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출산과 관련된 재생산의료기술은 지속해서 발전해왔으며 정상화된 의료기술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과거 많은 여성들이 태동을 통해서 임신 사실을 인지하게 되거나 가내에서 분만이 이루어졌던 때와는 달리 현재에는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에 다양한 종류의 의료기술 사용과 진단, 처방 등이 의료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임신테스트기의 사용에서부터 임신 기간 초음파 진단 및 정기적인 산전진단까지, 그리고 언제 난자를 동결 보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부터 어떠한 배아를 착상시킬 것인가의 문제까지 재생산의 의료화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음을
이 글은 2020년 1월, Women Enabled International(아래 WEI)에서 발간한 문서 ‘임신중지와 장애: 교차적 인권 기반 접근을 향하여(Abortion and Disability: Towards an Intersectional Human Rights-Based Approach)’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WEI는 전 세계 장애여성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활동하는 조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 성 및 재생산 건강과 권리, 정의, 교육 등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제고하고 국제 인권 기준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장애를 의학이 정의하는 방식 그대로 받아들였던 산부인과 의사이다. 내가 관습적인 의료체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장애가 어떻게 이 공고한 세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혀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지면에 나의 짧은 생각을 얹는 것이 예상보다도 훨씬 버거운 일이었다. 미약하지만 이 글이 앞서 행동해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연대의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위안 삼아 글을 쓴다.의료와 장애의 오래된 불화1)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 상 낙태죄(자기낙태죄 조항 제269조 제1항, 의사낙태죄 조항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약 2주 뒤인 12월 31일까지 정부와 국회는 낙태죄를 폐지하고, 형법 및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률의 개정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10월 7일, 형법 상 낙태죄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고, 낙태의 허용요건 조항을 신설한 법안을 입법예고 했다. 낙태죄 완전 폐지가 아닌, 임신 24주 주수 제한을 두는 등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
전 세계적 대공황이 번지기 직전인 20세기 초, 사회변화에 대한 긍정주의로 가득 차 미국의 진보주의 개혁운동 혹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이 절정을 이룬 시기. 오랜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세계적인 패권이 바뀌기 시작하던 시기.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합리성과 의지로 세상 모든 것을 개혁할 수 있다는 불안한 믿음이 꽃을 피웠던 바로 그 시기에 우생학은 절정을 이루었다.물론 우생학은 20세기 초에 갑자기 발견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서구 사회는 대량 실업과 이주, 부랑과 구걸 문제 등 전통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사회 문제
프롤로그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로 명시되어 있는 다섯 가지 경우 중 첫 번째 항목이다. 박정희 정권 비상국무회의가 1973년에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하게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실리면서, 이 내용의 구체적 의미와 상관없이 정부가 인구정책 차원에서의 낙태 자유화의 신호를 주었”다고1) 한다면, 이것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다른 장애인단체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내가 활동하고 있는 조직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에 대하여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활동가나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건네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은 이들은 대개 “농성을 해요.”, “천막을 쳐요.”와 같은 대답을 한다. 농성 투쟁. 그것만이 전장연의 정체성이고 차별성일까? 소위 주류 장애계라고 하는 단체들도 필요에 따라 집회나 농성의 방식을 활용해서 단체의 요구를 주장한다. 하물며 자유한국당 황교안 전 당대표도 삭발·단식 농성을 한다. 그러나
《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젠더 관점을 진단하다’ 좌담회 》① 장애인운동 현장의 젠더 불평등을 말하다▶ ② 젠더 관점 부족한 장애인운동, 동의하는 단 한 사람 어딨나요?부모운동과 발달장애인의 성진희: 섹슈얼리티를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안이 ‘발달장애인의 성적 권리’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제일 먼저 부모나 주변의 지원인들과 부딪히게 된다. ‘성적 권리’라는 말을 쓰더라도 결국 ‘문제적 행동’을 어떻게 통제할지, ‘규범적 성교육’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주변인이 통제적인 성규범을 가진 발달장애 여성들
[편집자 주] 진보적 장애인운동 내 젠더 감각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과연 진보적 장애인운동 내에서는 젠더·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도 운동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진보적일까? 지난 9월 8일과 18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종로구 유리빌딩에서 다섯 명의 여성활동가들이 장애인운동에서 젠더·섹슈얼리티 의제가 어떻게 인식되고 다뤄지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좌담회의 사회는 이진희 장애여성공감(아래 장공감) 대표가 맡았으며, 토론자로는 김상희(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수경(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정다운(전국장애인
시설에 설치된 자위방?장애인 거주시설 내에 자위방을 따로 만드는 것을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대안으로 이야기하던 사례가 있었다.1) ‘시설 장애인의 자위행위 권리’2)란 이름의 책도 등장했다. 급진적인 대안처럼 이 소식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주시설의 조건상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오히려 무절제한 욕구를 허용함으로써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 입장은 달라 보였지만, 자위를 허용하는 것으로 장애인의 성적 권리가 활짝 열릴 것이란 의견에선 일치한다. 장애인운동은 시설이란 존재 자체가 인권
활동보조가 필요한 몸 나는 일상에서 활동보조가 필요한 중증장애여성이다. 얇은 팔과 다리, 구부러진 손가락 등 장애를 가진 나의 몸은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 몸’으로 규정된다. 장애여성공감 활동을 시작하기 전 내게 몸의 경험은 남들에게 최대한 숨길 수 있다면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힘들겠다”, “손가락을 똑바로 펴야지” 등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장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나를 더욱 위축되게 했다. 다른 사람의 보조를 받는 것은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일이기에 내 자존심을 지키고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에서 활동하다 보면 장애여성의 경우 주변인에 의해 성폭력 피해가 인지되어 상담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의 절대다수는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 등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들의 사건을 지원하다 보면 몇 가지 반복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성폭력? ‘사귀는 사이’인데… 첫 번째 상황은, 피해자들이 가해자와의 관계를 연애 관계로 인지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주변인에 의해 성폭력으로 신고되어 상담소에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와 상담하다 보면 자신은 가
성적 권리도 인권이다 ‘장애인의 성’을 주제로 한 글이나 말은 대부분 섹스를 할 수 있는지, 못하는 경우엔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머물러있다. 이런 질문과 답은 대부분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남성의 경험에 기반해있다.(이제까지 ‘장애인의 성’은 ‘장애남성의 섹스’ 이야기였다, 김상희) 중증장애를 가진 남성은 성적 권리에 대한 요구자로서 발언을 하는데, 대부분은 성을 향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피해’나 ‘차별’로 구성하고, ‘차별 피해’를 호소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언설 속에서 피해가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지, 차별
장애여성이 섹스를 한다고? 장애가 있는 내 몸은 일상에서 많은 ‘보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조를 하는 사람에게 내 몸을 보이거나 만지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도와주면 더 편할 것 같아서...”라는 말로 상대가 내 몸을 마음대로 옮기거나 움직이더라도 보조를 받는 입장에서 ‘좋은 의도’인 그 마음이 왜 불편한지 말하기 어려웠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불편한’ 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했고 당신의 의도를 부정하거나 무안한 일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난 20년간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 성장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은 ‘장애인 차별의 원인이 개인의 장애 상태가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개념’이었다. 즉, 휠체어 탄 사람이 버스를 타지 못하는 것은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휠체어 탄 사람도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회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에 대한 사회적 개념이 확장될수록 “몸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멀어진 측면이 있다.”1) 특히 장애여성의 몸은 사회적 차별 속에서 더욱 은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