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장애인당(當) 공동대변인 기고②

탈시설장애인당(當)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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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블리즘(ableism, 비장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성장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로 점철된 대학입시 제도를 거쳐 제도권 안에서 장애와 스포츠(신체 활동)를 연구했다. 그때는 내 삶 자체가 에이블리즘의 논리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지금도 기억한다. 논문을 읽다가 운명처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통치성 이론을 만났다. 장애인의 스포츠(신체 활동)가 국가의 통치 기술로 활용될 수 있다니! 점차 비판 의식이 자라나고 있던 차에 지배 담론에 저항할 무기를 찾은 것 마냥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타오르던 불꽃은 쉽게 사그라졌다. 구조에 저항할 만큼의 동력이 없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에이블리즘에 (재)순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권력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재활복지 전문가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장애 관련 지식이 실제로 장애인의 권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장애를 치료와 재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의료 담론, 장애를 열등하다 낙인찍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우생학, 시민을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분하는 자선과 동정의 시선은 이미 우리 사회 내에 아주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에이블리즘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장애학 관련 서적을 접하면서 에이블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둘씩 수집했다. 그러나 전선을 확대하지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외부와 연대를 시도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러던 시기, 연구를 위해 김도현 선생님의 저서 『차별에 저항하라』를 읽게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혼란이 커졌다. 내가 두발로 딛고 서있던 이 땅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장애와 관련된 어떤 사회 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장애인 운동의 역사는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 위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전문가 행세를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연구를 위해 직접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를 찾아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마치 저 먼 땅에 수립된 망명 정부를 방문하여 해방 용사들을 만난 듯한 기쁨이었다. 이어 박경석 대표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23주기 투쟁’에 초대해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그곳에서 협력적으로 타오르는 연대의 들불을 보았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저항의 맞불.

그제야 비로소 명확하게 알았다. 사회는 자연스럽게 진보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도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지 않는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가들과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세력이 주체적으로 사회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탈시설화도 마찬가지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황상현 씨. 사진 제공 황상현 

크리스 채프먼(Chris Chapman), 앨리슨 캐리(Allison Carey), 리아트 벤-모셰(Liat Ben-Moshe)가 『감금된 장애: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구금과 장애』(Disability incarcerated: Imprisonment and disability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2014)에서 말했듯, 시설은 단순히 장애인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시설화의 역사는 구금 및 감금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시설화의 본질은 지배 세력이 장애인, 광인, 빈민으로부터 자신들만의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한 자본주의화된 장애인 시설에서 창출된 이윤의 대부분은 지배 계급에 귀속된다.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 사회의 안녕과 이익을 보존 또는 증진하기 위해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지는 식민화된 공간이다.

또한 시설화는 감금 담론, 의료 담론, 우생학과 긴밀히 연동해 작동한다. 이를 통해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위치시키고, 교정(재활 또는 교육)을 통해 정상 규준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로 호명한다. 재활전문가에게 교정을 받은 후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그들은 정상 시민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주류 집단의 안전을 위해 총체적으로 배제되고 관리된다. 열등한 존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효율성의 논리 아래 최종 승인된다. 결국 시설수용 또는 시설화는 에이블리즘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에이블리즘을 존속시키는 강한 물질적·이념적 토대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탈시설화는 단순히 거주 공간을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탈시설화는 첫째, 장애인의 삶의 터전이 착취와 수탈을 반복하는 식민화된 공간이 아닌 주권적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이다. 둘째, 정치인들이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정치적 표상으로 장애인(시설)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셋째, 장애 관련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유무형의 이익이 에이블리즘을 공고히 하는데 활용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물론 탈시설화에 성공했다고 유토피아가 도래하지는 않는다. 에이블리즘은 또다시 장애인을 식민화하기 위해 진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탈시설화를 위해 물리적인 조건의 변경과 함께 끊임없이 (재)시설화를 정당화하는 에이블리즘을 간파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록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지만 멀리 캐나다에서나마 탈시설장애인당(當)을 지지하는 글을 쓴다. 나처럼 에이블리즘에 저항하고자 하나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에이블리즘이 우리 사회를 거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겁 많던 내가 (내 마음에 세워진 망명 정부 같은) 전장연을 만나 용기를 낸 것처럼, 탈시설장애인당은 주저하고 있던 수많은 시민의 가슴에 저항의 불꽃을 일으켜 서로를 연결하는 장(場)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탈시설장애인당 공동대변인으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탈시설화를 향한 새로운 연대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탈시설화는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우리 모두의 해방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모든 정치 집단과 국민에게 탈시설장애인당 지지를 간곡히 요청드린다. 장애인이 잃어버린 주권적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번 총선에서 탈시설장애인당과 적극 지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자 소개

황상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특수체육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캐나다 앨버타대학교(University of Alberta) 박사후 연구 과정에 있다. 탈시설장애인당(當) 공동대변인을 맡게 된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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