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주민으로서 ‘차별 없는 가게’
스물다섯 살, 나는 정체성을 확신하고 독립했다. 처음 생각난 곳은 이태원, 아니 이태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중간에 다른 동네에서 잠깐 살기도 했지만, 이태원은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트랜스젠더로서 살아가기에 그 어느 곳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누구나 새로운 곳에 이사 오면 주변에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산책하며 둘러보게 될 것이다. ‘차별 없는 가게’에 대한 글을 요청받아 지난날을 떠올려보니, 사실 대놓고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의 출입을 금한다는 말이나 사인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동네 주민으로서 단골이 되고 ‘너무’ 친해진 가게에서 불편한 적은 있었다.
지금도 참 좋아하는 동네의 한 맛집인데, 자주 갈수록 사장님과 가까워져 관심과 걱정의 표현으로 외모 평가라든지 내 정체성에 대해 곤란한 질문들을 자주 받게 되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어머니는 알고 계시냐, (의료적 트랜지션은) 어디까지 했냐 등. 아무리 친하대도 이런 질문들은 견디기 어렵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무엇보다 이 가게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인데, 그 경계가 흐려지면서, 밥만 먹고 바로 나오는 일이 흔해졌다. 물론 식당에서 굳이 정체성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나처럼 목소리를 비롯해 의료를 진행 중인 트랜스젠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 정보를 말해주는데, 나중에 친해지면 지나치게 피곤해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이와 반대로 어느 카페에서는 1년 넘게 매주 한두 번 이상 갔는데도 사장님과 눈인사 정도만 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편하긴 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단골로 지내면서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불편까진 아니지만 긴 시간 겉으로만 알고 지낸 느낌이랄까.
이런 두 가지 경우와 다르게 찾아가면 반갑고 기쁜 가게들도 분명히 있다. 이 차이는 분명 영업자가 가진 감수성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권 감수성뿐 아니라 타인에 대해 이 미묘한 ‘선’을 잘 지키는 섬세함 말이다.
손님으로서 ‘차별 없는 가게’
동네 단골로 자주 드나드는 가게가 아닐지라도 어쩌다 한 번씩 가게 되는 식당, 카페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워낙 종교를 기반으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입구에 떡하니 성경 구절이 적힌 명패가 있거나, 태극기가 곳곳에 있거나, 특정 대통령의 싸인이나 사진이 걸려 있으면 밥을 먹는데도 굉장히 조심하게 된다. 혹여나 듣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듣게 될까,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대접을 받길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돌 맞을 걸 각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특히 이태원에 트랜스젠더‘를 위한’ 바나 업소들은 많지만 트랜스젠더‘도 갈 수 있는’ 가게는 드물다. 그러다 보니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는 퀴어 프렌들리한(성소수자도 배려하는) 가게들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고, 그런 곳들만 발걸음하게 되곤 한다. 공간을 선택할 때 다른 사람들이 ‘쾌적함’이나 ‘힙함’을 본다면, 성별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은 ‘안전함’을 첫 번째로 꼽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게 화장실이 그렇다. 나는 줄을 기다리거나 더럽고 휴지가 쌓여 있더라도 화장실이 성별 구분 없이 하나 있는 곳을 선호한다. 화장실은 트랜스젠더로서 긴장하게 되는 공간이고, 누가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함이 앞선다. 가게가 집 근처라면 그냥 집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온 경우도 있다.
아무리 이태원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의료를 진행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서(아래 CD)의 경우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편안하게 마시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뒤에서 히히덕거린다거나, 대놓고 크게 무안을 준다거나, 몰래 사진을 찍다가 걸리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너무 당연해서 트랜스젠더나 CD들은 대부분 갈 곳이 하나 혹은 둘로 제한되고 만다. 어느 날은 커뮤니티에 괜찮다고 후기가 올라온 보광동 작은 카페에 가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국에서 올라온 듯싶은 CD, 트랜스젠더들로 가득했다. 정말 커피가 뭐라고. 마음 편히 마실 수 있는 곳이 그 작은 카페 하나밖에 없었을까, 짜증도 났다.
영업자로서 차별 없는 가게
이런 여러 이유로 이태원에 직접 카페를 연 적이 있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누구라도 마음 편히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하자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화분에 무지개 플래그를 작게 꽂아놓는 일부터 시작해서, 온라인 홍보에도 ‘퀴어 프렌들리한’, ‘차별 없는’ 등 문구들을 표기해 많이 강조했다. 손님들을 편하게 맞이하기 위해 대화를 이어가려 하면서도, 그 기본은 그들이 원할 때 한해서다. 나는 인사하는 정도만 다가가고 그분들이 말을 걸 때 대화를 시작하려고 신경 썼다. 만약 그들이 물어보면 내 정체성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하고, 혹시라도 무지에서 출발한 무례한 질문을 한다면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중하게 잘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하루는 의료를 진행하지 않는 트랜스젠더와 CD분들 4명 정도가 “여긴 커피 마셔도 돼, 우리 뭐라고 안 해” 하면서 들어왔다. 별것 없이 커피를 마시고 사진도 찍으면서 자유롭게 놀고, 다음에 친구들과 다시 온다면서 “이곳 분위기가 너무 좋고 편하다”고 이야기 들었을 때 보람을 느낀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아주 먼 지역에서 온 분도 있었다. 물론 이 카페에만 오려는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이태원에 참 많은 카페들이 있고 뷰 좋은 데를 일부러 찾아가는 이들도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참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일었다.
‘차별 없는 가게’는 ‘성소수자를 지지합니다’, ‘모두가 똑같은 사람입니다’ 등의 슬로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분명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건 비단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나 불편함이 생겼을 때도 방관하지 않고, 그 가게가 정말로 ‘차별 없는’ 가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건 영업자의 몫이다.
사실 가게가 성소수자 프렌들리한 곳이라 해서 갔는데 사장님의 친구들이라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례한 질문들을 듣는 경우가 꽤 있다. 게이 커플에게는 ‘누가 여자(역할이)냐’ 하고, 트랜스젠더에게는 ‘키도 큰데 굳이 하이힐을 신냐’, ‘티 나지 않겠냐’ 한다거나, 나에게 칭찬이랍시고 ‘성소수자 아닌 줄 알았어요’, ‘진짜 여잔 줄 알았어요’ 하는 말들을 내뱉곤 했다. 게이 커플의 경우 퀴어 프렌들리하기로 유명한 곳에 일부러 찾아왔기에 더 난처해하는 모습이었다. 한 날은 퀴어 파티도 종종 열리는 어느 바에 갔는데 사장님이 다른 이에게 나를 ‘트랜스젠더 활동가’라고 소개했다. 그냥 ‘활동가’라고 해도 되는데 말이다. “제 정체성을 말씀하실 때는 그래도 저의 동의를 구하셔야죠”, 하자 “아니, 여기 좋은 사람들도 많고 퀴어들도 많이 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흠도 아니고” 하면서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 선의의 혐오, 선의의 차별이랄까. 그 마음이 이해 안 되지는 않지만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 앞에서 과연 성소수자가 포함되는지 그 후로 경계하게 되었다.
정말 차별 없는 가게라면 손님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 말을 믿고 온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단한 기대라 할 것 없이 그저 편히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지만, 사회적 소수자들은 그럴 공간이 흔치 않다. 그렇기에 정말 ‘모두’와 함께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더 바라자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덕목으로 인권 교육을 받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차별을 묵인하지 않는 가게, 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계속 변화하고 확인하는 가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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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에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회원모금팀장. 트랜지션 7년 차, 친절한 사람이고 싶은 트랜스 여성 박에디. 아직도 배울 게 많음을 일상에서 느낍니다. 많은 경험과 새로운 길을 걷고 싶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