 연대(아래 장애계연대)’를 꾸려 정부의 이행 상황을 감시해왔다. 비마이너는 이틀간 진행된 현장 심의 속기록을 입수해 다섯 차례에 걸쳐 이를 보도한다.
① 유엔 “현행 종합조사는 협약에 부합하지 않아”
한국 정부가 지난달 24일(현지 시각)부터 이틀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27차 위원회에 출석해 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5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장애계연대는 한국 심의가 끝난 지난달 25일 오후 2시, 제네바 유엔 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생존권을 외면하는 정부가 자화자찬을 늘어놓다니 후안무치하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 두 번째 성적표 기다리는 정부
협약은 국제 인권법에 따른 인권조약이다. 2006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됐고, 한국은 2008년에 비준했다. 협약에 비준한 국가는 4년에 한 번씩 위원회에 국가보고서를 제출해 당사국의 협약 이행 여부와 장애인 인권 증진 현황을 제시해야 한다. 시민사회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은 국가보고서를 검토한 뒤 별도의 독립보고서를 작성해 위원회에 제출한다. 위원회는 보고서들을 검토하고 당사국을 대면 심의한 후 최종 견해를 전달한다.
정부는 2011년에 1차 국가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했다. 최종 견해가 나온 건 2014년이다. 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전달한 최초의 성적표였다. 정부는 협약 비준 이후 받은 첫 성적표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당시 위원회는 총 66개 항에 걸쳐 정부가 협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거주시설 중심 정책에 우려를 표하며 탈시설 전략을 세우라고 권고했고, 의료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 장애등급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활동지원서비스 확대, 성년후견제를 대체할 의사결정조력 시스템 마련 등이 담긴 최종 견해 내용은 한국 장애계가 요구해 온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는 이제 두 번째 성적표를 기다리고 있다. 2·3차 병합 국가보고서는 2019년에 제출했다. 1차 심의 때 최종 견해가 늦게 나와, 2·3차 심의는 병합돼 진행됐다. 이번 국가보고서에 대한 심의가 8월 24~25일 이틀간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린 것이다.
- 정부, 심의 이틀 전에 수정본 제출… 유엔 보고관 “읽을 시간 부족”
정부가 2019년에 위원회에 제출한 2·3차 국가보고서에는 코로나19 대유행을 포함해 최근 상황이 반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이 반영된 보완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심의 이틀 전인 22일에 보완보고서를 제출했다. 심의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 사무소 현지에 간 장애계연대는 국문본 기준 29쪽에 달하는 보완보고서를 부랴부랴 읽고 의견을 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한국장애포럼으로부터 입수한 심의 속기록에 따르면, 위원회 위원도 한국 정부가 심의 단 이틀 전에 보완보고서를 제출한 점을 비판했다. 한국 국가보고서 담당 보고관인 게렐 돈도브드로이 위원은 24일 열린 1차 심의에서 “심의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 보고서를 받았기 때문에 위원들이 보고서를 충실히 읽을 수 없었다. 2019년에 제출된 보고서를 보고 질문하려 한다. 최신 정보에 기반한 질문이 아닐 수 있다”고 꼬집었다.
- 위원들 “종합조사는 협약에 부합하지 않아”… 정부는 동문서답
심의 초반부터 장애등급제 폐지에 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장애등급제는 의료적 관점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 장애인을 구분해 복지제도에 차등을 둔다. 장애계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개인의 욕구에 따라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줄곧 요구해 왔다.
2019년 7월, 정부는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했다. 장애등급제 폐지 후 서비스지원종합조사(아래 종합조사)가 새로 등장했다. 그러나 종합조사 또한 여전히 의학적 손상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활동지원시간을 15구간으로 나눴다. 장애에 대한 개념을 몸의 손상이 아닌 사회적 관점으로 전환하고, 개인별 욕구에 따라 서비스를 지원하라고 한 장애계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단, 활동지원 이용자격은 장애등급에 상관없이 등록장애인이면 누구든 신청 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이용자는 전보다 다소 늘었지만 예산은 그만큼 증액되지 않아, 종합조사 시행 후 갱신조사를 받은 일부 장애인의 활동지원시간이 대폭 삭감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게렐 돈도브드로이 위원은 “종합조사는 협약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협약은 장애를 의료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으로 보고 장애인의 사회적 접근성을 높이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지적하며 “현재 대한민국이 취한 조치 중 협약에 부합하는 장애정의에 관한 조치는 무엇인가. 장애등급제에 관한 조치뿐만 아니라 그러한 장애정의에 기반해 제공하는 개별화된 서비스는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관해 염민섭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국장은 “현재 국회에 장애정의에 사회적 관점을 반영하려는 내용의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으며 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사실이다. 장애계의 끈질긴 요구 끝에 지난해 하반기, 장애인권리보장법안(장애인복지법 전부개정안) 세 개가 발의됐으나 유의미한 진행은 없었다. 복지부는 장애계의 요구보다 후퇴한 안만을 갖고 올 뿐, 이렇다 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염 국장은 종합조사 도입을 위해 “70회의 공청회와 11차례 민관협의체 회의를 거쳤다”며 종합조사표가 장애계와 충분히 합의된 것임을 강조했다. 활동지원시간이 감소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위원들은 정책에 장애인 당사자 단체가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여해도 정부는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는다. 장애등급제도 마찬가지”라며 “한국 정부는 유엔에서 사기 쳤다. 장애등급제는 결론적으로 가짜 폐지됐다. 그러나 복지부는 의학적 관점을 기준으로 사회생활 여부 등을 살짝 반영해 협약을 지킨 것처럼 말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