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휴학을 한 나는 작년에 여러 영화제를 돌며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보든 장애인 접근성이 마음에 걸렸다. 극장 자체가 사방이 모두 계단뿐인 곳도 많았고, 배리어프리 영화 섹션은 따로 있거나, 아예 찾아보기 힘들기도 했다. 접근성이 추가적인 예산을 요청하며, 이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적은 지금으로서는 한편 이해되는 측면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그러던 중 한 영화제에서 제작 과정 처음부터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한 영화를 여러 편 발견했다. 아무래도 내가 접근성 담당으로 실험 다큐멘터리 ‘귀귀퀴
친구의 활동지원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년 말이었다. 벌써 1년도 넘은 이야기다. 친구가 쓰러졌다. 의식이 없다. 나는 부탁을 받아 이 사실을 함께 활동하던 장애인권 동아리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선생님은 미안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잘못하신 게 어디 있어요. 선생님은 그 뒤로 며칠, 짧게는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연락하셨다. 상황이 변하면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보내오시는 연락들에 친구의 소식은 없었다. 중년 남성들이 으레 보내곤 하는 덕담 이미지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공부를 하다가 쓰러졌다고 들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무
몇 년 전 친구를 떠나보냈다.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는 눈을 감고 내 앞에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울 줄 모르는 이도 울게 만드는 비참함이 내 곁에 한참을 머물렀다. 49재를 지내러 그의 장례를 치른 절에 갔다. 49재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나는 그 장소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절의 처마 끝을 찍었다. 날아다니는 새들을 찍었다. 절의 수풀을 찍었다. 타오르는 어떤 불길들을 찍었다. 집 근처 사람 없는 냇가에서 쓰러진 나무를 찍었다. 흐르는 물을 찍었다. 걷는 길을 찍었다. 부서진 벽돌을 찍었다. 버려진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가족끼리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조용한 주택가를 따라,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해지는 곳으로 가서 차를 댔다.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차를 더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내 생일에는, 할머니 없는 시간이.할머니의 알츠하이머는 점점 진행이 빨라지고 있다. 할머니는 작년에 알츠하이머를 진단받았고,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올해 초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두 사람을 집 근처로 모신 뒤로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운전을 할 수 있는
나는 약발이 잘 듣는다. 맞는 약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맞는 약을 만나기만 하면 효과가 워낙 좋아서 조절을 잘해야 할 만큼. 그런데 약이 잘 든다는 게, 약이 처음 목표로 한 효과만 잘 드는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효과도 진하게 나타난다.원래도 크론병 때문에 수면의 질이 좋지는 않았다. 속이 불편해서 잠에 쉽게 들지 못하고, 잠들더라도 자주 깨다 보니 하루도 아침에 개운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는 날이 거의 없었고, 개운하다는 감각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는 일의 가짓수가 많아지고, 생활하는
방영 내내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종영했다. ‘한 번 본 것이면 무엇이든 기억하는 천재 자폐인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는 주인공 외에도 주변 인물들의 매력과 다양한 주제의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여러 분야의 논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드라마란 애초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사랑을 받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목표인 매체이기에, 작품 자체에 더 바라는 것은 크게 없다. 다만, 이 드라마가 어떻게 그만큼의 사랑을 받았고, 그 배경에 어떤 사회의 모습이 있는지, 그리고 매력을 위해 드라마가 희생시킨 것
6월 중순, 온 가족의 목에 이상이 생겼다. 목이 따끔거리고, 기침이 나오고, 코가 막히고, 두통이 왔다. 평소에 가장 건강한 아버지까지 감기 기운이 왔다. 코로나19가 끝난 듯한 느낌으로 지내던 시점이었다. 밀접접촉자가 된 적은 수차례 있었으나, 우리 가족 중 누구도 확진자가 된 적은 없었다. 자가진단키트와 PCR 검사에는 매번 음성이 찍혀 나왔다.전체 국민 중 누적 확진자의 비율이 30퍼센트를 넘어간 이후로 나와 친구들은 사실상 이 정도면 집단면역이 달성된 상태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2022년에는 외식할 때도 별로 조심한
▷(전편) [잠실포차②] 농부에겐 땅이, 노점상에겐 마차가… 그곳에 삶을 짓다 / 김윤영 굳은 얼굴에 한 음절 한 음절 똑 부러지는 말투를 가진 위원장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빈말이 없었다. 같은 단체 동료 활동가들은 안건지만 쓰면 틀린 맞춤법과 비문을 잡아내는 영 까다로운 위원장이라고 흉보곤 했지만, 거기엔 똑똑한 위원장이라는 자랑도 내심 담겨 있었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을 지내던 시절(2012~2013년) 김영진에 관한 이야기다.2012년 서초구청 앞에서는 서초구 노점상들의 집회가 열렸다. 핵안보정상회담 기간 동안 노점상
▷(전편) [잠실포차①] 싸우는 ‘장사공동체’의 탄생- ‘먹고사니즘’이 만든 싸움의 천재들89년도에 시작한 잠실포차에 그나마 천막이나 두르게 된 것은 2002년 월드컵이나 되어서였다. 월드컵을 앞두고 또다시 포차를 철거하려 시도하다가 결국 실패하자, 기왕이면 반듯하게 지어 보기에 깔끔하면 좋겠다는 송파구와 롯데의 제안에 따라 천막을 둘렀다. 여러 약속을 거치며 천천히 잠실포차의 마지막 모습이 만들어졌다. 먹고 살기 위해 마차를 붙들었던 상인들의 의지가 날마다 창의적인 싸움과 협상 결과를 이끌어냈다.잠실포차는 더 이상 ‘문 닫으면 고
잠실은 88올림픽과 함께 만들어진 도시다. 잠실운동장과 올림픽 공원, 선수·기자촌 아파트가 들어서며 잠실은 송파구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지어진 아파트들이 2000년대에 접어들어 “경축 안전진단 D등급”과 같은 현수막을 내걸고 재건축을 기다리는 흥망성쇠를 거친 반면, 높은 건물에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역사는 다르다. 바르게 난 경계를 따라 주거단지와 상업 단지가 투명한 유리문을 끼고 건설되면서 잠실 곳곳에 있던 노점상들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올림픽선수촌, 석촌호수, 교통회관, 신천, 새마을시장, 가락시장1) 등지에 있던 노점상들은
지난 4월, 시공사 일주종합건설은 6성급 ‘서울드래곤시티호텔(SDC)’과 용산역을 잇는 공중보행교 공사를 위해 서울시 용산역 인근의 텐트촌을 철거하겠다고 찾아왔다. 이 공중보행교는 텐트촌 일부를 가로질러 설치될 계획이다. 이미 2017년 10월에 서울드래곤시티호텔이 개장했을 때 호텔 경비원은 기존 구름다리 내의 노점상과 홈리스를 전부 쫓아냈는데, 이번에 강제철거 통보를 받은 홈리스 중 한 사람은 그때 기존 구름다리에서 쫓겨나 현재 텐트촌에 머물게 된 사람이다. 텐트촌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텐트촌 주민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주
한 번 보고 잊을 수 없는 어느 외국 밈(meme)이 있다. 영화 에서 배가 가라앉는 장면과 배 위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면을 캡처해서 두 장을 이어붙인 후, 각각에 짤막한 설명을 붙이는 밈이었다. 내가 본 것은 아마 대학원생 버전이었던 것 같다. 배가 가라앉는 장면에는 ‘지금의 세상(the world right now)’이라는 말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면에는 ‘논문을 쓰고 있는 나(me writing my thesis)’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에게 이 밈은 공부하고 글을 쓰다가 느끼곤 하는 허무함을 포착한
엘리베이터도 많아졌고, 저상버스도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라고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냐는 말들이 사방에서 범람한다. 그래, 이제는 과거와 달리 스타트업을 이끄는 장애인도 있고, 법조계에서 일하는 장애인도 있고, 장애대학생도 있고, 장애인 교수도 있으니, 그런 성공의 서사들만 얼핏 본 사람들은 ‘장애인 살기 좋아졌다’고 정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2016년, 나는 대학 안에 있는 장애인권동아리에 가입했다. 학교 근처 상권을 조사했다. 상인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불편한 기색을 비
몇 년 전에 등장해서 지금까지도 꽤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고 있는 ‘기레기’라는 말은 온라인 댓글 창을 넘어 드라마와 같은 대중 매체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을지언정,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종종 권력이나 자본에 매수당하거나, 조회 수를 올리는 데 급급해서 본래의 역할을 잃은 언론이 등장한다. 분명 좋은 기자들과 훌륭한 기사들이 있음에도 ‘기레기론’이 득세하는 데는 적지 않은 기사가 맥락 없이 사실의 파편만을 투척하기 때문일 테다.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혜화역 지하철 시위나 탈시설 논쟁에 관한
- 나의 청춘, 종로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쭉 경기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울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이방인이다. 특히 서울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는 경기도인의 숙명 상 서울은 면이라기보다는 선과 점으로 연상되는 공간이었다. 서울과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은 빨간 광역버스였기 때문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잠실운동장으로 가는 날은 콘서트가 있는 날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역으로 가면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괜히 몰려 나가는 날이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종로를 가는 날은 가장 신나는 날이다. 신촌이나 홍대에 있는 클럽으로, 광화문의
나의 편향된 관심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에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금융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지금 우리 학교는〉은 계급 불평등과 성차별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발생하는 학교폭력 등을 ‘비판적으로 재현’한다고 이야기된다.미디어에서 사회비판적 함의를 발견해내고, 문제의식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건 나처럼 수많은 시청각적 매체에 둘러싸여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혐오로 먹고사는 극우 유튜버나 ‘사이버 렉카’
*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2021)과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2020)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한 독서모임에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은 후로, 지금의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마다 ‘위험사회’는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리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합리적인 ‘이성’이 언제나 우리에게 ‘발전’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으로 과학과 기술로 대표되는 ‘문명’에 사실상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생겨난 기후위기와 같은 수많은 위험 안에서 살아가게 된 우리의 삶을 포착하는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질병권을 고
대선을 앞두고 선거캠프들에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말밥에 오른 것 중 하나는 조동연 전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아래 조 전 선대위장)의 ‘혼외자 논란’이다. 소위 ‘사생활 논란’이라고 불리는 것들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중에도 조 전 선대위장이 이혼 당시 혼외자 때문에 귀책배우자였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내 소셜 미디어 피드에 올라왔다.어떤 이들은 조 전 선대위장이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하게 되었으므로 그에게도 ‘검증’이 필요하다
몇 달 전의 일이다. 멀끔한 양복 차림으로, 알이 큰 메탈 소재의 시계를 차고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해둔 사람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크론병 치료제가 개발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소식을 알려주어 고맙다고 답장하니, 그는 나에게 직접 만나서 그 약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주치의 선생님과 알아서 잘 해결하겠다고 말했다.9월의 일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로 난데없는 아침 인사를 받았다. 그는 나를 방송에서 봤다며,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 이 글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결말과 인물 정보 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산’이라는 소비 트렌드현재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리즈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두고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고 있다. 수많은 해석과 비평들은 ‘미녀’(김주령) 역할이 성차별적인지 아닌지에 관한 이야기처럼 ‘오징어 게임’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부터, ‘대장 가면’인 ‘인호’(이병헌)가 과거 살았던 고시원에 놓여 있는 책이나 그림엽서들과 같은 ‘떡밥’을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