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나는 교육을 받기는 받았는데 얻은 게 하나도 없다.” (최동운)1)“탈시설을 하고부터는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물론 사람들과 다투고 열 받는 일도 생기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지 않습니다.” (이상근)2)“인간은 시민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만들어진다.” (스피노자)3)사람이 아닌 시민은 없다. 하지만 시민이 아닌 사람은 있다. 인간은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시민이 된다. ‘장애인도 시민권 열차에 탑승시켜 주십시오’라는 외침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를 낳
- 전쟝연 행동대장의 관상‘전쟝연 행동대장’. 동료가 보내준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본 게시물의 제목이었다. 게시물에는 사진 두 장이 있었다. 댓글을 기반으로 사진 속 인물을 묘사해 보자면 “눈빛 보소 ㅋㅋ”의 강렬한 눈빛, “건장한 젊은이가 왜 저런 길을…ㅉ”을 부르는 체격, “경호 인력 쓴 거?”라고 의심할 정도의 카리스마, “관상 ㄷㄷ”을 부르는 압도적인 관상을 가진 사진 속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였다.장판(장애 운동판)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느닷없이 행동대장이라는 입지전적 인물로 등극한 것도 놀라운
『변신』이 탈주(fuite)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던가요? 네, 『변신』은 회사 생활과 부양가족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몸이 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애정에 이끌려 인간적 과거에 미련을 갖게 되고, 그 미련에 가로막혀 동물적 삶의 탐색을 중단하고 말죠. 이후 그는 자기 방 안에 봉쇄되어 아버지의 심판과 가족들의 방치 속에서 죽어 갑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변신의 보고‘변신’이 ‘탈주’의 방법임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17년 오스트리아 조간신문에 게재된 「학술원에 드리는
- 520번의 금요일올해 4월은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엄숙히 지키는 모임들로 가득하다. 그 와중에 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은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지난 10년간 사연을 구술기록을 통해 담아낸 책 『520번의 금요일』을 펴냈다. 동시에 한때 사회가 ‘아이들’이라고 불렀으나 어느덧 청년이 된 세월호 생존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도 펴냈다.두 책을 읽으며, 10주기를 기념하는 여러 모임에 참여하며, 520번의 금요일이 지났다는 사실 앞에서 탄식
[편집자 주] 본 연재는 질병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과 연결 지어 살펴본다. 질병과 아픈 몸은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질문하는 동시에,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과 변혁적 사회운동의 불/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더 나은 운동’은 무엇일까?“이제 운동은 접은 거야?”1990년대 긴 학생운동을 마치고, 2001년 여성운동을 하기 위해 여성단체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단체에서 여성 노동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운동권 선배’들은
『변신』의 초안이라 부를 수 있는 산문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산문집 『관찰』(1915)에 실린 「갑작스러운 산책」은 가족 관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의 일상성을 보여줍니다. “실내복을 입고 저녁 식사 후 책상에 불을 켜고 앉아 습관처럼 이런 일이나 저런 놀이”를 시작하는 어느 날입니다. “날씨는 음울해서 집에 머물러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어제는 꽤 오랫동안 책상에 머물러 있어서 외출한다는 것이 당연히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고”, “층계도 어두워지고 대문도 잠겨 있는”, 여러모로 바깥에 나가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
- 사라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내게 지난 2월 27일은 숨 가쁜 노동의 날이었다. 새벽 5시 30분 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일을 본 후, 택시를 타고 울산으로 이동해 또 일을 보고,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다시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이동해서 저녁 6시 50분쯤 역 앞의 한 모텔에 겨우 짐을 풀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노트북을 열고 목록에 뜨는 와이파이 중 하나를 잡아 줌을 연결했다. 탈시설정책위원회 2월 연속 세미나 2부인 ‘탈시설 장애인의 노동과 사회통합’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줌으로 모여 이슬 교수님의
[필자의 말] 노들장애인야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 속에서 마주친 시적인 순간들. 눈부시게 뻐근한 순간들. 이례적으로 아름답고 잔인한 순간들. 사안과 의제를 따라 순간 나타났다가, 순간 사라지는 활동과 투쟁들 사이에서 발견한 시,의적절한 순간들이 두고두고 내게 힘을 주었다. 차별과 혐오에 맞선 자들이 사랑할 만한 세계를 발견하고자 할 때, 살아갈 만한 세계를 발명하려 할 때, 한 줄 쓰임이 있었으면 한다.- 철창을 끄는 무리들심장이 메슥거릴 만큼 뛰었다. 한여름 광화문 거리를 철창을 끌며 뛰었다. “시간 없어, 문 닫을 시간
- 강의를 듣는 건 나만의 취미활동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연초만 되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 계획 세우기에 몰두한다. 이미 사무실 일이 차고 넘치는 상황인데도 새해만 되면 무언가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굳어만 가는 몸을 위해 운동도 하고 싶고, 그림과 악기를 다루는 취미생활도 해 보고 싶고, 뭔가 학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평소 굳게 닫혀 있던 욕망의 항아리가 들썩거리다 뻥 터져 나올 듯, 하고 싶은 게 갑자기 이것저것 마구 떠오르는 것이다. 비록 작심삼일도 못 가는 욕망이지만.이럴 땐
카프카는 유대인이었고, 결혼을 기피한 독신자였으며,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 소수자 범주에 속하는 이런 객관성뿐만 아니라 주관성에 있어서, 즉 자신을 언제 어디서나 주류에 끼지 못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한 소수자였습니다.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Hermann Kafka, 1852~1931)는 주류의 삶을 꿈꾸며 시골의 유대공동체(게토)를 떠나 대도시 프라하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서 장남 프란츠 카프카를 낳았지요. 프라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의 수도로 체코 민족이 다수였지만,
최근 국제 인권 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씨도우’가 화두다. “그 단체에서는 씨도우 준비하세요?” “요즘 씨도우 분위기는 어떻대요?” “이번 씨도우 정말 중요할 텐데, 투쟁입니다!” 장안의 화제 씨도우, 대체 뭘까?‘씨도우’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CEDAW) 영문명의 두문자 약어다. 한국은 이 협약에 1984년 가입했고, 올해 5월 9차 심의를 앞두고 있다. 여성 의제는 다양한 인권단체에서
한 시민분이 내리면서 저희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시더군요.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요. 네. 그러지 않아도 저는 이미 지옥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도 누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 버티듯이 살아내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수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동예 ( 「[투쟁결의문]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비마이너, 2022. 6. 15.)신중했어야 했다. 특히 사진을 더 잘 골랐어야 했다. “웃는 사진은 없냐?”고 선배가 물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졸업식
[필자의 말] 이번엔 카프카다! 노들장애학궁리소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 일은 ‘장판에서 푸코 읽기’, 즉 장애인 운동의 시좌(視座)에서 미셸 푸코의 철학을 읽는 연구였다. 두 번째 연구는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 읽기’로, 장애학의 시좌에서 그리스 비극을 읽음으로써 비극의 의미를 탈구축하는 동시에 소수자의 관점에서 운명애를 정치적으로 재구축하는 작업이었다. 두 권의 책을 내고 나니 이번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카프카의 소설을 좋아해서 카프카 전집 읽기 세미나도 했다.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소수자의
2023년 겨울, 미국의 영화사 디즈니는 100주년 기념작으로 〈위시(Wish)〉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떠나서, 이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소원을 이뤄주는 좋은 왕’에 대한 원형적 이야기는 시설에 대한 비판적 서사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탈시설 운동과 정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영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작품 속의 이야기와 상징들에서 시설을 둘러싼 맥락과 상황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다).이 작품에는 가족을 잃고 지중해의 외딴섬에 흘러 들어간
- 한종선의 붕어빵허여멀건한 반죽을 붕어빵 틀에 흘려 넣는다. 붉은 팥소가 퉁퉁 썰리듯 반죽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위를 반죽으로 다시 덮고 뚜껑을 닫는다. 한 번 휙 돌려 반대편도 노릇하게 굽는다. 시뻘건 화기가 덜그덕거리는 붕어빵 틀을 달군다. 목장갑을 낀 남자의 손은 이제 막 바빠질 참이었다.“광주 북구청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구청 직원 둘은 자신이 구청 식품위생과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를 찾아오는 구청 직원의 얼굴은 매번 달랐지만 남자에겐 동일한 악성민원인의 모습이었다. 작년 10월 이곳에서 장사를
- 전장연 지하철 투쟁 이후, 늘어난 조롱과 혐오의 댓글혹시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7월 17일, 비마이너는 모든 기사의 댓글창을 폐쇄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일입니다. 사실 비마이너 홈페이지에는 댓글이 많이 달리는 편이 아니었는데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 이후 조롱과 혐오의 말들이 댓글창을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탈시설 기사에는 탈시설에 반대하는 이들이 ‘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립능력 없음’을 강조하는 댓글을 남기고 갔습니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 그리고 생각나면 틈틈이 댓글창을 살피
지난 8월 18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긴급상황을 포함한 탈시설 가이드라인’ 채택 1주년 기념 토론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탈시설 가이드라인은 전 세계 장애인 당사자, 가족, 지원자들의 의견을 대대적으로 수렴해 만들어져 2022년 8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공식 채택되었습니다. 토론회는 △시설에서 지역사회로의 장애인 서비스 변환 △시설수용에 대한 구제(배상) △교차성 및 긴급상황과 탈시설 총 3부로 구성되었습니다.이번 토론회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탈시설 의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전 세계 장애인들이
-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나의 입학통지서내가 8살이 되자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집에 왔다. 통지서를 본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학교를 어떻게 보내?”라는 말과 함께 입학통지서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나는 의무교육이라고 말하는 학교 대신 온갖 치료실만 열심히 다녔다. 치료실에 갔다 오면 누워서 줄곧 티브이만 보았다. 그런 내가 한심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한글이라도 배우라며 방문학습지를 신청해 주셨다. 그렇게 2년여 동안 어머니는 나를 입학 유예시키며 장애가 호전되기만을 바라셨
《 정신건강복지법 특집 》① 새벽 2시, 강제 입원을 둘러싼 응급실의 다툼② 국가 없는 자리, 정신장애인 불법 강제 이송의 문제③ ‘어쩔 수 없는 격리·강박’이라는 잘못된 믿음④ 위기의 다양성, 지원의 다양성 : 당사자쉼터와 위기카페⑤ “제게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 강아지를 돌봐주세요”⑥ 퇴원할 수 있지만 퇴원할 수 없는- ‘이동할 권리’와 수많은 문턱들지난 20여 년간 장애운동의 핵심 의제 중 하나는 ‘이동할 권리’였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당사자의 앞에 수많은 문턱들이 켜켜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현관의 문턱이, 시내·시외버스의 계
얼마 전, 한 기사를 접했습니다(〈[기자수첩] 탈시설, 왜 장애인 주거선택권을 박탈하나〉, 김현우 기자, 여성경제신문, 2023년 5월 17일).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느라 직장도 그만두고 삶이 피폐해진 어머니의 사례로 시작하더군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시설이 꼭 필요한데 정부의 ‘무분별한’ 탈시설 정책 때문에 장애인과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에 처해 있다며,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에겐 장애인 전문가가 상주하는 거주시설이 ‘유일한 생존 대안’이므로 ‘장애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처음에는 ‘아