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나온 지 8년, 국경 넘어 ‘탈시설’을 말하다 / 이수미·신지현
[Against Ableism! 일본 특사단 이야기 ④] 갑작스러운 입국 거부로 변동된 일정 박경석 대표 자리, 이수미 대표가 대신 ‘탈시설 당사자’로서의 경험 나눠 앰네스티 오사카지부, 타이헨 극단 등 국제 연대의 힘을 확인하다
[편집자 주] 지난해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에 이어 ‘일본 AA(Against Ableism, 비장애중심주의 철폐) 특사단’을 파견했다. 17명의 장애인·비장애인으로 구성된 특사단은 11월 22일부터 11월 27일까지 일본 도쿄, 오사카를 방문해 한국의 장애인권리 약탈 현실을 알렸다. 최근 3·1절을 맞아 일본에 재방문해 야스쿠니 신사 인근서 시설 수용을 강요하는 일본과 한국 정부를 규탄하기도 했다.
11월 22일,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12년 전 선고받은 집행유예를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결국, 박 대표는 당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그럼에도 전장연은 일본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특사단은 5박 6일 동안 일본의 출근길 지하철에서 포체투지(기어가는 오체투지)를 하고,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다이인(die-in) 행동’을 벌였다. 또한, 예산 논리를 앞세워 장애인을 시설에 격리하는 한국과 일본 공통의 문제를 일본 내 장애운동단체 및 정당과 논의했다. 기자회견과 장애인인권영화제를 개최하며 일본의 시민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특사단은 일본에 가서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을까. 특사단의 여정을 생생히 듣고 기록하고자 다양한 특사단원의 이야기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만남과 대화의 장 / 강내영
② 비장애인에겐 가까운 일본, 휠체어 탄 장애인에겐 멀고도 험난한 길 / 조재범
③ 우리는 비장애인 문명을 거부한다 / 박지민
④ 시설 나온 지 8년, 일본에서 ‘탈시설’을 말하다 / 이수미·신지현
지난해 11월 22일, 일본 AA 특사단의 첫 일정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바로 박경석 전장연 대표의 입국 거부였다. 12년 전 선고받은 집행유예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전장연의 정당한 인권 활동을 국제적으로 탄압하는 행태임이 분명했다.
첫날은 국제앰네스티 도쿄지부와 박경석 대표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박 대표는 2024년 4월에 세계 최대 규모의 인권 운동 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편지쓰기 캠페인 사례자로 선정된 바 있다.
이 캠페인은 전 세계 20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권리를 침해당한 인권 옹호자들을 위한 탄원 및 연대 편지를 쓰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캠페인이다. 이번 일본 특사단의 활동은 앰네스티 일본지부의 편지쓰기 캠페인 간담회 초청으로 삽이 떠진 국제투쟁이기도 했다.
한국지부는 박 대표를 ‘이동권 보장 및 표현의 자유’ 침해에 맞서 싸운 사례자로 선정했다. 이를 계기로 전장연의 정당한 집회·시위에 대한 지지의 편지가 전 세계에서 전장연 사무실로 꾸준히 도착하고 있다. 동시에, 장애인권리 약탈자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탄원 편지도 계속 전달되고 있다.
2025년 3월 15일 기준, 장애인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박 대표와 전장연 활동가들에게 온 세계시민의 연대 편지는 약 1만 4천 통,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도착한 탄원 편지는 약 46만 통에 달한다.
- 갑작스러운 입국 거부로 변동된 일정… 일본에서도 보장되지 않는 이동권
박경석 대표의 입국 거부로 결국 당일 도쿄지부와의 일정은 취소하고, 다음날인 23일부터 편지쓰기 캠페인 간담회 일정을 소화했다. 23일부터 24일까지, 우리는 국제앰네스티 사이타마지부와 오사카지부를 찾아 이틀 동안 연대 활동을 이어갔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고속철도 ‘신칸센’을 타야 했다. 휠체어 좌석을 이용하려면 티켓 발급 창구에서 별도로 예약하고, 역 내 이동지원 서비스도 신청해야 했다.
‘프라이빗룸’으로 안내받은 휠체어 전용 공간은 열차 내부에 비장애인석과 구분되어 있었다. 프라이빗룸은 전동휠체어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과 별도의 의자가 있어 활동지원사와 함께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며 한국의 KTX에도 이러한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지하철은 대부분 민간 기업이 운영해 구간별로 시스템이 달라 매우 복잡했다. 노선이 많고 구조도 복잡해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활발하지 않아 그런지 장애인이 이동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동선도 불편했다.
- 박경석 대표 자리, 이수미 대표가 대신… ‘탈시설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나누다
박경석 대표의 부재로 인해 내(이수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가 대신 편지쓰기 캠페인 간담회 자리를 이어가야 했다.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준비했다.
다행히도 박경석 대표가 온라인 회의로 함께 참석해 주었고, 김지학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도 함께해 큰 힘이 되었다. 박 대표는 윤석열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장애인인권 탄압 현실을 전했다. 탈시설 정책 축소,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 노동자 400명 해고,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지하철 승하차 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행태 등 대한민국의 상황을 일본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장애인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나누었다. 2001년 탈시설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절, 선택의 여지 없이 시설에 들어가야만 했던 현실. 그러나 선배 활동가들의 피와 눈물 어린 투쟁 덕분에 탈시설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나 역시 시설을 떠나 독립할 수 있었다.
또한, 윤석열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에 의해 장애인 권리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박함을 담아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해준 일본 시민들에게 전장연의 투쟁에 연대와 지지를 요청했다.
- 타이헨 극단, 창작의 주제로서의 장애인… 연대의 힘을 확인하다
국제앰네스티 오사카지부 회원들과의 자리를 마무리하고 타이헨 극단으로 향했다. 타이헨 극단은 1983년 창립 이후 신체적 차이를 극복해야 할 한계가 아닌, ‘새로운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으로 전환하며 독창적인 공연을 만들어 온 극단이다.
이 극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는 비장애인 활동가들이다. 김만리 단장님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는 노들장애인야학과 박경석 대표와의 13년간 이어온 인연을 이야기하며, 과거 노들 학생들과 함께한 연극 영상을 보여주었다.
타이헨 극단의 무대는 중증장애인 배우들의 몸짓과 움직임이 중심이 된다. 이들은 오히려 장애와 비장애라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몸 자체가 가진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탐구한다.
대표작 ‘폐허의 시학’(廃墟の詩学), ‘기억하는 몸’(記憶するカラダ) 등은 강렬한 시각적 연출과 함께 사회적 억압,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문제를 다룬다. 관객들은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지닌 다양한 가능성과 예술적 표현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들은 일본을 넘어 유럽, 아시아 등에서도 초청받아 공연하며, 국제적으로 장애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타이헨 극단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장애인은 예술의 소비자가 아니라 창작의 주체라는 것.
전장연의 투쟁 역시 그렇다. 비장애중심주의 사회를 해체하고 이 사회가 다양한 구성원의 존재를 지우지 말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전장연과 타이헨 극단은 서로 간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연대의 힘을 확인했다.
우리는 준비해 간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영화를 함께 보며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에 대해 소개했다. 단원 중 한 분이 “정말 압도적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타이헨 극단은 박경석 대표의 강제 추방에 유감을 표하며, 일본 정부의 입국 거부 조치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그 성명서는 내가 다음날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기자회견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우리는 박경석 씨에 대한 입국 거부 조치를 중대한 인권침해로 파악하고, 또 장애인의 권리 옹호를 국제적으로 추진하는 활동에 대한 악의적인 탄압으로도 보아 강하게 항의한다.
법적으로도 이번 입국 거부 조치에는 큰 의혹이 있다. ‘출입국 관리 및 난민인정법’에는 ‘일본 또는 일본 이외의 국가의 법령을 위반하여,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감금 또는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은 사실이 있는 사람은 일본에 상륙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지만 ‘정치 범죄로 형을 받은 사람’에 대한 제외 규정도 명기되어 있다.
박경석 대표는 한때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판결을 받은 적은 있지만 집행 유예 판결이었고, 그것은 국제적으로 볼 때 정치적 처벌로 인정되어야 한다. 게다가 박경석 대표는 불과 몇 달 전에도 일본을 방문하여 평화로운 국제 연대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적이 있어 당시에는 아무런 입국 제한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입국을 거부한 것은 장애인 권리옹호 활동가를 겨냥한 차별적이고 부당한 조치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적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국제적으로 보장된 기본적 인권이며, 특히 장애인의 권리와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은 국경을 넘어 보호되어야 하는 정당한 행위이다. 이러한 활동을 억압하는 조치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이번 일본 정부·출입국재류관리청의 결정은 국제인권기준에 반하는 행위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증진하려는 국제적 노력에 역행하는 태도를 취한 셈이다. 이 일을 강하게 규탄한다.”
5박 6일로 예정됐던 일정은 비행기 결항으로 인해 6박 7일이 되었다. 그러나 나리타 공항에는 장애인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장애인의 이동권과 편의시설에 대한 현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번 일본 AA 특사단 활동은 낯선 환경에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동지들과 함께하며 투쟁의 힘을 느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필자 소개
이수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 권익옹호 활동가, 2024 일본 AA 특사단원. 탈시설 당사자로서 장애인거주시설이 폐쇄되는 그날까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신지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2024 일본 AA 특사단원
*일본 AA 특사단 중 다른 단원들과 별도로, 국제앰네스티 일정에 참여하기 위해 오사카를 방문한 이수미 대표와 신지현 활동가가 공동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