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바꾼 사건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컴퓨터를 배우면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나는 또다시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됐어요. 정신장애와 신체장애, 노인들까지 20여 명이 생활하는 곳이었어요. 거기서 어떤 후원자가 스쿠터를 사줬어요. 처음엔 운전할 줄 몰라서 넘어지기도 했는데 시설 안을 돌면서 타는 법을 익힌 뒤 조금씩 더 멀리 나가보았어요. 나 혼자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정말 신세계였죠. 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때 학교라는 걸 처음 봤어요. 아, 학교가 저렇게 생겼구나, 신기해했죠. 한참 가다 보면 리조트랑 스케이트장도 나왔어요. 아침밥 먹고 나가서 오후 네다섯 시가 되어서야 돌아왔어요. 그렇게 1년을 보냈어요. 처음엔 재밌었는데 매일매일 보니까 더 이상 재밌지 않았어요. 갈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으니까 이제 더 넓은 데를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스쿠터 덕분에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2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됐어요.
집에 왔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어요. 길을 잃을까 봐 겨우 동네만 조금씩 돌아다니거나 그것도 무서워서 나가지 않았어요. 시설에 다시 들어갈까 고민했죠.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던 어느 날 오르막길이 보여서 올라갔는데 커다란 장애인복지관이 나타났어요. 아차산 초입에 있는 정립회관이었어요. 종일 그 건물 여기저기를 서성거리고 다녔는데 밤이 되니까 복도 끝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여긴 뭐 하는 곳인가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휠체어 탄 남자가 들어와 보라면서 손짓을 했어요. 거긴 노들야학이었고 나에게 손짓한 그 사람은 박경석 교장이었어요. 야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 장애인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했어요. 공부할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어차피 갈 데도 없으니까 여길 한번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이 좀 신기해요. 내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 순간이었죠.
1998년 5월 야학에 입학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야학 교사들한테 푹 빠져서 걔네들 보러 다녔어요. 비장애인과 그렇게 격의 없이 어울려본 건 처음이었어요. 입학하고 20일 만에 야학 사람들을 따라 집회에 가게 됐어요. 평택 에바다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청각장애인 시설에서 폭력과 비리가 있었는데 그걸 해결하라고 투쟁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많은 전투경찰을 본 건 처음이라 깜짝 놀랐는데 아무 힘도 없는 장애인들이 시커멓게 무장한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는 걸 보니까 너무 무서워서 오줌이 나올 뻔했어요. 간이 콩알만 해져서 얌전히 앉아 있기만 했어요. 그날 이후 여러 집회에 갔는데 점점 재미있어졌고 경찰과 싸울 용기도 생겼어요. 전혀 몰랐는데 나에게 저항 정신이라는 게 있었더라고요. 투쟁하는 건 딱 내 스타일이었어요. 콩알만 하던 간이 점점 붓기 시작했어요.
입학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1999년 6월 매우 중요한 사건이 생겼어요. 작은자의집에서 만났던 친구 시영이가 CCM 가수가 되어 대학로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나를 초대했어요.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4호선 혜화역에 갔어요. 그땐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고 계단 옆에 휠체어용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거나 그마저도 없었어요. 리프트에 올라타던 순간 스쿠터의 앞바퀴가 더 나가버렸어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리프트엔 안전판이 있는데 그게 제구실을 못 한 거죠. 나는 스쿠터와 함께 지하철 계단으로 곤두박질쳤어요.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 정신을 잃었어요.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이 들어 동생들 얼굴을 봤을 때에야 ‘아, 살았구나!’ 했죠.
전치 3주의 부상을 입고 입원해서 목과 머리의 치료를 받았어요. 지하철공사는 내가 운전을 잘못해서 생긴 사고라면서 자기네는 잘못한 게 없다고 했어요. 고맙게도 노들야학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서울시와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책임을 규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어요. 집회도 하고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도 했어요. 1년 후 법원이 지하철공사 측에 배상금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어요. 우리의 손을 들어준 거예요. 이 사고로 혜화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어요. 그 경험은 나에게 큰 변화를 줬어요. 내 문제로 사람들이 집회를 하고 함께 싸워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경험했죠.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그 과정에서 나도 바뀌고 있었죠.
- 판잣집에서 시작된 혁명
2001년엔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1월에 4호선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려던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노들야학을 중심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그때 막 박경석 교장이 이동권연대 대표가 되었죠.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만날 데모하고 농성하러 다니느라 야학 수업에 자주 빠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야학에 갔다가 인권반 수업에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 활발했던 이 운동은 중증장애인이 주체가 되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운동인데 그것을 위한 핵심 서비스가 활동지원서비스라고 했어요. 미국과 일본에선 활동지원사가 중증장애인에게 와서 옷도 입혀주고 밥도 먹여주고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외출도 같이하는데 활동지원사의 인건비는 정부에서 준다고 했어요. ‘우와~ 거기 장애인들은 좋겠다!!!!’ 너무 놀라웠어요. 나는 20년 동안 집에서 밥 먹고 잠만 자다가 스무 살부터는 시설에 들어가 밥 먹고 잠만 자길 10년 했는데 선진국의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처럼 학교도 가고 일도 하고 가고 싶은 곳에도 마음껏 간다니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그 후 정립회관에서 하는 장애인 동료상담 교육에 참석했어요. 자립생활운동에서 당사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그램이 동료상담이에요. 그 교육을 통해 처음으로 주장하는 법을 배웠어요. 나는 요구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 동생들이 울고불고 떼를 쓰면 부모님이 쟤가 뭔가 필요한가 싶어서 물어보고 사다 줬던 기억이 났어요. 나는 떼를 쓴 적이 없었어요. 동생들이 왜 그러는지도 몰랐어요. 나는 왜 그런 걸 안 해 봤을까?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생각했죠. 아마 집 안에서만 살았으니까 집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시장에 가서 눈으로 봐야 먹고 싶은 것도 생기고 갖고 싶은 것도 생길 텐데 나는 아예 나가질 않았으니까. 내가 조르면 엄마가 마음 아플 것 같아서 참은 게 아니라 욕구 자체가 없었어요.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는 그런 삶을 살았죠.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으니 언어도 성장하지 못했어요. 가족 외에 만난 사람들이라곤 시설에서 만난 발달장애인들뿐이었고 그중 비장애인은 목사님뿐이었죠.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했지만 성경 말씀을 듣기만 했어요. 그런데 장애인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옷을 입고 벗는 요령이나 다양한 보장구에 대한 정보도 얻었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털어놓는 경험을 한 게 좋았어요.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죠. 동료상담을 통해 내가 꽤 적극적이고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꿈이 생겼어요. 시설에 살 때부터 막연히 혼자 살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던 것이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어요. 본격적으로 혼자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32년을 살면서 그렇게 꿈에 부풀었던 적은 없었어요. 예전에 우리 가족이 살던 판잣집이 비어 있었어요. 그린벨트 지역이라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가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당시 우리 집은 2층이었고 계단이 있어서 아버지나 동생들이 업어서 내려주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도움받는 게 눈치가 보여서 열 번 나갈 거 한 번만 나가게 돼요. 아버지에게 판잣집에서 혼자 살아보고 싶으니 휠체어가 출입할 수 있도록 고쳐 달라고 요구했어요. 처음에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으니 아버지도 결국 허락하셨어요. 계획이 생기자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내가 들은 자립생활 이야기가 정말일까? 거짓말은 아닐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얼마 후 판잣집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했어요. 내 방이 생긴 게 너무 좋았어요. 휠체어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휠체어로 혼자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아버지가 만들어주셨어요. 나 혼자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침에 눈 뜨자마자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가서 밖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낸 뒤 밤 열한 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선 잠만 잤는데도 방에 혼자 있을 때의 달콤함이 진짜 좋았어요. 물론 어려움이 많았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했어요. 밤 열 시에 야학이 끝나면 야학 교사들한테 부탁해서 화장실 볼일을 봤어요.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가면 장애인이라고 병신 취급하면서 밥을 안 줄 때도 많았어요. 그럼 슈퍼에 가서 우유랑 빵을 사 먹거나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나 라면 같은 걸 먹었어요. 종일 굶었다가 갑자기 허겁지겁 먹고 집에 들어가면 꼭 밤에 혼자 있을 때 똥이 누고 싶어서 애를 먹었어요. 배가 고파도 갑자기 많이 먹으면 안 되고 허기만 채워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죠. 정말 급할 땐 아차산역에 가서 역무원한테 화장실 가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거나 그 사람이 바쁘면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했어요.
판잣집이 야산에 있어서 비가 오면 출입구가 질펀해져서 휠체어가 푹푹 빠졌어요. 가끔 밤늦게 집에 들어가다가 휠체어가 빠지면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핸드폰도 없던 때여서 아버지를 부를 수도 없었죠.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산 모기한테 뜯기면서 추위와 싸우며 밤을 지새우는 일이 계속 생겼어요.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서 야학 교사 종민이와 진태를 꼬셔서 같이 살자고 했어요. 그 둘도 가난한 대학생이어서 좋다고 했어요. 생활비는 같이 분담하되 월세는 따로 내지 않고 두 사람은 나의 활동지원을 해주기로 했어요. 큰 침대 하나에서 남자 셋이 옹기종기 모여서 잤어요. 진태는 무뚝뚝하고 종민이는 싹싹했어요. 밤에 혼자 있다가 똥 마려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밥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었어요. 주말이면 나는 휠체어 타고 그 친구들은 자전거 타고 한강에 나가기도 하고 가끔 영화도 보러 가면서 1년 동안 재밌게 지냈어요. 두 사람이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 싸우는 법을 배워가다
이동권 투쟁이 한창일 때 박경석이 나한테 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자리를 제안했어요. 투쟁국장이 뭐 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지만 싸우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하겠다고 했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아마 가르쳐줬어도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시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그땐 정말 박경석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었어요. 똘마니라고 해도 좋아요. 나는 박경석이 진짜 좋았어요. 박경석이 하자는 대로 하면 다 이뤄졌어요. 박경석 같은 중도장애인을 시설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놈은 여자친구 데려와서 “예쁘지? 좋겠지?” 하면서 잘난 체하고 나를 무시했어요. 박경석을 처음 봤을 때 그놈이랑 장애가 똑같네, 생각했어요. 말하는 투는 그놈처럼 좀 재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박경석은 생각하는 게 퍽 달랐어요. 나 같은 중증장애인에게 투쟁국장을 제안한 것부터가 그랬죠.
진짜 신나게 싸웠어요. 겁이 많은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재밌었어요. 2002년에 시청역 선로를 점거했던 날이 있었어요. 발산역에서 또다시 장애인이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 죽은 일이 발생한 때였는데, 박경석이 30일 넘게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서울시가 꿈쩍도 안 하니까 장애인 50명, 비장애인 30명, 총 80명 정도가 모여 40분 동안 철로를 점거하고 지하철을 막았어요. 최대한 오래 버티려고 커다란 사다리를 펼치고 사다리 칸 사이사이로 장애인들이 들어가 쇠사슬로 몸을 묶었어요. 지하철 철로에 전기가 흐른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휠체어-쇠사다리-쇠사슬을 타고 전기가 통하니 좀 무섭더라고요. 온몸이 찌릿찌릿했어요. 현장에 있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연행됐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경찰 조사라는 걸 받은 날이었어요. 야학에 들어간 뒤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했죠(웃음). 나도 경찰과 대화하는 게 처음이고 경찰도 나 같은 장애인과 대화하는 게 처음이었어요. 나도 당황했고 경찰도 당황했어요. 집이 어디고 누가 시켰는지, 피켓은 누가 목에 걸어줬고 앰프는 누가 가져왔는지 경찰이 꼬치꼬치 물어보기에 조목조목 사실대로 대답했어요. 우리 집은 어디이고 이거 다 박경석이 시킨 거라고(웃음). 그 경찰서에서만 중증장애인이 열 명 넘게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에 나는 말을 썩 잘하는 편이었어요. 형사들이 뇌병변장애인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조서 쓰는 데 애를 먹었어요. 이틀 동안 유치장에서 지냈는데 경찰들이 우리 밥 먹여주고 화장실 가는 것도 보조해줬어요. 나중에 경비과장이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이런 장애인들을 대체 누가 잡아 왔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웃음).
언젠가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농성을 하려고 천막을 치려다가 또 연행된 적이 있어요. 버티다가 다 잡혀가는 전술이었죠. 박경석이 나한테 “너는 빨리 피해서 숨어라” 했어요. 그건 좀 비겁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박경석이 “장렬히 싸우다 체포되는 것도 투쟁이지만 누군가 남아서 끝까지 지키는 것도 투쟁”이라면서 너는 남아서 맨몸으로라도 농성을 시작하자고 했어요. 사람들이 다 잡혀간 뒤 나 혼자 광화문 거리로 돌아와 밤샘 농성을 했어요. 4월이었는데 얼어 죽을 만큼 추워서 차라리 잡혀가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한다면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렇게 박경석에게 싸우는 법을 배워나갔어요. 경찰이 불법이니까 해산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박경석은 끝까지 개겼어요.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런 장애인을 본 적도 없었어요. ‘감히 장애인이 어떻게?’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박경석은 억울하면 개겨도 되고 부당하면 싸워야 한다는 걸 알려줬어요. 내가 버스를 멈출 수도 있고 지하철을 세울 수 있고 세상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야학이 가르쳐줬죠. 나는 싸우는 게 좋았어요. 내가 차도를 향해 달려 나가면 자동차들이 멈춰 서고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것도 재밌었고 “규식이 잘 싸우네” 하면서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좋았고 박경석도 날 인정해주니까 내 존재감을 느꼈어요.
*이 글은 비마이너가 기획한 책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글 홍은전,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에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