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
① 나는 커서 뭐가 되지
② 빗장을 여는 사람들
③ 그렇게 대표가 된다
④ 정치라는 소용돌이
- 정치라는 소용돌이
2007년 즈음 민주노동당에서 비례대표 1번을 장애여성으로 할당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민주노동당은 지지율이 높았기 때문에 그 당의 비례 1번이 된다는 건 국회의원이 된다는 뜻이었어요. 박경석 대표가 어느 날 “대표님, 정치 한 번 해보시죠?” 했을 때 당연히 장난인 줄 알고 “시켜줘 봐요. 내가 잘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던 거예요. 얼마 안 있어서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회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박경석 대표는 앞으로 거대한 장애인시설 권력과 싸우려면 우리에게도 국회의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국회의원이에요?” 하니까 “왜 안돼요? 장향숙 의원도 하잖아요.” 했어요. 장향숙 씨는 여성장애인연대 대표를 지냈던 분인데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면 되잖아요” 하니까 “누가 있습니까?” 그래요.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다 얘기해봤는데 아무도 안 하겠다고 그랬대요.
우리에겐 국회의원이 필요하고 지금 바로 그 기회가 왔고 우리 중엔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었죠. 점점 내가 결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가장 압박이 되었던 건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어요. 이것이 또 나에게 주어진 역할인가? 공감 대표가 된 것도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거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정치인데 이렇게 모르고 시작해도 될까? 그곳에서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데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어요. 정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우리 중에 경험자도 없었으니까 물어볼 곳도 없었어요. 결국 하기로 했죠. 박경석 대표는 제안을 할 때 꼭 농담처럼 말하는 스타일이에요. 나는 정치를 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하니까 걱정 말라면서 “어디 혼자 합니까?” 하셨어요. 그런데 가보니까 혼자더라고요.
정당에 가입하면서 장애여성공감 대표도, 이동권연대 공동대표도 그만두었어요. 두 단체 모두 대중운동 조직이었고 여러 정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정 정당의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어요. 민주노동당 비례 1번으로 가게 되니까 친하게 지냈던 사회당 사람들이 사회당이 이동권 투쟁을 더 열심히 했는데 왜 민주노동당 비례로 가느냐고 상처를 받고 서운해하셨어요. 미안하죠. 할 말이 없었어요. 그렇게 들어간 민주노동당엔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야말로 독고다이가 되었죠. 당에 들어가 보니 내부에서 활동해온 사람이 있는데 왜 바깥에서 사람을 데려왔는지, 왜 장애남성이 아니라 꼭 장애여성이어야 하는지, 이미 말들이 많았더라고요. 지지받기 보단 차가운 시선을 더 많이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름을 알리고 기여도를 높이기 위해서 성평등위원회, 여성위원회에 부지런히 얼굴 내밀고 인사하고 강연을 다녔어요.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당이 깨지는 상황이 되었어요. 당 안에 여러 분파가 있더라고요. 전당대회를 갔는데 패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입구 쪽에 있으라고 했어요. 대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정말로 막 욕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장애인운동할 땐 그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정당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깜짝 놀랐어요. 저에게 정치를 제안했던 건 심상정, 노회찬 씨 측이었는데 그분들은 탈당한다고 발표했어요. 당원들이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탈당하면서 나한테 당에 남을 것인지 자기들을 따라 나갈 것인지 물었어요. 당이 쪼개지고 민주노동당에 계속 남더라도 비례 1번으로 나를 추천하기로 했던 기존 입장이 번복되진 않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공식화된 게 아니었고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100% 장담할 순 없다고 했어요. 함께 탈당하자고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들의 미래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였거든요. 새로 정당이 만들어질지 아닐지도 모르고 만들어지더라도 국회의원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탈당한다고 했어요. 이번에도 사람들은 내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어요. 너무 당혹스러웠어요.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기왕 국회의원이 되려고 나선 거면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게 맞다는 사람도 있었고 장애인운동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을 따라 탈당하는 게 맞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고민 끝에 결국 새로운 정당으로 가기로 결정했어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옆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중요한 판단은 장애인운동 동료들이 함께 해줬어야 했던 것 같아요. 나의 정치 활동이 우리 운동의 필요에 의해서였다면 동지들이 함께 고민해서 이쪽으로 가라고 판단해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탈당한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창당했고 저는 공동대표가 되었어요.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전국을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어요. 장애인운동 동지들이 리프트 달린 봉고차를 한 대 연결해주셨고 공감에서 일하시던 분이 운전과 활동지원을 맡아주셨어요. 비례대표는 지역구 후보들이 선거 유세할 때 옆에서 발언도 하고 같이 손도 흔들어줘야 해요. 저로선 진짜 적응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유세 차량 위에 올라갈 수 없으니 덩그러니 아래에 있었어요. 재래시장을 다니면서 명함을 나눠주는데 명함을 주려고 해도 손이 닿아야 줄 수 있는 거더라고요. 장애인은 유세하는 것도 어려워요. 정말 애를 쓰며 선거운동을 했는데 정당 득표율이 조금 모자랐어요. 3%가 되어야 비례대표 1번이 국회의원이 되는데 0.6%가 부족했죠. 그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던 장애여성 곽정숙 씨는 국회의원이 되었어요.
- 비장애인들의 세상
다음 선거를 바라보며 계속 정치 활동을 해나갔어요. 진보신당 대표단이 5.18 묘역에 참배하러 간 적이 있어요. 10시 행사였는데 저는 8시쯤 먼저 도착해 있었어요. 대표단은 보통 같은 차로 이동하는데 저는 그 차를 탈 수 없으니 따로 가야 했어요. 늦지 않으려고 늘 긴장했어요. 미리 도착해서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어요. 5.18 구 묘역은 휠체어 접근이 어려워서 결국 저만 덩그러니 남고 다른 대표들끼리 갔어요. 행사나 모임 장소에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지 직접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야 했어요. 아아, 세상이 이런 거구나. 현실이 어떤지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들이 많았죠. 전엔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갈 수 있는 곳만 갔었다면 이젠 내가 필요 없는 곳, 내가 갈 수 없는 곳에도 어떻게든 가서 내 자리를 찾아야 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매일 설사를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발언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표단 회의나 상근자 회의에서 의견을 내야 할 때 경험이 적고 잘 모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항상 자신이 없었어요.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곳으로 발언하러 갈 때면 비서한테 묻기도 하고 자료를 받아서 열심히 읽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잖아요. 지금이라면 젠더 관점으로 발언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노동자 중심일 때였어요. 그들에게 나는 그냥 ‘장애인’일 뿐이잖아요. (웃음)
도착하면 처음엔 ‘어머, 장애인이 여기 웬일이야’하는 얼굴로 쳐다봐요. 진보신당 부대표라고 인사하고 발언하면 그때부터 보는 눈이 좀 달라져요. 서울에서 대표단 왔다고 지역 당원들이 마련해둔 식당이나 숙소에 가보면 다 계단이에요. 당원들도 당황스럽고 나도 당황스럽죠. 부대표니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장애인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괴롭죠. 존재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 진보 정치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도 장애인은 없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거니까 한편으론 내 존재가 무겁고 중요했던 곳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비장애인들의 세계를 많이 경험했어요. 용산참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대학교 청소 노동자들 농성하는 곳… 많이 쫓아다녔어요. 한겨울에 울산 미포조선소에 갔던 적이 있어요. 노동자가 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하고 있었는데 그때 노동현장의 무서움을 알았어요. 용역들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자동차를 불태우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실려 가는데, 세상에, 너무 무서웠어요. 평택 쌍용자동차 노조를 경찰특공대가 테러 진압하듯이 지붕 위에서 때려잡았을 때도 거기에 있었어요. 용역들이 쳐들어온다고 나를 먼저 피신시키는데, 아아, 우리 장애인들이 투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진짜 무섭더라고요.
재밌는 것도 많이 봤어요. 노동자대회나 전당대회 같은 큰 행사에서 각 당의 정치인들은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나와야 하니까 어떻게든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밀치고 몸싸움을 해요. 비서들이 새벽같이 와서 자리를 사수하다가 대표가 오면 비켜주는데 그걸 못하면 문책을 당해요. 권력이라는 게 참 재밌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두 번째 자리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요. 조직의 대표가 된다는 건 어딜 가나 맨 앞에 서고 대접을 받는다는 뜻인데 그것에 익숙해지면 벗어나기가 참 힘들겠단 생각도 했어요. 저도 대접을 잘 받았는데 부대표라서 대우해준 것인지 ‘장애인 우선’이라 그랬던 건지 확실치 않지만요. (웃음)
한번은 당직자분이 아파서 입원했어요. 음료수를 사서 찾아갔더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너무 고마워했어요. 대표라서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고 상근자들과 격의 없이 지냈어요. 대표들과 상근자들이 회의를 하는 날이었는데, “안녕하세요!” 하면서 크게 인사하면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내가 인사할 땐 편안하게 인사를 받던 사람들이 다른 대표들이 등장하니까 쩔쩔매는 거예요. 뭐지? 날 무시하나? 어떤 분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내가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되게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똑같은 행동도 권력 있는 사람에겐 겸손함이지만 권력 없는 장애인에겐 비굴함으로 보인다는 것, 겸손도 권력에서 나온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내 역할은 평등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평등조차 권력을 가져야 만들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바깥이 어두워지면
2011년 진보신당에서 심상정, 노회찬 씨가 다시 탈당했어요. 진보신당 탈당파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통합해서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어요. 저도 탈당해 통합진보당으로 갔어요. 2012년에 다시 총선이 다가왔는데 통합진보당에선 장애인 비례대표 할당이 7번이었어요. 당시 정당 지지율로 보았을 때 당선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번호였어요. 그런데 그마저도 당 내 경선에서 이겨야 받을 수 있었죠. 나로서는 어떻게든 그 번호를 받아야 했죠. 경선에는 장애여성 후보가 저 말고 한 분 더 나왔어요. 투표가 끝나고 뚜껑을 열었더니 그 후보가 700표, 제가 400표 정도였어요. 큰 차이였죠. 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때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라고요.
활동이력은 제가 더 많았는데 특정 정파가 그 후보를 밀어준 거예요. 지금이 정리할 때다, 더 이상 애정을 가지면 내가 너무 지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정당이 깨졌다가 각자 길 가다가 또 깨지고 다시 합쳐지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뭐가 진보이고 뭐가 보수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이건 내 문제, 장애인운동과 전혀 상관이 없었어요. 부대표니까 탈당하면 안 된다는 사람, 지지도가 안 나오니까 탈당해서 다른 진보 세력과 합쳐서 지지도를 올려야 한다는 사람…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휩쓸려갔던 것 같아요. 장애인운동의 성과를 법 제정으로 이어가기 위해 나선 길이었는데 내게 정치 운도 없었고 우리의 운동도 너무 약했어요. 나의 지지 기반이 되어주고 뒤에서 힘을 실어줬어야 하는데 그냥 내가 원해서 간 것처럼 되어버렸던 거죠. 결국 내게 권력 욕심이 없었고 그것은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치명적 문제였다는 자책만 남았어요.
그만두고 나서 6개월 동안 회복의 시간을 보냈어요. 공감에서 다시 와서 일하는 게 어떠냐고 했는데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사이에 공감도 나도 각자의 이력을 만들어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쉬면서 퀼트를 했어요. 바느질을 하니까 마음이 좀 정리가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뭐가 달라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퀼트를 완성한 뒤에 다시 보면 바느질의 고르기로 생각이나 감정이 보여요. 여기 바느질이 비뚤어진 걸 보니 이걸 할 때 분노가 있었구나. (웃음) 정치를 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재밌기도 했고 배운 것도 많았어요. 장애인운동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었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였죠.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시야도 넓어졌어요. 받은 것도 얻은 것도 굉장히 많은데 그만큼 능력을 펼쳐주지 못한 게 아쉬워요.
84년인가 장애인시설에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가족들이 나중에 나에게 시설에 가라고 할 때가 오면 상처가 될 거 같았거든요.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찾아서 가고 싶었어요.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가 시설에 산다고 해서 가봤어요.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하루 종일 TV만 보는데 너무 지루해 보였어요. 여기서 살면 너무 괴롭겠다 싶어서 안 가기로 했어요. 몇 년이 지나서 일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고 해서 연락을 했어요. 나는 화장실도 혼자 못 간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다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입소하라고 했어요. 진짜 들어가 살 생각이어서 미리 이불이랑 옷도 보내두었어요. 동생과 함께 기차 타고 갔는데 허허벌판에 비닐하우스 두 동이 덩그러니 있었어요.
하우스 안에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장애인들이 가전제품을 조립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먹고 자고 일도 한대요. 원장은 장애남성이고 거주인들은 모두 혼자 화장실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경증 장애인들이었어요. 내가 제일 중증이었죠. 남동생이 나를 여기 두고 갈 순 없다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다리를 저는 여성이 자기가 날 도와주겠다면서 여기 있으라고 했어요. 한참 고민하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니까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어요. 나에게 물었어요. 나는 어떻게 살지? 터널이 끝나서 바깥이 밝아지면 내가 사라졌다가 터널로 들어가면 다시 내가 나타났어요. 어두워야만 내가 보였죠. 인생에서 힘들 때가 찾아오면 터널을 지나던 그 순간을 생각해요. 힘들 때 나를 바라보면 내가 보인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살아왔어요.
박경석 대표님이 어느 날 전화 와서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일해 볼래요? 대표는 아니고 사무국장인데 하실래요?” 했어요. 박옥순이 하던 일인데 지쳐서 그만두게 되었다고요. 95년에 저를 업어서 빗장으로 데려갔던 그 박옥순이요.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했어요. 대표든 아니든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새롭게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2007년에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모니터링하고 장애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건이나 차별이 발생할 때 그것을 구제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고 관련법을 개정해 나가는 활동을 해요. 지하철 승강장 전광판에 안내 문구가 글자로 나오는 거, 버스정류장의 전광판에 몇 번 버스가 들어오는지 안내되는 거, 버스 안에서 다음 역을 알려주는 안내문구 나오는 게 다 우리가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진정해서 변화된 것들이에요. 예전엔 모두 음성으로만 안내되었죠. 요즘은 ‘장애인편의증진법’ 안에 300제곱미터(약 90평) 이하의 사업장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을 폐지하라고 활동하고 있어요. 이런 조항이라면 편의점의 80%가 제외되거든요.
단체에 들어와 처음 맡았던 일은 장애인들이 보험 가입을 거부당하거나 차별당하는 걸 모니터링 하는 사업이었어요. 이전에 저는 대표로서 주로 외부활동을 해왔었지 사업보고서를 쓰거나 예산을 관리하는 실무적인 일은 하지 않았어요. 사무국장으로 들어왔으니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보고서를 쓸 수 있기를 하나, 모니터링한 걸 정리할 수 있기를 하나, 비장애활동가가 하는 걸 빤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됐어요. 아이씨, 어떡하지, 어떡하지. 마음이 답답하고 너무 괴로웠어요.
비장애활동가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목, 손가락이 아픈데도 밤새워서 일하는데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지 썩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열등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런 시간을 꽤 보냈어요. 활동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거 시켜줘” 하는 것도 힘이 필요한 일인데 그렇게 말하면 “교수님한테 전화해서 자문 좀 부탁해주세요”, “장애인의 부모들한테 설문조사 좀 부탁해주세요” 했어요. “응, 알았어” 하고는 최선을 다해 전화를 돌렸어요. 이전에 쌓아온 관계들이 모두 자원이 되었죠. 그러면서 실무도 조금씩 배우고 자리를 잡아갔어요. 그러다 또 대표가 되었죠.
우리 단체는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해요.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공익변호사들을 연결해서 법률 지원을 해요. 성폭력상담소 같은 걸 생각하시면 돼요.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걸 지원하는 일이라서 새로워요. 40대 중반의 노숙하는 발달장애여성이 방화 범죄를 저질러서 구속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여성이 동냥해서 받은 동전을 박카스 박스에다 모아서 편의점에 갔어요. 지폐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더럽다고 쫓아낸 거예요. 그분이 너무 화가 나서 편의점 앞에 종이박스를 모아놓고 불을 지른 게 CCTV에 다 찍혔어요. 알아보니 전과 4범이었어요. 우리는 이 사건을 장애여성의 문제로 보고 지원하기로 했어요. 재판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제대로 변호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화를 표현하는 방식을 그것밖에 배우지 못했다면 바꾸도록 해야 하니까요.
이전의 범죄에 대해서 재조사를 했는데 두 건 정도는 이 여성이 했다고 볼 수 없는데 누명을 쓴 거였어요. 아버지를 찾아가서 형량이 커지지 않도록 돕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의아해하면서 자기들을 왜 도와주려느냐고 물었어요. 40여 년 동안 딸을 건사하면서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봤지만 다 어렵다고만 했고 도와주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대요. 구속된 그 여성을 찾아갔더니 집에 있으면 심심하고 복지관도 재미없대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가 계속 얘기했어요. “화날 때 불을 지르면 안 된다, 큰일 난다, 화나면 욕을 하든가 그냥 화를 내라.” 알았다고 했어요. 공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연결했어요. 결국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그녀에게서 종종 전화가 와요. 집에 있다가 심심하면 노숙하던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나 봐요. 그녀를 만나면서 알게 됐어요. 안전을 위해서 집에만 있으라고 하는 게 그녀가 행복한 게 아니더라고요. 노숙생활이지만 나름대로는 자유롭고 재밌는 거예요. 바깥에 친구도 있고 길에서 사는 방법도 터득했어요. 나 만나면 오천 원만 주세요, 하는데 만 원 주면 만 원 말고 오천 원 주세요, 오천 원 주면 나 맛있는 거 먹을게요, 해요. 그녀한테 계속 말하죠. 아프면 병원 가는 거 알죠? 노숙인을 위한 병원 있으니 꼭 가세요. 누가 혹시 때리면 맞지 말고 피하고 자주 목욕해요. 전동휠체어 충전시키는 거 잊지 말아요. 그러면 알았다고 해요.
장애인 차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 관점에 따라 어떻게 지원하고 해결할지가 달라져요. 장애여성공감 활동하면서 문화, 차별, 여성주의에 대한 경험을 쌓았고 이동권연대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장애인운동을 만났어요. 장애해방열사_단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알았고 정치활동을 하면서 짧았지만 강렬하게 비장애중심 세상을 경험했죠. 그 모든 게 지금 활동하는 데 바탕이 돼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