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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상적 공감’에서 ‘구체적 이해’로

출발 일자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연락이 왔다. 한명희 전장연 활동가로부터 전장연에서 일본 정책 연수를 가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통역을 구한다거나 방문단체를 섭외한다는 게 일본 정서상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소개한 사람과의 관계나 전장연의 활동 등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일단 관계하고 있는 현지 네트워크에 요청을 했다.

역시 며칠씩이나 대응할 수 있는 통역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고, 희망하는 단체 역시 방문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전장연에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였기에 결국 내 일정을 조정하여 통역을 맡게 되었고, 최대한 희망하는 내용에 부합할 수 있는 단체와 사람들을 찾아내고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무리를 해 준 일본의 지인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방문단체 섭외와 일정 조정 등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숨 가쁘게 시간은 흘러갔고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섭외를 끝내고 출발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나리타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너무나도 순조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함께 출발한 사람들이 대부분 입국관리국을 통과해서 수하물 찾는 곳에서 기다리는데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그의 활동지원사만 통과를 못 하고 있었다.

설마 일본 앰네스티의 공식 초청을 받고 온 박경석 대표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고, 단지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고 시간은 흘렀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 방문단체를 섭외하는 데 도움을 준 지인에게 긴급하게 연락하여 방문단체 중 하나인 레이와 신센구미(れいわ新選組) 정당¹⁾ 국회의원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지인은 있던 일정들을 전부 취소하고 바로 달려와 주었다. 여기저기 연락해 본 그는 최근 사회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가들의 입국이 까다로워지고 입국 거부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여기에 남아서 대응을 할테니 일단 숙소로 이동하라며 지쳐있던 우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실제로 일본 법무성과 입국관리국에도 연락이 닿아 상황 파악을 하고 항의하는 등의 움직임들이 있었기에, 어렵지만 통과하여 숙소로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박경석 대표와 활동지원사는 표면적으로는 ‘출입국 관리 및 난민인정법’을 근거로 입국 거부를 당했으나, 몇 달 전에도 일본을 방문했던 이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실제 사유는 모른 채 강제 출국을 당하여 그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겨진 사람들도 숙소로 이동하는 길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을 20년 넘게 넘나들면서 이동이 이렇게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내게 익숙한 대중교통 이용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전철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일정 중 이동 동선을 고려하며 전철 노선을 미리 확인했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맞닥뜨리니 패닉이 되었다. 몇 번이나 길을 헤매야 했고, 특히 도쿄는 뭐든 촘촘하고 빽빽한 탓에 어렵게 전철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도 공간이 협소해 휠체어가 한 대씩밖에 이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길도 좁다 보니 이동 시간이 평소보다 세 배 이상이 걸렸다.

겨우 진땀 흘리며 숙소에 도착했지만 숙소 역시도 휠체어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고, 겨우겨우 욱여넣듯 방에 맞추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이동약자들의 이동권에 대해 추상적으로 공감만 하고 있었던 것이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 서로를 공감하고 응원하는 경험

입국 첫날부터 오그라든 몸과 마음을 마냥 접어둘 수만은 없어 일단 약속했던 일정에 충실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동과 만남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두었지만 일부는 약속 시간에 늦게 되었고, 준비한 측에서는 컴퓨터가 고장이라 영상이 중간에 멈춰버리는 등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그 만남은 우리가 일본에 온 의미를 다시 살리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相模原障害者施設殺傷事件)’²⁾의 피해자 가족과 직원의 학대 사건을 내부고발 한 전 야마유리원 직원이었다. 언론이나 경찰에선 이 사건을 개인의 장애인 혐오로 일어난 사건으로 정리했지만, 실제로는 장애인에 대한 정부 정책과 사회적 시선이 만든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들의 증언과 자료 사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당사자들도 자신의 경험을 보태며 시설 수용 문제가 여전히 한국과 일본 공통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공감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특히 함께 온 문경희 세종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내부고발을 한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었을 때 그 직원은 감격하여 울먹이며 문 대표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부고발을 한 이후로 한 번도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내부고발을 하면서 동료들에게는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직장에서 해고되어 가정도 잘 돌보지 못한 가장의 무게마저 짓누르며 그동안 힘들게 살아왔던 그에게, 문 대표의 한마디는 자책하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커다란 지렛대가 되었으리라. 이처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응원하는 경험은 세상 풍파에 오그라지던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고 펴주는, 만남과 교류의 소중함을 켜켜이 채워나가는 근육이 되는 것이다.

- 더 많은 만남과 대화의 장을 꿈꾸며

일정을 거듭하면서 일본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과 대화를 하는 장을 다양하게 열었다. 대표적으로 ‘도쿄 장애인인권 마을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전장연의 활동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과 자국의 장애인 정책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계기가 된듯하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러한 내용들을 실으며 그 공간에 같이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나누며 장이 확대되었다.

이 외에도 박경석 대표 입국 거부 사건에 항의하는 의미로 일본의 반빈곤네트워크, 레이와 신센구미 정당 등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계속 그랬듯 기자회견을 위해 의원회관으로 가는 길도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입국한 날부터 우리가 이동하는 곳마다 공안 경찰이 계속 따라붙어 감시를 했고, 역에 내려서 가는 동안에 엄청난 숫자의 경찰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러한 길을 뚫고서 도착한 공동 기자회견장에는 레이와 신센구미 정당의 중증장애인 의원들이 참가하여 그 의미를 더하기도 했고, 기자회견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와 인권은 국경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연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어서는 피스보트³⁾와의 만남을 가졌다. 여기서는 2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였는데 특히, 한국인 피폭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에 대한 사죄의 말을 거듭하였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는 공감과 연대를 하는 경험을 또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일본노동자협동조합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동시에 서로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처럼 만나서 대화하는 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횟수도 그에 비례할 것이고, 자연스레 협력과 연대의 장도 커져갈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해 가지는 오해나 선입견이 반목하거나 관계를 해치는 일들을 자주 경험하고 있고, 이것이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킹스칼리지와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가 주요 국가들을 대상으로 갈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여기서 한국이 가장 갈등이 심한 나라로 밝혀지기도 했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도 더 많은 만남과 대화의 장이 열리기를 꿈꾸며 그것이 기대로만 끝나지 않게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기로 다짐해 본다.

1) 일본의 진보주의 정당으로, 2019년 4월 당시 참의원 의원 야마모토 타로(山本太郎)가 창당하였다. 현재 중의원에서 9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등 지지세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참고: 레이와 신센구미 공식 홈페이지)

2) 2016년 7월 26일 새벽,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발생한 참사. 26일 새벽 2시 30분경, 우에마쓰 사토시(26세)는 장애인 시설 츠쿠이 야마유리원에 난입해 흉기를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19명이 사망하고, 2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시설엔 성인 지적장애인 149명이 입소 중이었다. (참고: 일본 장애인시설 참극… 한일 장애계 “혐오를 멈춰라”, 비마이너, 2016년 7월 28일 기사)

3)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비영리단체이다. 1983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검정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군사침략이 ‘진출’로 수정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아시아 각국에서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다. 이에 일본에서 배운 역사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가진 일본의 젊은이들이 직접 현지에 가서 역사문제를 확인해 보자고 생각한 것이 피스보트 결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세계 일주를 하며 평화 증진, 인권, 평등, 지속 가능한 발전, 환경보호 등을 위해 활동한다. (참고: 피스보트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