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갈무리, 2013)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질병을 치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재생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경험을 드러내기 보다는 치료와 극복담론을 오가며 질병과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가공된다. 결국 아픈 사람은 의료권력, 정상성 신화, 사회복지/의료서비스 체계 안에서 타자화 된다. 건강한 몸을 이상화 시키며 그 반대편 자리에 질병과 장애를 위치시킨다.

책 『몸의 증언』의 영어제목은 “The Wounded Storyteller” (상처받은 스토리텔러)이며 ‘이야기를 통해’ 몸을 듣는 것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증언과 목격이라는 윤리적 의무를 설명하며 함께 공명하기를 제안한다.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갈무리, 2013)

아플 때, 나는 어떠한가

“혼돈의 서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비난 받는다. 그러나 혼돈을 살아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    - 『몸의 증언』

나는 아플 때 스스로를 자기 관리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특정 증상이 심해지거나 이전보다 느린 속도로 회복될 때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픈 몸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관계와 일의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관리를 잘하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걸며 관리 못한 나를 질책했다. 나에게 ‘아프다’란 말은 일종의 금기어였고, 두려움의 다른 말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 몸의 통증과 장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장애로 인해 혹은 다른 원인으로 생기는 아픔은 우리가 함께 일하기 위해 서로가 알고 배려해야할 기본적인 정보이며 다른 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감각을 익히게 해준다.

의학담론에 갇히길 거부하는 몸

우리는 곧잘 전문의를 통해서 제대로 설명 받지 못하는 각자의 질병과 아픔에 대해서 토로한다. 질병과 아픔은 때론 어떤 의학전문서적이나 논문에서 치료의 성과로 도구화되기도 한다. 장애를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수술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하거나 실패했던 기억인데도 한편에서는 탁월한 치료법으로 소개된다. 『몸의 증언』에 나오는 “전문적인 텍스트는 내 몸을 필요로 했지만, 그 요구를 인정하지는 못했다.”는 통찰은 그래서 반갑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의학에 몸을 양도하지만 점차적으로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고수하고자 노력한다고 설명하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비슷하다. 인간에게 의학의 도움은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의학담론과 사회가 의료의 권력을 믿고 따를 것을 권하지만, 어떤 이는 의학담론에 내 몸이 갇히길 거부한다.

그래서 종종 신통치 않은 의사의 진료보다는 같은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동료의 조언과 경험담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의학정보와 상식이 아니라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지나온 시간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아픔과 장애에 대한 다른 감각을 알려준다. 나는 이럴 때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먼저 경험했다는 것이 여러모로 지혜로움을 준다고 믿게 된다.

몸의 통제, 질병의 예측가능성과 우연성

“소통하는 몸은 자신의 우연성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몸은, 그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취약하다. 고장은 몸에 내재되어 있다. 몸의 예측가능성은 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연성은 정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 『몸의 증언』

이 책은 몸의 통제, 질병의 예측가능성 상실과 우연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측가능성을 강조하며 몸과 질병의 통제를 자기 관리의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올 때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과 무력감이 있다. 이 글은 스스로에 대한 질책에서 나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훈육된 몸, 비추는 몸, 지배하는 몸, 소통하는 몸 들 속에서 우리가, 사회와 내 몸이 어떤 영향과 관계를 주고받는지 설명해 준다.

또 질병의 우연성과 고통에 대해서는 폭풍우에 의해 난파된 것에 비유한다. 그러나 난파되었다고 삶과 일상이 끝나진 않는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에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며 수동화 되거나 자신을 무력화하는 대신 자신의 통증과 아픔을 설명하며 관련된 복지체계에 대해서 비판하며 개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에 관련한 일들을 더 이상 전문가나 국가기관에만 의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무엇으로 이야기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도 늘 존재한다.

증인과 목격 그리고 공명

“이야기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큼이나 타자를 위한 것이다. 이야기하기라는 상호성 속에서, 화자는 타자의 자아 형성을 위해 자신이 안내인이 될 것을 제안한다. 타자의 그러한 안내를 받아들이는 것은 화자를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그녀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 『몸의 증언』

옮긴이의 말처럼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정신-육체 이분법에 대해 재고할 것을 권유하며 이 책은 다양한 경험이 드나드는 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몸에 대한 여성주의 적 탐구나 실천과도 만난다. 저자는 내가 나의 질병의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하는 증인이 되고, 듣는 이 역시 다시 증인이 되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의 윤리적 실천이라고 전한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왜 나의 이야기와 만나는지, 또 나의 이야기를 말 할 힘을 얻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와 서로의 이야기의 증인이 되고,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목격자와 증인이 되는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실천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일러주기도 한다. 이것은 이야기 속에서 공명하고 나의 말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끝없는 각자의 고통 속에서 거닐면서도 서로를 만나고 대화해야 할 충분한 가치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야기에 공명하면서도 섣불리 나의 기준으로 의미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통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는 이 책을 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몇 가지 메시지에서 내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완쾌와 투병 사이에 존재하며 양쪽 모두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한 회복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현재는 비가시적이지만 만들어가야 할 틈새와 연결에 대한 영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기가 중요한 만큼 이야기의 권력도 각기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 인정받지 못하거나 유통되지 않는 이야기의 주인도 있다. 그 긴장감이 우리를 조금 더 괜찮은 이야기의 화자이자 청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글은 장애여성공감 소식지 『공감』 13호(2014년 하반기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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