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성년후견제도 폐지하라” 권고에도 정부 수용 거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2·3차 한국 심의 ⑤ 탈시설로드맵은 협약 위반임에도 유엔서 ‘줄줄’ 나열한 정부 정신병원 강제입원 현실도 제대로 설명 안 해… 성년후견제도는 거듭된 비판에도 수용 거부

2022-09-13     하민지 기자

[편집자 주] 지난달 24일과 25일, 한국 정부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로부터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심의를 받았다. 협약은 국제인권조약으로, 장애인이 보장받아야 할 주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08년에 협약을 비준했으며, 헌법에 따라 이 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진다. 한국 정부에 대한 심의는 2014년 이후 두 번째다. 장애계는 5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협약 한국 정부 심의 대응 장애계 연대(아래 장애계연대)’를 꾸려 정부의 이행 상황을 감시해왔다. 비마이너는 이틀간 진행된 현장 심의 속기록을 입수해 다섯 차례에 걸쳐 이를 보도한다.

① 유엔 “현행 종합조사는 협약에 부합하지 않아”

② 이동권·접근권 처참… 정부는 유엔서 “성과 있다”

③ 유엔 “코로나19 장애인 사망률 왜 높나” 정부 “한국 특성상…”

④ 잇따른 발달장애인 참사, 유엔도 주목

⑤ 유엔 “성년후견제도 폐지하라” 권고에도 정부, 수용 거부

한국 심의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 유엔 사무소 현장. 장애계연대 활동가가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이 있는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에는 ‘기획재정부는 한국판 T4 프로그램을 멈추라. 예산 문제로 장애인을 가두지 마십시오. 죽이지 마십시오. 기획재정부는 장애인권리예산 보장하라! 발달·중증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이라 적혀 있다. 사진 장애계연대

- 정부, 탈시설로드맵은 협약 위반임에도 개선 의지 없어

위원들은 한국에서 장애인거주시설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탈시설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질의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로버트 마틴 위원은 “탈시설 정책의 정확한 시기와 일정, 예산 규모”와 함께 “의사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발달장애인, 정신·심리적 장애인)의 탈시설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를 질의했다. 카부 위원은 “탈시설 장애인에 대한 지원 정책을 어떻게 시행할 계획인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아래 탈시설로드맵)’을 발표했다. 로드맵 이행을 위해 올해부터 2024년까지 3년간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시범사업’을 시행한다. 그런데 복지부는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시범사업 명칭을 ‘장애인 자립지원 시범사업’으로 변경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탈시설로드맵에서 탈시설을 장애인의 기본권이 아니라 ‘주거선택권’의 하나로 본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장애인거주시설도 주거유형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정부는 장애인거주시설을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탈시설로드맵 사업이 끝나는 2041년에는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에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최중증장애인만이 거주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최중증장애인을 시설에 남겨두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동생활가정(그룹홈)과 같은 소규모 시설 거주자는 탈시설로드맵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정부는 오히려 단기·공동생활가정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이유로 장애계는 탈시설로드맵을 향해 ‘소규모 시설화 정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해 왔다.

이런 탈시설로드맵은 명백한 협약 위반이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 일반논평5는 “시설과 연계된 ‘위성’ 생활환경, 즉 아파트 또는 단독 주택 등 개인생활 외관을 띠면서 사실은 시설을 중심으로 한 생활환경 조성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위원회에 참석해 탈시설로드맵 계획만 줄줄이 나열했다. 기존에 발표된 정부 보도자료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탈시설엔 시범사업 예산 21억 원만 편성하고선 장애인거주시설엔 6천억 원을 편성한 것 또한 밝히지 않았다.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등 장애인권단체는 지난해 6월 28일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를 향해 정신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정신장애인 복지체계 마련을 요구했다. 한 활동가가 빨간 손수건과 까만 손수건을 양쪽 손목에 둘렀다. 빨간색은 정신장애인의 죽음을, 까만색은 정신병원에 갇힌 정신장애인을 상징한다. 활동가는 ‘정신질환자 및 가족이 죽어가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사진 하민지

- 정신병원 강제입원 현실, 제대로 답변하지 않은 정부

이번 심의에서는 한국 정신병원 현실에 대한 위원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많은 위원이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비자의입원)돼 있는 것, 불필요한 약물치료를 받는 것 등을 우려했다.

게렐 돈도브드로이 위원은 “현재 한국에서는 정신장애인이 정신병원에 장기입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로즈마리 카예스 위원도 “정부가 정신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하는지, 부적절한 약물치료와 강제입원에 대해 어떤 대책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질의했다.

그러나 김한숙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강제입원 그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는 2017년 시행된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정신보건법 전부개정안)로 인권침해를 최소화했음을 강조했다. 김 과장의 말처럼 법 개정으로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아래 입적심)가 도입되는 등 여러 절차가 마련되긴 했으나 현장에서 이를 체감하기는 어렵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인 부민주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모든 입원환자에게 권리를 고지하여 환자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김 과장의 말이 현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부 활동가는 “병원 입원 시 하는 권리고지 양식은 법령 내용을 나열했을 뿐, 정신장애인이 읽고 이해하기 매우 어렵게 돼 있다.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권리고지가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입적심도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는 데 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연간 7만 8천여 건의 강제입원심사 중 입적심 결정으로 퇴원한 비율은 1% 내외에 불과하다.

성년후견제도를 설명하는 유튜브 영상. ‘성년후견제도는 무엇일까요? 19세가 넘은 어른이지만 혼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람에게 후견인이라는 사람을 보내주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인천광역시장애인복지관 유튜브 갈무리

- 성년후견제도, 거듭된 비판에도 정부는 수용 거부

위원회는 2014년 1차 최종 견해에서, 한국의 성년후견제도는 ‘대체의사결정제도’라며 이를 ‘조력의사결정제도’로 바꾸라고 권고했다. 의사결정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의 의사를 타인이 대신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를 최대한 조력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정부는 위원회 권고를 따르지 않고 2019년에 제출한 국가보고서에 “성년후견제도는 협약이 금지하는 차별이라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실상 위원회의 권고를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태도에 로버트 마틴 위원은 “피후견인의 권리는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다. 이 같은 대체의사결정제도는 철폐돼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위한 예산과 일정이 준비돼 있는지 알려달라”고 질문했다.

그러나 정소연 과장은 국가보고서 내용을 반복하며 “후견제도는 장애인의 행위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의사능력과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원하기 위한 제도다. 후견을 개시할 때 당사자 의사를 고려하고 의료전문가 감정도 받고 있다. 또한 당사자 의사에 따라 가정법원에 청구하면 후견 종료도 가능하다. 후견제도가 폐지되면 장애인의 권리행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게렐 돈도브드로이 위원은 “내가 원한 답변이 아니다. 핵심을 비껴갔다”며 “대체의사결정제도를 폐지하고, 의사결정조력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심의에서는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장애아동 학대 및 교육권 △노동권(최저임금적용제외, 보호작업장) △참정권 △복합차별(차별금지법 제정) △부양의무자 기준 △사법절차에서의 접근성 △외국인보호소 등의 문제도 다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